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집보다 여행 - 어느 여행자의 기발한 이야기
왕영호 지음 / 21세기북스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여행이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라는 막연한 물음을 내게 던진다면, 난 아마도 단순한 대답을 할 것이다. 휴식과 재충전, 일상에서의 도피 및 탈출 그리고 나의 로망이라고. 평범한 다른 사람의 대답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 여행이란 것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시간을 내야하고, 돈을 들여야 하니, 시간과 돈에 있어서 어느 정도 여유가 가능한 것이기에 그 때를 맞추기도 힘들다. 일할 때는 시간을 내기 힘들고, 백수가 되니 시간은 많은데 돈이 없다. 그래서 여행은 나에게 일종의 로망이다. 그것이 국내 여행이든 해외 여행이든 간에 말이다.
『집보다 여행』이란 제목을 보면서 솔직히 좀 당황스러웠다. 집을 포기하고 여행을 떠난다는 의미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생각이 책의 내용과 완전히 반하는 내용은 아니다. 즉, 이런 의미도 내포하고 있지만, 그보다 훨씬 큰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또한 보통의 여행서와는 달리 작가가 어디어디를 여행했고, 그곳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게 무엇인가가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여행 그 자체와 좀더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여행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책은 총 네 파트로 이루어져 있다. 일단 목차를 주욱 훑어보던 난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첫번째 파트인 「함께 여행할래요?」에 나오는 글의 제목에 로봇, 드라큘라, 마녀 재판이란 단어가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여행이랑 로봇, 드라큘라, 마녀 재판이 무슨 상관이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난 책을 읽어가면서 왜 이런 제목이 붙었는지에 대해 서서히 납득하기 시작했다.「함께 여행할래요?」에 나오는 글들은 유언장이나 인터뷰, 재판, 강연 등 흥미로운 형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여행과 모험 가치, 여행의 힘, 잘못된 여행의 사례등을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이렇게 하니 조금은 더 딱딱해질 수도 내용이 말랑말랑하게 만들어져, 작가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달까?
두번째 파트인「배워야 할 것은 여행에서 다 배웠다」는 여행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가 흔히 떠나는 여행에서 잊고 간과하기 쉬운 것은 어떤 것인지, 진정한 여행이란 어떤 것인지, 그리고 여행으로 우리가 배우는 것들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여타의 여행서에서도 이런 부분을 조금은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외려 여행지의 모습과 그곳에서 먹고, 자고, 구경하고, 느낀 것이 위주가 된 책이 많았다. 하지만 이 책은 좀더 깊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여행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여행자로 하여금 이런 불확실성에 직면하게 만듦으로써 그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게 하고 좀 더 자신있게 상황을 컨트롤하는 능력을 길러주는 데 있다. 그리고 나아가 그런 능력을 일상에도 적용하도록 하는 데 있다. 즉 생존 본능을 강화하는 것이다. 여행자는 여행을 통해 불확실성을 컨트롤하는 방법을 배우고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처한다. 이것이 우리가 여행에 그토록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근본적 이유다. (113p)
세번째 파트인「여행 철학자의 탄생」은 '철학'이란 단어가 들어가 있어서 조금은 걱정이 되었지만, 읽어 보니 의외로 차분한 설명에 좀더 이해하기 쉬웠달까. 특히나 나는 시간 여행자라는 소제목을 달고 있는 글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았다. 시간 여행. 이것은 타임 머신같은 것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의 아픈 과거와 정면으로 마주함으로써 이제껏 굴절시키고 왜곡시켜 피하려 했던 과거의 자신과 만나는 여행이 바로 시간 여행이다. 힘든 과거란 무턱대고 덮어 놓는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덜 아문 상처를 후벼파고 다시금 더 큰 상처를 만들 수도 있다. 그런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여행이 바로 시간 여행이랄까. 나 역시 아픈 과거는 덮어놓고 잊자는 주의였지만, 사실 언제 그게 튀어나올지 몰라 두렵기도 했다. 물론 자신의 아픈 과거와 마주하는 것이 힘에 부칠테지만, 한 번 도전해 봐, 라고 하는 응원을 받은 느낌이었달까.
그리고 흥미로운 것 또하나는 여행과 정착, 모험과 안정을 동떨어진 존재로 인식하지 않는 저자의 태도이다. 우리는 흔히 이것들을 상대적인 개념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모든 것은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다. 만약 모험과 안정 중 하나만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별다른 가치를 가질수 없을지도 모른다.
모험과 안정은 따로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원 안에서 함께 있으면서 전체를 이룬다. 그래서 제대로 된 모험은 안정을 부르고, 제대로 된 안정은 우리를 모험으로 이끈다. (221p)
네번째 파트인「모닥불 피워놓고 마주 앉아서」는 저자의 경험담을 비롯해 저자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보통의 여행기는 저자가 주인공이 되고, 저자를 중심으로 서술되지만,『집보다 여행』은 저자 자신을 숨기고 있단 느낌이었달까. 그러나 마지막 파트에 이르러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는 느낌이다. 자신과 아내가 결혼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여행, 그리고 친구를 떠나보내야만 했던 상황, 자신의 건강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과 저자 자신이 이루고 싶은 꿈에 대한 이야기를 가득 담고 있었다.
물욕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출한 후, 내가 선택한 다음 여행지는 내 몸과 정신의 세계다. 새로운 세상을 탐험하면서 나는 알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빠져들 가치가 있는 세계라는 것을. 진정한 의미의 행복을 추구하는 방향이라는 것을. (256p)
사실 우리에게 있어 여행이란 건, 일종의 사치를 부려 보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모 광고 카피에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고 나온 것처럼, 여행은 우리에게 일상을 떠나 맛볼 수 있는 낭만이란 생각을 더 많이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왕 한 번 하는 여행, 잘 먹고, 잘 놀다 오자, 라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된다. 좋은 호텔, 맛있는 레스토랑, 멋진 관광지... 물론 이게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갔다 온 여행은 크나큰 후유증을 남긴다. 꿈같은 여행과 비교해보면 현실은 너무나도 꿀꿀하기 때문이다. 돈을 펑펑 쓰고, 나 어디 갔다 왔네~~, 라고 자랑하는 여행은 결국 남는 게 없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 여행을 하면 사진을 찍고, 기록하고 하느라 정작 중요한 것은 많이 놓쳤다는 느낌이다.
여행이란 건 일종의 모험이다. 내가 가장 안정되는 공간인 집을 떠나 외부 세계 - 특히나 이제껏 접촉하지 못했던 - 와 만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선조는 여행을 해왔다. 그러다가 정착하게 되고, 그렇게 지금까지 살아 왔다. 여행이란 건 위험성을 동반한다. 어디에서 무엇을 만날지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불안함이 안정 추구란 것으로 나타났고, 그것이 집에 대한 소유욕과 다른 물질적인 면에 대한 소유욕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세상 곳곳에서는 일정한 주거지를 가지지 않고 여행을 하는 부족들이 있다. 그들의 짐은 너무나도 간결하다. 그리고 그들은 자연에 대해 경외심과 감사함을 가진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짐을 얼마나 무거운 짐을 어깨에 올려 놓고 사는지...
우리는 정착을 통해 안정이란 면을 얻었지만, 반대로 잃은 것이 너무나도 많다.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삶은 고인 물안의 삶이 아닐까.그러나 지금 당장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여행자처럼 살 수는 없다. 대신 여행자들의 지혜를 빌어 내 삶이란 것에 적용해 살아갈 수는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