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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림 - Travel Notes, 개정판
이병률 지음 / 달 / 2010년 7월
평점 :
끌림.
끌리다.
이 단어가 주는 느낌에 기분이 좋아진다. 끌린다는 것은 눈길이 간다는 것이고, 귀를 쫑긋하게 된다는 것이고, 마음이 향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랑이란 것과는 좀 다르다. 사랑을 하면 욕심이 생겨나니까. 물론 끌림은 끌린다는 것 그자체로 끝날 수도 있지만, 일단 마음이 긍정적으로 향한다는 뜻이니 그래서 좋다. 그렇다면 작가는 무엇에 끌리게 되었을까.
본문은 이야기 몇 이라는 소제목이 예순일곱개나 된다. 때로는 수필같기도 하고, 때로는 시같기도 하고 때로는 일기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이 글들은 무작위로 구성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준다. 차례도 없고, 이야기들의 일관성도 없다. 마치 계획없이 훌쩍 떠나는 여행처럼, 무심코 떠오른 생각을 끼적이는 것처럼 씌어져 있다고 할까. 그래서 오히려 여행이 주는 자유로움을 더욱더 많이 느낄 수 있다. 일정대로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다니는 여행에 관한 내용이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차례대로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될지도 모르지만, 이런 구성이다 보니 어디를 펴서 읽든 읽는 사람마음대로 할 수 있달까. 물론 나도 처음 읽는 것이니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었지만, 나중에 문득 이 책을 읽고 싶어지면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고 싶다.
여기에 나오는 이야기중에 인상적인 만남이라 떠올려지는 이야기가 몇 편 있다. 첫번째는 멕시코 이발사(이야기 셋)이다. 지금은 우리 주변에서 거의 사라진 이발관과 이발사. 있다 해도 퇴폐업소 이미지지만, 멕시코에서 만난 이발사 할아버지의 프로 정신에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물론 나야 여자라서 미용실에 다니고, 이발소에 갈 일은 없겠지만, 그런 분이 있음으로 해서 행복한 기분으로 이발을 하고 면도를 하는 남자들이 있겠지. 두번째로는 푸에르토리코에서 온 페르난도(이야기 열일곱)라는 요리사 이야기이다. 엄마에게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꼈던 열등감이 비뚤어진 아이로 성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엄마를 더욱 사랑하는 사람으로 성장시키고, 그것이 훌륭한 요리사를 만들어 냈다는 이야기. 이게 바로 긍정의 힘이 아닐까.
세번째로는 파리를 여행하는 청년(이야기 스물둘)의 이야기이다. 파리 토박이면서 파리를 여행한다. 기발한 착상이란 생각이 든다. 하긴 우리는 여행이란 것에 대해 어디 멀리 가는 것만이 여행이란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으니까. 내가 살고 있는 곳을 잘 안다는 것, 그리고 그곳을 여행한다는 것, 그것은 삶은 곧 여행이란 말과 통하는 게 아닐까. 네번째로는 캐나다인 로버트(이야기 예순하나)의 이야기이다. 작가와 캐나다인 로버트는 서로 조국이 아닌 외국에서 몇 번이나 우연한 만남을 거듭했다. 이정도면 정말 대단한 인연이 아닌가 싶다.
여행은, 120점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곳'을 찾아내는 일이며
언젠가 그곳을 꼭 한 번만이라도 다시 밟을 수 있으리란 기대를 키우는 일이며
만에 하나, 그렇게 되지 못한다 해도 그때 그 기억만으로 눈이 매워지는 일이다.
