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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 - 2008년 제4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백영옥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이 책과 연관된 이미지라면 역시 드라마에서 김혜수가 "엣지있게"라고 이야기하던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원래 나란 인간은 드라마를 즐겨 보는 편이 아닌데다가, 늘 드라마 할 시간엔 할 일이 있던지라 ( 그 일이 무엇인지는 비밀), 드라마 <스타일>은 한 회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드라마와 원작 소설의 비교를 할 수는 없는 입장이다. 오히려 그것이 이 책을 더 재미있게 읽게 만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스타일』의 내용은 단적으로 말하자면, 서른 한 살의 패션지 여성 기자가 험난한 여정을 거쳐 일과 사랑에 모두 성공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다소 뻔한 러브 스토리이다. 게다가 그 러브 스토리를 뻔하게 만드는 요소인 - 공포 영화의 세가지 법칙처럼 - 연애 소설의 세가지 (혹은 그이상) 법칙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첫번째 법칙은 여자 주인공은 평범한 외모에 일은 그럭저럭하는 여성이란 것. 사실 여기에서 여주인공이 쭉쭉빵빵한 몸매에 죽여주는 얼굴을 가지고 있으면 여성 독자들의 외면을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여자들은 대개 자신과 비슷한 평범한 여자의 성공담과 연애담을 원하니까. 두번째 법칙은 여자 주인공을 잡아먹을 듯한 여자 상사나 동료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박기자가 그런 역할이다. 일단 여자 주인공을 좀 불쌍하게 만들어 줘야 그녀의 험난한 성공담과 연애담이 잘 먹혀 들기 때문이다. 세번째 법칙은 여자 주인공은 어린 시절이나 혹은 청소년 시절의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 상처는 꼭꼭 숨겨놓고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지만, 사랑하는 남자에게 털어 놓게 되고, 그 남자가 그것을 감싸 안아 주면서 치유가 된다는 설정이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들라면, 여자 주인공의 상대가 될 남자 주인공은 시니컬한 성격, 완벽한 외모, 완벽한 직업, 그리고 중간중간 그 여자 주인공을 오해할 일이 벌어져 그녀에게 차갑게 대한다는 것이다.
이상이 내가 연애 소설을 잘 읽지 않는 이유이며, 연애 소설이 뻔할 뻔자의 스토리로 흘러가게 되는 요소들이자 연애 소설들의 일반적인 법칙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스타일』역시 다소 뻔한 스토리와 결말을 가지고 있지만 『스타일』이 재미있을 수 밖에 없는 요소는 따로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나니 병 주고 약 주는 것 같긴 하지만, 이런 대비점이 있어야 더 재미있지 않나?
『스타일』의 내용은 영화로도 잘 알려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작가는 당돌하게도 소설속에서 이 영화의 제목과 내용을 거론한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같은 영화는 그저 영화일 뿐이란 소리다. 기사 딸린 회사 차? 회사에 비치된 꿈의 옷장? 시골뜨기를 단박에 패셔니스타로 만드는 위대한 동료애? 그런 걸 바로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라고 하는 것이다. (36p)
작가는 이미 이 책의 내용을 보고 독자가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떠올릴 것이란 것을 염두에 두고 이 글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그것과는 다르다, 라고 아예 못박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이 책의 첫번째 뻔뻔함이다. 그리고 솔직함이다. 그래서 재미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이 재미있는 두 번째 이유. 등장 인물들이 정말 살아 숨쉬는 듯 역동적이란 것이다. 이렇게 봐도 저렇게 봐도 바로 봐도 뒤집어 봐도, 평범한 인물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주인공 이서정은 겉보기에만 평범한 여성일 뿐, 실은 상당히 튀는 캐릭터이다. 이 일 못해먹겠다고 자신의 상사에게 세번이나 사표를 던지지를 않나, 대놓고 대들지를 않나, 게다가 패션업계에서 일하면서 패션에 목 매는 사람들은 비난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성형으로 비슷해진 얼굴, 각종 다이어트로 유사해진 체형, 비슷한 직장을 원하는 비슷한 유형의 천편일률적인 사람들… 하나같이 루이비통의 '스피디백'을 든 여자들이 출몰하는 공항이나 명동거리를 걷고 있으면 가끔 섬뜩한 공포감까지 밀려왔다. (69p)
이외에도 패션계 사람들의 속은 공갈빵 같다고 하지를 않나, 자신이 일하는 곳은 '외면'이야말로 '내면'을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신봉하는 곳이라고 하는 등 같은 패션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나 패션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비뚜름한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하지만, 재미있게도 이서정 역시 그런 사람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원래 내 눈의 티끌이 남의 눈에는 대들보처럼 보인다고 하지만...
