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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나는 모래 위를 걷는 개
게키단 히토리 지음, 서혜영 옮김 / 이레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게키단 히토리라는 이름을 검색해 보니 내가 아는 영화 몇 편이 주르륵 뜬다. 일단 내가 격하게 아끼는 츠마부키 사토시와 에이타가 출연한 도로로를 보니 어라라, 건달 역이다. 그러니 내가 기억을 못하지. 그래서 이번에는 드라마 마왕의 출연진을 봤다. 오노 사토시, 이쿠타 토마가 맡은 역까지는 알겠는데, 게키단 히토리의 배역이었던 나오토의 형의 모습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음, 그럼 오구리 슌때문에 봤던 영화 이웃 13호는 어떨까? 어라라, 배역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다. 최근 영화인 골든 슬럼버(책은 아직 못봤다)에도 출연하지만 어째 꽤나 밑에 나오는 것을 봐서 중요 배역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이런 프로필을 보니 왠지 서글픈 마음이 든다. 하지만 인기 개그맨으로 활동 중이란 이야기를 들으니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닌가 보다.
책의 원제인 陰日向に咲く(음지에도 양지에도 핀다)는 꽃은 음지든 양지든 어디에나 핀다는 뜻으로 음지에 사는 사람들, 즉 세상에서는 주목받지 못하는 사람들도 각자 나름의 꽃을 피우면서 살아 간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왜냐하면 등장인물 모두 지극히 평범하다 못한 것을 넘어 우리에게 무시되고 소외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지금은 인기 있는 연예인이지만 어린 시절 열등감을 느낄수 밖에 없어 외로운 학교 생활을 해온 게키단 히토리의 경험이 녹아 있는 책이 바로 이 책이 아닐까 싶다.
이 소설은 연작 소설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처음에는 단편이 다섯편인가 하고 생각했는데, 읽어 보니 등장 인물들이 조금씩 겹쳐져 있다. 게다가 깜짝 반전까지!? 첫번째 작품인 <길 위의 생>은 일에 치이고 가족들과는 데면데면하게 지내는 한 가장이 자유를 찾아 홈리스 생활을 체험하는 일종의 체험기이다. 멀쩡한 집 놔두고, 왜 굳이 사서 고생을 하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회사 생활이나 가정 생활이 원만하지 않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 남자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되기도 한다. 처음에는 쭈뼛뿌뼛하면서 시작한 이중생활을 통해 이 남자는 진짜 소중한게 무엇인지 깨달아가게 된다. 또한 함께 생활한 홈리스 할배의 이야기는 마지막에 완벽한 반전의 재미를 선사한다.
<안녕하세요, 나의 아이돌 님>은 아이돌을 좋아하는 한 오타쿠의 이야기이다. 인기 없는 아이돌 미야코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 남자의 지극정성은 눈물겹기조차 하다. 가진 재산마저 탈탈 털어 빈털털이 신세가 된 이 남자는 앞에 나온 작품의 이중생활 홈리스 아저씨의 도움을 받는데, 이중생활 홈리스 아저씨 덕분에 제정신을 차리고 사회로 복귀한다. 아이돌 오타쿠에서 드디어 졸업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아이돌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가슴 찡한 느낌을 받게 된다. 아, 정말 이런 사랑도 있구나, 하는 느낌이었달까. 미야코는 이 남자의 아이돌일 수 밖에 없었다!
세번째 작품인 <핀트가 안맞는 나>는 첫번째 작품에 등장한 홈리스 아저씨의 딸 이야기이다. 멋진 카메라맨이 되기를 꿈꾸지만 가지고 있는 건 디카 하나. 게다가 카메라의 제대로 된 사용 방법도 몰라 내장 메모리에 저장되는 열여섯장만이 촬영 가능한 사진 수이다. (잘못 찍으면 삭제하면 되는데 그것도 모르고, 메모리카드를 사도 제대로 된 것을 사지 못한다) 프리터로 일하고 있지만 장래 희망을 카메라맨으로 정했을 뿐 그외의 것은 없다. 게다가 남자 둘에게 농락당하기까지 한다. 문득 이 아이는 좀 모자란 아이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지만, 프리터로 산다는 것을 봐서는 그것도 아닌듯 하다. 그저 대인 관계를 잘 맺지 못하는 것 뿐이지 않나 싶다. 유일한 친구는 미키. 미키의 정체가 드러났을 때 헉, 하고 놀랐던 것만 말해 둔다. 참, 여기에는 네번째 작품에 등장하는 역무원이 잠시 등장한다.
네번째 작품인 <신의 게임>은 도박에 정신이 팔린 역무원 이야기이다. 도박으로 돈을 잃고 사금융까지 이용하면서도 정신을 차릴줄 모르는 이 남자. 도박빚에 쪼들려 돈을 마련할 방법을 찾다가 '나야 나' 사기를 치려고 하는데... 우연히 연결된 할머니와의 전화 통화. 그리고 그 이면에 숨겨진 사연에 코끝이 찡해졌다.
마지막 작품인 <소리 나는 모래위를 걷는 개>는 갑자기 세월이 과거로 돌아간다. 도대체 누구와 연결된 에피소드일까. 몇 년째 똑같은 개그 소재를 이용하는 아사쿠사의 삼류 개그맨, 그리고 우연히 수학여행지에서 그를 만난 울보 아가씨의 이야기는 묘하게 가슴을 흔들어 놓는다. 잠깐의 만남이었지만 울보 아가씨 나루코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삼류 개그맨. 나루코는 그를 찾아 무작정 아사쿠사로 온다. 그와의 만남은 해피엔딩일까, 아니면... 이 마지막 작품은 처음에는 누구의 이야기인지 잘 드러나지 않지만 마지막에 그 비밀이 드러난다. 누구에게 뒷통수를 얻어 맞은 느낌이랄까. 그러함에도 전혀 기분 나쁘지 않은 느낌.
노숙자, 아이돌 오타쿠, 프리터, 빚에 쪼들리는 역무원, 삼류 개그맨. 이 작품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외면받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의 인연이 조금씩 겹치면서 서로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준다는 것, 누가 상상이나 해봤을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비록 스쳐지나간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었다는 것. 어쩌면 보이는 것 보다 훨씬 더 큰 인연의 끈이 이들 사이에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것. 어쩌면 이들은 이렇게 스치듯 지나가버린 인연을 잊고 살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인연이 서로의 인생에 있어 어떤 부분을 바꿔 놓았다는 건 정말 기적과도 같은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