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
헤르타 뮐러 지음, 김인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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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타 뮐러의 책은 저지대로 시작했다. 분량은 얼마되지 않지만 내용이 무거워서인지 아니면 시적인 표현이 많아 이게 과연 무얼 뜻하는지 곰곰히 생각하느라 그랬는지 평소 책을 읽는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들여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루마니아의 독일계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씌어진 그 책은 아름다운 문장과 시적인 흐름속에 참담한 현실을 풀어 놓았었다.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 역시 느릿느릿 읽었다. 한 번을 읽고, 또 한 번을 읽고. 헤르타 뮐러만의 시적인 표현에 마음을 맡기고 빈디시 가족과 그외 소수 독일인들의 삶의 흔적을 따라갔다. 빈디시는 루마니아에 살고 있는 독일 사람이다.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빈디시는 마찬가지로 포로 수용소에서 살아 남아 돌아온 카타리나와 결혼을 했고, 둘 사이에는 딸 아말리아가 있다.

카타리나는 빈디시처럼 죽음을 보았다. 카타리나는 빈디시처럼 살아 돌아왔다. 빈디시는 자신의 삶을 얼른 카타리나에게 붙들어 매었다. (67p)

빈디시는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실감했다.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마을에서, 장롱 안에서 그 바지가 자신을 기다렸다는 것을. 고향마을이 있고, 앞으로도 오래오래 있으리라는 것을 전쟁터와 포로 수용소에서는 미처 몰랐었다. (68p)

그들은 루마니아의 현실을 견디지 못해 독일로 망명하려고 하나 그 자격을 갖추기가 힘들다. 이장에게 밀가루 포대와 돈을 가져다 바친지 벌써 2년. 그러나 여전히 이장은 기다리란 말 뿐이다. 도대체 언제쯤이 되어서야 루마니아를 떠나 독일로 돌아갈 수 있는 걸까. 빈디시의 주변 사람들인 목수가족과 모피가공사의 가족도 여권을 얻었는데, 왜 빈디시의 가족은 여권을 받지 못한 것일까.

목수의 아내는 세례증때문에 신부에게 한 번, 여권때문에 경찰에게 한 번 불려갈 것이다.
신부가 제의실에 철제침대를 갖다놓았다고 야간경비원은 이야기했다. 신부는 그 침대에서 여자들과 함께 세례증서를 찾는다. "일이 순조롭게 풀리면, 다섯 번 만에 찾아낸다네." 야간 경비원은 말했다. "하지만 신부가 일을 아주 철저하게 하려 들면, 열 번이 될 수도 있어. 경찰이 신청서나 인지를 무려 일곱 번 잃어버리거나, 어디 뒀는지 기억 못 하는 경우도 많아. 그러면 경찰은 이주를 신청한 여자들과 우체국 창고의 매트리스 위에서 그걸 찾는대."
(79p)

문제는 바로 이것이었다. 빈디시의 가족은 딸을 신부와 경찰에게 보내야만 여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열망, 독재자가 권력을 잡아 소수의 독일인들이 더욱 탄압을 받게 된 상황하에서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갈망, 이것들이 합쳐져 결국 딸을 목사와 경찰에게 보내게 된다.

자신의 딸이 그지경이 되다 보니 빈디시는 아내에게 자꾸만 트집을 잡는다. 러시아에서 몸을 팔았다느니 하면서... 전쟁터에서 포로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왔던 것에만 감사해하던 마음은 어디로 가고 지금은 그렇게 살아 남은 것이 비난이 되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그들이 생존을 위해 자유를 찾아 독일로 가면 처음에는 아말리아의 희생에 감사하겠지만, 나중에는 또다시 자신의 아내의 정절을 탓한 것처럼 빈디시는 자신의 딸 아말리아의 정절을 탓하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된다면 그가 그토록 소원하던 생존과 자유가 주는 행복은 더이상 의미없는 것이 되지 않을까.

그들에게 있어 생존은 인간의 존엄성을 앞서는 것이었다. 수많은 뇌물을 갖다 바치고, 자신의 아내나 딸을 바치고.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살아 남고 싶었다. 감히 독재정권에는 저항할 수도, 그런 생각을 가질 수도 없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 상황에서 도망치는 것 뿐.
인간은 가장 두려웠던 순간이 지나면, 다시 본성이 드러난다. 살아 남은 것만에도 감사했던 것을 잊는다. 사냥꾼의 총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되는 순간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꿩처럼, 인간도 결국은 그런 존재일런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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