숙향전.숙영낭자전 문학동네 한국고전문학전집 5
이상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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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감정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감정 중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감정으로 여겨진다. 그런데도 사랑을 소재로 한 이야기는 통속 소설 나부랭이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 왜 그런걸까? 어쩌면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게 더 많은데 고작 사랑 이야기나 나불대기에는 이 세상이 살기 힘드니까?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사랑이란 건 지극히 사적인 감정이다 보니, 누군가의 사랑 이야기를 읽으면 꼭 누군가의 사생활을 엿보는 느낌이 들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뒷짐지고 에헴하면서 체면을 따지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근데 나 같은 경우에는 사랑 이야기가 너무 유치해서 좀 싫어하는 편이다. 시쳇말로 그 나물에 그 밥이랄까?(笑)

그래도 요즘 소설을 보면 심리 묘사에 충실한 사랑 이야기가 참 많아졌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에는 나이도 국경도 없다는 세상이다 보니 사랑을 이루기 쉬워서 그런지는 몰라도, 두 사람을 둘러싼 조건이나 환경보다는 두 사람만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느낌이다. 하지만 고전을 읽다 보면 조금 다른 느낌이 든다. 특히 이번에 읽은 숙향전과 숙영낭자전은 환상성이란 모티브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그 시대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숙향전은 현대 소설로 따지자면 장편소설에 가깝다. 숙향의 탄생부터 성장, 시련, 배필인 이선과의 만남과 그 이후의 삶까지 이어지는 이야기는 숙향의 일대기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숙향은 월궁의 선녀였으나 천상에서 지은 죄로 인해 인간 세상에 태어나 살면서 그 죄를 갚고 다시 천상으로 돌아갈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총 다섯번의 죽을 액을 넘겨야 숙향에게 진정한 행복이 찾아오게 되는 것이다. 이는 숙향의 탄생과 동시에 설정된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이걸 보면 요즘은 운명에 맞서는 시대라고 떠드는 시대지만, 숙향전이 지어졌을 당시는 운명론적인 삶, 숙명론적이 삶이 그 당시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었음을 쉬이 짐작할 수 있다.

숙향은 양반의 딸로 태어나지만 전쟁통에 부모를 잃고 첫번째 죽을 고비를 만난다. 이렇게 해서 숙향의 시련이 시작되는데 숙향은 그 고비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게 된다. 이는 원래 숙향이 천상의 사람이니 벌을 받기 위해 인간 세상에 태어났어도 언제나 누군가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지만, 숙향은 그 시련을 스스로 벗어날 수 없다. 아무리 어떻게 해보려 해도 그 시련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숙향이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 싶다는 말에 "하늘이 벌써 정하신 일이기 때문에 낭자 마음대로 할 수 없나이다." (47p) 라고 대답하는 선녀의 말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숙향은 처음에는 양반인 김전의 딸로 태어나 전쟁통에 김전 부부와 헤어진 후에는 장승상의 집에서 거두어 들여지지만, 하녀 사향의 모함으로 쫓겨나게 된다. 이건 고전이나 현대물이나 꼭 빠지지 않는 구성일지도 모르겠다. 뒤에 나오는 숙영낭자전 역시 첩인 매월의 모함을 받게 되니까 말이다. 어쨌거나 여기에서도 재미있는 것은 장승상 부부가 아무리 숙향을 귀여워한다 해도 자기 자식이 아니기에 쉽게 의심한다는 것이랄까. 만약 숙향이 장승상 부부의 딸이라면 아무리 사향이 모함을 해도 사향을 내쳤을 것이다. 팔은 안으로 굽으니까. 결국 숙향은 사향의 모함에 쫓겨나듯 집을 나서고, 그후 후회하는 장승상 부부가 숙향을 찾아 나서지만 자결했다는 이야기만을 듣는다. 장승상은 통곡하는 부인에게 "낳은 자식도 죽은 뒤에는 울어봐야 소용없거늘, 남의 자식 때문에 너무 애태우지 말구려." (54p) 라는 말을 하는데 이 또한 출신도 모르고, 자기 자식도 아닌 숙향이 남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즉, 숙향전이 씌어진 조선시대는 아무래도 지금보다 더 혈연과 신분이 중요했던 사회였다는 것을 방증한다고 보여 진다. 숙향은 이후 또다른 죽을 고비를 넘기고 한 할미를 만나 낙양의 이화정에 기거하게 된다. 이때까지 숙향은 총 네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다. 

