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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고양이 -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 단편집
니키 에쓰코 외 지음, 정태원 옮김 / 태동출판사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 단편집이라.. 참새가 방앗간 그냥 지나칠 수 없듯 추리소설, 특히 일본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내가 그냥 지나칠 수 없겠지. 물론 이제서야 이 책의 존재를 알고 읽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안읽는 것보단 늦게라도 읽게 되어 참 뿌듯했달까. 책을 배송받았을 때 일단은 그 두께에 좀 놀랐다. 물론 1,000페이지가 넘어 가는 분량까지는 아니지만 660페이지는 사뿐히 넘어가기 때문에 흐뭇했다. 난 추리 소설이라면 장편이든 단편이든 중편이든 가리지 않지만, 단편소설을 꽤 좋아하는 편이다. 짧은이야기가 완결성을 갖기 위해서는 작가의 능력이 어느 정도 뒷받침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즉, 단편을 잘 쓰는 작가는 장편도 잘 쓰기 때문에 믿을만 하달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종종 있긴 하지만.)
이 소설집에는 14명의 작가가 쓴 16편의 단편 추리소설이 실려 있다. 책제목에도 나와 있듯이 모두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한 작품들이다. 물론 상을 받았다고 해서 무조건 그 재미가 보장되는 건 아니지만 일단은 그래도 좀 믿을 만하달까.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대부분의 작품이 꽤나 재미있었다.
여기에 실린 작품들은 조금 옛날 추리 소설이라 그런지 요즘처럼 기가 막히는 트릭이나 사이코패스같은 범인이 등장하는 작품보다는 사람의 심리 묘사가 뛰어난 작품이나 인간적인 면이 돋보이는 범인, 그리고 당시 시대 상황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기기타카 타로의 초승달은 나이 차이가 많은 부부사이에 벌어진 미스터리를 그리고 있는데, 묘한 상황을 이용해 범행을 저지르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누가 봐도 사고처럼 보일 수 밖에 없는 범행이랄까. 하지만 그 이면에 감춰진 남편의 마음이 조금 아프게 다가왔다. 가야마 시게루의 해만장기담은 제목에도 기담이란 단어가 들어가 있듯이 추리소설보다는 기담에 가까운 이야기인데, 그래서 오히려 더 매력적이었다. 가족간의 사랑과 증오가 만들어낸 비극을 담고 있었달까. 눈 속의 악마는 결국 사랑이란 것이 가져온 비극을 그리고 있는데, 이 작품의 트릭이란 것이 참 흥미로웠다. 그 목격자는 정말 범행현장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 맞을까, 하는 의심도 가질 만한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야마다 후타로의 허상음락은 독을 마시고 실려온 한 여자와 음독자살한 남편, 그리고 그 여자의 시동생 사이의 이야기, 그리고 병원 의사와 그 여자의 이야기가 교묘하게 맞물려 있는 이야기로 인간의 욕망이란 것과 관련된 이야기였고, 린치는 야쿠자들의 쫓고 쫓기는 이야기를 아주 재미있게 풀어 놓은 단편이다. 매국노는 이 작품집에 수록된 작품중 가장 긴 단편으로 전쟁을 배경으로 한 스파이 추리물이다.
히가게 죠키치의 여우의 닭은 전쟁에서 살아온 자의 트라우마, 그리고 장남과 차남의 차별이란 당시 일본의 상황을 담고 있는 작품으로 결말부가 꽤나 안타까웠던 작품. 쓰노다 기쿠오의 피리를 불면 사람이 죽는다는 왠지 요코미죠 세이시의 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는 작품이 떠오르는 제목을 가지고 있지만 내용은 좀 다르다. 작품속에 등장하는 피리가 가진 의미가 무척 흥미로웠던 작품. 도이타 아스지의 그린 차의 아이는 첨엔 제목을 보고 이게 뭔가 싶었는데, 열차 차량이 녹색이라 그린 색이란다. 어쨌거나 이 작품은 이 단편집 중 가장 가벼운 미스터리를 담고 있으며 가부키 배우를 주인공으로 한다는 게 특징이다.
이시자와 에이타로의 시선은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말을 떠올리게 한 작품으로 인간의 마음속 어둠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보여준 작품이다. 또한 여성의 변심이란 소재가 꽤나 씁쓸하게 다가왔던 작품이기도 하다. 아토다 다카시의 손님은 유한계급과 무한계급의 대비가 무척이나 흥미로운 작품으로 유한계급을 대변하는 여성이 무한계급을 대변하는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무척이나 흥미롭고,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했다. 니키 에츠코의 빨간 고양이는 안락의자 탐정이 등장한다. 우리에게 <고양이는 알고 있다>란 작품으로 잘 알려진 니키 에츠코의 단편을 이렇게 만나게 되어 무척이나 반가웠다. 오래전 어머니의 죽음의 진상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비밀. 때로는 사소한 것이 비극을 초래할 수도 있달까.
렌조 미키히코의 돌아오는 강의 정사는 시인 친구의 죽음에 관한 미스터리를 푸는 작품인데, 처음엔 좀 지겨운 듯한 생각이 들었지만 읽어가면서 푹 빠져들었던 작품이었다. 이미 떠나버린 사랑을 되돌리고 싶은 남자의 욕망은 아무 죄 없는 여인 두 명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결국 시인 자신도. 구사카 케이스케의 작품 두 편은 모두 어린아이가 등장한다. 아이는 순수해서 때로는 자신도 모르게 잔혹한 일을 저지르기도 한다, 랄까.
대략 정리해 봐도 참 다양한 인간 관계와 소재, 다양한 범행이 등장한다. 그중에는 정말 용서하고 싶지 않은 범인도 있고, 죄를 지었으나 눈감아 주고 싶은 그런 범인도 등장한다. 사랑이란 아름다운 감정이 초래하는 비극, 세상에서 가장 가까워야 할 관계인 가족간에 일어나는 비극에 관한 이야기는 읽으면서도 무척 안타까웠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니 문장이 좀 매끄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씌어진 소설이 아니라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면이 작품의 몰입도를 좀 떨어뜨렸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우리나라에 소개되지 않은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