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의 여름
미쓰하라 유리 지음, 이수미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열여덟의 여름.
제목만 봐서는 청춘소설이나 성장소설처럼 느껴진다. 표지도 나른한 여름 오후의 풍경을 담은 듯 해서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하지만, 책 뒷표지를 보면 생각이 좀 달라진다. 총 4편의 단편을 소개한 글에서는 뭔가 알 수 없는 것이 숨겨져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미쓰하라 유리. 워낙 적은 작품을 펴내는 작가인데다가 우리나라에서 소개된 책도 이 한 권뿐이라 나도 이제서야 접한 작가이다. 하지만 이 한 작품이 이렇게 깊은 인상을 남길 줄은 이 책을 선택하면서도 전혀 생각지 못했다.

이 책은 총 네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표제작인 <열여덟의 여름>은 열여덟살의 소년 신야가 강변에서 만난 수수께끼의 여성 구미코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이 둘의 만남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신야와 구미코조차도. 첫부분을 읽었을 때는 첫사랑을 하게 되는 소년의 이야기인가 싶었다. 왠지 분위기가 그랬기 때문이기도 하고, 제목자체도 뭔가 푸릇푸릇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그리워서, 그리운 만큼 너무나도 미웠기 때문에, 누군가를 죽여야지만 이 마음이 가라앉으리라 생각했어. 그런데 누구를 죽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어. 내가 가장 증오하는 그 사람을 죽일까, 그 사람을 독차지하고 있는 부인을 죽일까, 아니면 그 사람이 매일같이 돌아가는 행복한 가정인가 뭔가 하는 곳의 중심이 되는 아들을 죽이면 좋을까. 이 나팔꽃 화분은 바로 그걸 결정하기 위한 거야. '어느 쪽으로 할까요'하고 비슷한 거지. 가장 먼저 꽃을 피운 화분이 타깃이 되는 러시안 룰렛." (61p)

하지만, 읽으면서 점점 묘한 위화감을 느끼게 되고, 구미코가 '아빠', '엄마', '그', 그리고 '그녀'라는 이름을 붙인 나팔꽃 화분 네 개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서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그런 반면, 안타까움과 애틋함도 함께 느끼게 되었달까. 상대에게 완전한 자신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것이 신야와 구미코가 만나면서 선택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이 미스터리의 절정이다. 신야의 사랑과 구미코의 사랑, 그리고 두 사람의 접점이 무엇인지 밝혀지면서 클라이막스를 맞게 되는 이 단편은 미쓰하라 유리란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내게 예상치 못한 충격과 안타까움을 안겨주었다.

<자그마한 기적>은 아내와 사별한 남자 미즈시마와 그의 아들 다로의 이야기이다. 5년전 세상을 떠난 아내, 그리고 남겨진 건 아직 어린 아들 뿐. 아내를 사랑했던만큼 재혼은 생각지도 않았던 미즈미마는 아들의 육아를 위해 장인장모가 있는 오사카로 이사를 한다. 그곳에서 만난 서점 주인 아스카와 미즈시마 부자의 이야기는 '누군가'를 잃어 상실의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또다른 만남을 가지면서 치유되고 재생되어 가는 이야기이다. 누군가를 잃었다는 기억은 큰 상처와 아픔을 남긴다. 그래서 새로운 출발에 대해 주저할 수 밖에 없다. 아들의 성장담, 그리고 아내와 결혼할 남자을 잃은 남녀의 만남과 새로운 한걸음에 관한 이 이야기는 너무나도 따스해서 참 기분이 좋았달까. 또한 단편답지 않게 꽤 많은 등장인물이 나오는데, 그중 미즈시마가 근무하는 서점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 레미의 이야기 역시 짧지만 무언가 가슴을 따스하게 채워주는 느낌을 받았다.

세번째 작품인 <형의 순정>은 이 작품집 중에 가장 짧고, 가장 유쾌하다. 반백수나 다름없는 허우대만 멀쩡한 연극배우 형과 그런 형을 보면서 자라서 속이 여물대로 여문 동생, 그리고 형이 사랑하게된 한 여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단편은 유쾌하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일이란 것에 대한 진지한 생각이랄까. 그리고 가벼운 미스터리도 첨가되어 있어 더욱더 즐거웠다.
 
마지막 작품인 <이노센트 데이즈>는 가장 음울하고 어두웠지만, 반대로 너무나도 안타까웠던 작품이기도 하다. <열여덟의 여름>과 비슷한 느낌을 주지만 더 어둡고 더 애틋하며 안타까웠달까. 지금은 성인이 된, 학원의 제자가 가진 과거의 비밀이 하나둘 드러나면서 그 음울함과 어둠은 더 깊어진다. 사람들이 상상하던 것, 마음대로 추측하던 사실 이면에 숨겨져 있던 그 사건의 진실은 수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그 상처를 드러내고야 말았다. 

재혼한 부모들이 가진 비밀을 알게 된 다카시와 후미카. 부모를 증오할 수 밖에 없었던 아이들의 상처받은 마음은 결국 치유되지 못했다. 피가 섞이지 않은 남매이고, 서로를 사랑했지만, 그것은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후미카가 다카시에게 가까이 가도 다카시는 후미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도대체 무엇이 다카시의 마음을 막고 있었던 것일까. 그러나 그후 다카시는 죽음을 맞았고, 후미카는 20살의 밝고 맑음과는 동떨어진 악의만을 남긴 존재가 되어 버렸다. 왜 부모가 저지른 일때문에 그 아이들이 고통받아야 할까. 죄마저도 물려받는 것일까. 담담하게 고백해오는 후미카의 이야기를 들으면 두렵고 오싹하기보다는 너무나도 안타까워서 꼬옥 안아주고 싶었다. 아이를 외면하는 어른, 그리고 그것이 가져온 현재는 생각보다 너무나도 참혹했다.  

총 네편의 작품이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단편들이 연결되는 것은 꽃이란 모티브. <열여덟의 여름>은 나팔꽃, <자그마한 기적>은 금목서, <형의 순정>은 헬리오트로프, 그리고 <이노센트 데이즈>는 협죽도란 꽃이 등장한다. 꽃이 가진 비밀이랄까. 각각의 꽃이 상징하는 바가 다 다르다. 이런 것은 아주 사소한 것처럼 보여도 꽤 큰 역할을 담당한다. 그래서 더욱더 흥미로운 미스터리가 되는 것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지만, 미쓰하라 유리라는 작가에 대해 커다란 흥미와 관심을 갖게 만든 작품,『열여덟의 여름』은 우리가 가장 가깝다고 느끼는 가족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가족에게는 오히려 우리가 몰랐던 모습이 더 많지 않나 하고 느끼게 만든 작품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밖에서 보는 가족과 안에서 그 구성원들이 직접 겪는 가족의 모습이 다르다는 것도, 내심 알고는 있지만, 거듭 충격으로 다가온 작품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의 매력은 각각의 단편이 내놓은 결말부에 있다. 일그러지고 생채기 났던 삶이 다시금 회복되어감을 암시하고 있기때문이다. 서늘한 미스터리 뒤에 남겨진 따스한 결말이랄까. 이런 점이 정말 매력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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