그 다음으로 나오는 이야기는 이선으로 태어난 태을선군의 이야기이다. 상서 이정 부부는 오랜동안 자식이 없었으나 기원을 통해 아이를 점지받는다. 이선의 탄생과 성장과정은 숙향의 이야기에 비해 분량이 많지 않고, 오히려 장성하여 숙향과 만나는 이야기 부분이 길다. 원래 숙향과 이선을 맺어줄 존재로 등장하는 이화정 할미(마고선녀)은 이선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 이선을 시험한다. 이 시험을 통과한 후 이선은 드디어 숙향과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선의 아버지 입장에서는 숙향이 달가울리 없다. 이에 대한 것은 여러 군데에서 언급된다.

"네 부친의 성품이 남달라서 결코 의지할 데 없는 미천한 사람을 며느리로 삼을 리 없으니, 이 일을 어찌하리오?" (97p)

'이번 혼사는 누님이 주관한 것이요, 또 선이 그 계집을 좋아한다 하니 달리 방도가 없도다. 그 여자는 의지할 데 없는 고아라 하니, 낙양 수령에게 몰래 기별하여 처리하게 하리라.' (99p)

"그 여자를 반드시 죽이려 했는데, 우리 누님이 하도 말리시니 그럴 수가 없도다. 그 여자를 죽이지 말고 놓아주되, 멀리 보내 그 근처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라." (107p)

첫번째는 이선의 고모의 말이고, 나머지 둘은 이선의 아버지의 말이다. 이 세 문장만 봐도 이선의 아버지 상서가 숙향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낱낱이 보여준다. 하지만 이 이선과 숙향의 인연은 하늘에서 맺어준 것이고 숙향의 시련도 이제 모두 끝이 났으니 숙향은 곧 이상서 부부의 며느리로 받아들여 진다. 그후에는 이선이 과거에 장원급제 하고 한림학사로 봉해진다. 그러나 두번째 부인을 맞으라는 청을 거절한 죄로 황태후의 병을 고칠 비약을 구해오라는 명을 받게 된다. 숙향의 시련이 끝남과 동시에 이선의 시련이 시작되는 것은 무척 재미있는 설정이지만, 숙향에 비해 이선의 시련은 그다지 시련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선 역시 가는 곳마다 도움을 받게 될 뿐 아니라, 선인들과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니 말이다.

이렇듯 숙향전은 태생부터 남다른 숙향의 이야기는 환상성과 현실성이 절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환상적인 요소는 탄생부터 시작되어 숙향이 고비를 맞을 때 마다 등장하는 이세계의 존재들에서 극대화된다. 하지만 반면 숙향이 장승상의 집에서 쫓겨나거나 이상서의 집에서 천대를 받던 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가 된다. 만약 둘 중 어느 것 하나에 더 큰 비중이 실렸더라면 이런 재미는 없었으리라. 소설은 현실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현실에서는 감히 이룰 수 없는 꿈과 욕망을 드러낼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니 말이다.

숙향전이 이렇듯 숙향의 일대기처럼 긴 소설이라면, 숙영낭자전은 중편 길이의 소설이다. 양반의 아들로 태어난 선군은 이십년만에 태어난 아들로 귀하디 귀한 아들이다. 선군 역시 천상의 선관이었던지라 태생부터 남다르다. 또한 태어나면서부터 수경낭자와 맺어질 인연을 타고 났다. 선군은 장성하여 배필을 찾던 중 꿈속에 나타난 수경낭자를 만난다. 하지만 삼년을 기다리라는 말에 선군은 병이 들고, 이에 어쩔 수 없이 수경낭자는 선군을 자신이 있는 옥연정사로 불러 들인다. 숙향전과 달리 수경낭자는 인간 세상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선녀 그 자체로 나온다.