이서정은 44사이즈로 변하는 마법이 있다면 파우스트 박사처럼 영혼이라도 팔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에디 슬리먼의 스키니 진을 입기 위해 다이어트 약을 복용하기도 하고, 남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친구의 옷을 훔쳐 입기도 하고, 때로는 얄미운 동료를 골탕먹이기 위해 슬며시 뜬소문을 퍼뜨리기도 한다. 또한 프라다 백을 가지고 싶으면서도 아프리카의 기아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후원금을 보내고 싶어 하는 면도 있다. 이런 상반된 욕망은 우리 인간 대부분이 가진 욕망이다. 그러하기에 더욱 공감이 되는 것이다. 또한 그녀는 사랑과 성에 있어서도 개방적이고 자유롭다. 특히 스타일리스트 민준과 키스를 하면서 오늘 입은 속옷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을 보면 이서정은 욕망에 충실한 요즘 여성답다는 생각도 든다. 정말 스타일은 이서정이란 여자 주인공에 대해 이야기하라고 해도 할 말이 많은 소설이다. 그만큼 캐릭터가 통통 튀고 재미있다.
그녀의 짝이 될 남자인 박우진은 7년전 맞선 자리에서 그녀를 퇴짜 놓은 남자이다. 선자리에서 5분만에 사라진 남자가 7년 만에 그녀 앞에 나타났다? 어떻게 보면 무척이나 작위적인 설정이지만, 연애 소설은 모름지기 이런 작위적인 요소가 있어야 재미가 있는 것이다. 하여간 그때는 의사였지만 지금은 근사한 레스토랑의 오너가 되어 나타난 남자. 그게 바로 박우진이다. 물론 이 두사람 사이가 처음부터 다정할 수는 없다. 서로에 대한 오해와 불신, 그러면서도 끌리는 이 마음을 어쩌랴? 하지만 이런 설정보다 더 작위적인 설정은 따로 있었으니... 두사람은 어린 시절 이미 만났던 사이이고, 둘 다 지금껏 치유되지 못한 큰 트라우마를 안고 산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두 사람 사이에 오해를 만든 불씨였으니, 오해가 풀리고 두 사람이 사랑을 하면서 이런 트라우마도 서서히 치유가 된다는 건 당연한 설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뻔한 설정과 스토리 전개에 특유의 뻔뻔함과 솔직함을 덧입혀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타일은 다양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소설이다. 패선업계 특히 패션지 기자의 삶과 일, 사랑 그리고 욕망을 솔직담백하게, 때로는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특히 자신의 상반된 욕망 사이에서 흔들리는 이서정의 모습은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이야기라 생각한다. 아주 가벼우면서도 쫀득쫀득한 작가만의 문장은 읽으면서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리게도 만들고, 거침없는 이서정의 말투와 행동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어지기도 한다.
인간의 본성 중에는 욕망 추구란 것이 반드시 들어간다. 그것이 삶의 원동력이 되고, 삶의 질을 높여주는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욕망이란 것은 어떻게 추구하느냐에 따라 추접한 욕망이 되기도 하고, 엣지있는 욕망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스타일대로 엣지있게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며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