- 이야기 쉰넷. 그때 내가 본 것을 생각하면 나는 눈이 맵다 中
이외에도 베니스에서 '다음 사람을 위한 선물'에 관한 에피소드와 눈 먼 여자와 말 못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이야기, 포도나무를 선물한 남자의 이야기등은 무척이나 인상적인 이야기로 기억에 남는다. 다음 사람을 위한 선물에 관한 이야기를 읽을 때는 가슴이 뭉클해졌고, 포도나무 선물에 관한 이야기는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눈 먼 여자와 말 못하는 남자의 이야기는 비장애인들인 우리를 돌아 보게 만드는 계기를 만들었다. 서로의 장애때문에 말이 통하지는 않는 두 사람. 여자는 '우리는 참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군요' 라고 말하지만, 어떻게 보면 똑같은 말을 쓰는 우리 비장애인들 사이에서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더 행복하지 않은 게 아닐까 싶다. 말이 통한다는 것은 같은 언어를 쓴다는 뜻이 아니라 마음까지 통하는 것이니까.
이렇듯 여행을 하면서 겪은 일이나 만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도 있지만, 작가가 느끼는 감정들도 이 책 속에 담겨 있다. 단순히 여행이란 것에서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인생을 살면서 작가가 느끼는 감정이랄까. 문득 작가는 외로운 사람이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스스로 외롭다고 여기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 책 한 권으로 작가가 어떤 사람이란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겠지만 그저 책에서 느껴지는 것만으로 생각해 본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감수성도 풍부하고 사람도 좋아하고, 사랑이란 감정도 잘 느낄 타입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외로워 보인다. 그 외로움을 떨치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떠나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기갈 들린 사람처럼 천박해 보여도 좋다. 떠나서만큼은 닥치는 일들을 받아내기 위해 조금 무모해져도 좋다. 세상은 눈을 맞추기만 해도 눈 속으로 번져들 설렘과 환상으로 가득 차 있으니까. - 이야기 쉰. 환상의 바다에 몸을 담그고 中
이 책은 여행 에세이라고 분류가 되어 있지만 여느 여행 에세이와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보통 여행 에세이라고 하면 여행 장소, 가는 방법, 관광, 음식 등에 관한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게 마련이다. 그 책을 쓴 작가가 그곳에서 무엇을 했는지 자세하게 나와 있어 누군가의 사생활을 들여다 본 것처럼 기분이 좀 묘해질 때도 있다. 그리고 글보다는 사진이 더 많은 책도 많다. 마치 난 이런 걸 보고 왔네, 라고 자랑하는 것처럼. 그런 것을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저 사람은 여행을 가서 뷰파인더 속의 풍경만 봤겠구나, 하는... 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시야가 좁은 뷰파인더로만 그곳을 느끼고 왔구나, 하는... 또한 그런 사진들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사진이기도 해서 좀 지겹기도 하다.
하지만 이 책은 여행을 하면서 느끼는 작가의 감정이랄까 느낌이 중심이 되어 서술되어 있다.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에 관한 이야기, 그곳을 여행하면서 느낀 점들, 그리고 인생에 대한 고민, 사람에 대한 고민 등도 담겨 있었다. 그래서 사진들도 색다르다. 관광지 위주의 겉모습에만 치중한 화려한 모습이 아니라, 그곳에서 숨쉬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사진만을 보면 이 사진을 어디에서 찍었는지 알 방법도 없고, 어디쯤 위치한 곳인지 알 방법도 없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좋다. 사진 밑에 조그마한 글씨로 설명이 달려 있는 경우 그것에 신경쓰다 보면 전체적 흐름이 깨지기 때문이다. 물론 사진에 관한 짧은 덧붙임은 책 뒤에 고스란히 담겨 있으니 책을 다 읽고 나서 보는 것이 좋을 거라 생각된다.
우리는 여행을 자주 다니는 사람을 부러워하는 경향이 있다. 그만큼 여행이란 일상과 거리가 있는 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은 곧 여행이라 했던가. 작가처럼 먼 곳으로 떠나는 것도 여행이고, 파리 토박이가 파리 곳곳을 누비는 것도 여행이다. 여행은 일상에서의 탈출도, 도피도 아니다. 그저 삶의 한 부분이자 전체이니까. 그러하기에 이 책의 마지막장에 이르면 이제껏 작가의 여행담을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작가의 인생을, 삶을 들여다 본 느낌이 드는 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