삼년이란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결국 만나버린 두 사람. 숙향전과는 달리 운명이 좀 비틀어진다. 이게 비극의 씨앗인 될 줄 누가 알았으리요. 선군이 그리 보채지만 않았더라면 수경낭자가 모함으로 죽을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수경낭자를 모함한 것은 선군의 첩인 매월이었는데, 처첩의 갈등은 우리나라 옛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일이라 그리 신기할 것은 없는 듯 하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선군이 조금만 참고 기다렸다면 다른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하는 생각과 더불어 삼년을 기다리지 못한 것도 어쩌면 이들의 정해진 운명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 또한 숙향전의 이선보다 숙영낭자의 백선군은 철딱서니가 없다는 생각. 즉, 과거를 보러 갔을 때 두 번이나 돌아 오지 않았더라면 숙영낭자가 모함을 받을 일도 없었을 것인데 말이다.

"옛말에 '도적의 때는 벗어도 창녀의 때는 벗지 못한다' 했으니, 제가 이런 누명을 쓰고 어찌 살기를 바라겠나이까? 죽어 모르는 것이 마땅하나이다." (238p)

자신의 남편이라 말하지 못했던 것이 이런 멍에가 될 줄이야. 결국 외간 남자와 간통했다는 혐의를 받게 되는 수경낭자는 결국 자결하고야 만다. 이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당장은 시부모가 자신들이 낭자를 의심한 것을 후회한다손 쳐도 언젠가 또 이런 문제가 불거져 나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는 당시 시대상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 죽음으로써 결백을 증명하리라, 라는 것이랄까. 즉 다른 방법으로는 결백을 증명할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이렇듯 숙영낭자전은 비극의 모티브를 담고 있다. 그것은 그들의 첫만남이 운명을 거슬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운명이란 걸 떠나서 본다면, 출신도 모르는 수경낭자를 백선군의 부모가 쉬이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비극의 씨앗이 되었을 것이다. 이는 수경낭자가 아이를 둘이나 낳을 때까지 혼례도 올리지 못하고 살았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렇듯 천상의 존재들이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과 이계의 존재가 등장한다는 것은 환상성을 가지고 있지만, 숙향이나 수경낭자가 겪는 시련은 인간 세상의 시련이다. 즉, 전생이 어떻든 인간 세상에서 그들은 시련을 겪을 수 밖에 없다. 그건 양반의 체면에 걸맞는 집안끼리의 혼사도 아닌 밖에서 데리고 들어온 출신도 모르는 여자들과 자신의 아들이 혼례를 올린다고 하는 것은 결코 인정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리라. 또한 두 작품 다 여성이 주인공이며, 시련을 겪는 것도 여성이란 점은 당시 여성의 위치가 어떠했느냐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아이를 낳지 못해 마음 고생을 하던 이선의 어머니나, 백선군의 어머니를 보면 당시 여인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에 대해 얼마나 마음 고생이 많았을까를 짐작해 볼 수 있고, 이선은 둘째 부인, 백선군은 첩을 들이는 것에 대해 숙향이나 수경낭자나 거부감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것 또한 당시 시대상을 잘 보여 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고전은 옛이야기지만, 현재와 통하는 맥이 있다. 지금은 비록 신분제도 없고, 남녀가 평등한 시대가 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이런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다. 감히 우리 아들을 넘 봐, 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시어머니감이나, 가족 문제로 결혼을 반대하고 나선다거나 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비록 고전처럼 극적이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고전이 여전히 재미있게 읽히는 것이 아닐까. 시대는 바뀌어도 사람 기본 성품이란 것은 그다지 바뀌지 않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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