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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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벌써 삼십대 중반에 들어선 내게 이 단어는 낯선 울림으로 다가온다. 나보다 연세가 많으신 4, 50대의 분들이라면, 그 나이는 아직 청춘이지, 라고 하실지도 모르겠으나, 지금의 내 나이는 일반적인 청춘의 의미를 가지는 나이를 넘어섰다는 건 확실하다. 게다가 이 책에 나오는 윤교수가 청춘은 서른셋까지라고 하는 표현을 봐도 난 이미 청춘이란 시기를 지나버린 사람이다.

이제는 추억으로 남겨져 달콤한 씁쓸함의 여운을 남기는 그 시절, 난 꿈을 꾸고 사랑을 했다. 지금 누군가 내게 그 시절로 돌려 보내줄까, 라는 말을 하면 귀가 솔깃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그 시절과 똑같은 시절이 아니라면, 이라는 전제가 붙는다. 때로는 절망하고 때로는 아파하고 때로는 좌절했던 그 시절과 똑같은 날들을 보낸다는 것은 사양이다. 지금이야 그땐 그랬지, 정도의 추억거리정도로 남아 있을지 몰라도 당시에는 죽도록 힘들었기 때문이리라.

신경숙 작가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이하 어.나.벨)은 정윤, 이명서, 윤미루, 단이라는 네 젊은이들의 청춘 시절 이야기를 담고 있다. 본문에서는 정확한 시기가 나오지 않지만, 대략 1980년대 중후반이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아닌가 싶다. 어수선한 시국을 살아가는 네 명의 이십대 남녀의 이야기는 잔혹한 성장통을 겪는 성장소설이며, 청춘소설이고, 연애소설이기도 하다.  

윤교수의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연락을 받게 된 정윤. 8년만에 걸려온 이명서의 전화는 정윤을 명서, 미루, 단과 함께 보낸 과거로 돌려보내게 된 계기가 되었다. 어머니의 암투병으로 인해 고교시절부터 사촌언니의 집에서 살게 된 정윤은 바깥 세상과 단절된 시간을 보내왔다. 대학에 들어가고 얼마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사망하게 되고, 정윤은 휴학계를 내고 시골집에서 아버지와 1년을 보낸 후 복학을 한다. 윤교수의 강의에서 만나게 된 명서와 미루는 차후 정윤에게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 인물이었다.
소설의 흐름으로 볼 때, 정윤과 이명서는 관찰자이며 동시에 기록자이다. 정윤과 이명서가 번갈아 가며 화자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정윤이 보던 그때 그 시절과 그때 그 사람들, 명서가 보던 그때 그 시절과 그때 그 사람들의 모습과 당시 그들의 상황을 서로 보충해주고 있으며, 정윤과 명서가 끝끝내 마주 하지 못했던 마음의 실마리를 품고 있다. 또한 정윤이 화자가 되는 글에서는 정윤과 단의 개인적인 관계가, 명서가 화자가 되는 글에서는 명서와 미루의 개인적 관계가 더욱 잘 드러나고 있다. 서로 소꿉친구였던만큼 다른 사람은 낄 생각도 못할 친밀함이 그들 안에 존재했기에...

어.나.벨에 나오는 시대의 시국은 무척이나 어지러웠다. 수시로 집회가 열려 공기중에는 늘 최루탄 가스 냄새가 맴돌아 상인들도 힘들었고, 학교는 학교대로 수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을 정도였다. 단의 경우 시위 현장에서 동기였던 전경을 만나게 되고, 정윤은 길을 걷다 시위 현장에 휩쓸려 다치기도 했다. 명서의 경우 직접 시위에 나서기도 했고, 미루의 경우... 미루의 경우, 제일 큰 아픔과 상처를 가지고 있었다. 사랑하는 언니를 잃은 것이다. 

어머니의 투병 생활을 지켜 보며 곁에 있지도 못했던 것이 정윤의 마음에 큰 구멍을 뚫어 놨고, 그후 정윤은 서울 생활에 지독히도 적응하지 못했다. 검정색 도화지로 창문을 꼭꼭 막아둔 것만 봐도 쉬이 짐작이 간다. 휴학후 1년간의 시골 생활을 접게 만든 건, 단과 보낸 하루때문이었다. 너를 사랑한다는 말이나 다름없는 단의 고백, 그러나 정윤에게 있어서 단은 가족같은 소꿉친구였을 뿐이다. 복학후 만난 명서와 미루. 소설속에서는 명서를 사랑한다는 말이 나오지는 않지만, 정윤의 마음을 되짚어 본다면 그걸 쉽게 알 수 있다. 명서 역시 정윤을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지만, 명서의 노트 속에서 그 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불안정한 시국 속에서 이들이 힘들고 아픈 시기만을 보낸 건 아니다. 성곽을 따라 걷던 길, 빈집에서의 며칠 등 이들에게는 행복하고 즐거운 순간도 분명히 존재했다. 하지만, 짊어진 짐이 너무 무거웠던 탓일까, 그들은 그 행복을 지켜낼 힘이 없었다. 미루의 언니에 대한 사연과 미루가 찾아다니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그 당시 시국이 얼마나 어지러웠고, 참혹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언니와 꼭 닮고 싶을 만큼 언니를 사랑했지만, 자신의 잘못으로 발레를 포기했고, 세상에 사랑마저 내줘야 했고, 결국 그렇게 스러지듯 저 세상으로 가 버린 언니는 미루의 마음에 큰 상처가 되었다. 몸에 남은 상처는 조금씩 지워질테지만, 마음에 남은 상처는 쉬이 치유되지 않았다. 그런 미루에게 정윤과의 만남은 치유의 빛을 보여준 것이었지만, 결국 미루는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 되고야 말았다. 단 역시 정윤을 사랑했지만, 정윤의 마음이 자기에게 없다는 걸 잘 알았다. 게다가 자신과 적이 되어 나타난 동기에 대한 충격은 그를 불면증 환자로 만들었고, 입대하게 만들었다. 다른 세상이 열릴 것이라 생각하고 자원 입대한 그곳은 또다른 지옥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마음 아팠던 건 역시 8. 작은 배 한 척이...란 부분이었다. 단에게 받은 편지와 보내지 못한 답장을 이제서야 쓰는 정윤의 모습, 그리고 단에게 일어난 일이 드러나면서 난 큰 충격에 휩싸였다. 미루의 경우에는 어느 정도의 짐작정도는 했지만, 단의 일은 짐작조차 하기 싫었던 일인데, 그렇게 찾아왔다. 단에 대한 정윤의 죄책감과 미안함이 편지란 것으로, 경복궁으로 향한 발걸음이란 것으로 드러난다. 그후 미루에게 일어난 일은 명서와 정윤 둘에게 모두 방관자였다는 죄책감과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마음을 갖게 만든다. 조금만 더 신경을 썼더라면 미루를 그렇게 보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마음. 그것은 둘의 마음을 저 깊은 곳으로 끌어 내려 묻어 버리고 감춰버렸다.

인간은 불완전해. 어떤 명언이나 교훈으로도 딱 떨어지지 않는 복작함 존재지. 그때 나는 뭘 했던가? 하는 자책이 일생 동안 따라다닐걸세. 그림자처럼 말이야. 사랑한 것일수록 더 그럴 거야.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절망할 줄 모르면 무슨 의미가 있겠나. 다만…… 그 절망에 자네들 영혼이 훼손되지 않기만을 바라네.  (341p)

하지만 윤교수의 말대로 그건 이 둘의 책임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것, 인간으로서는 닿을 수 없는 영역의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차안과 피안의 경계에서 살아가던 단과 미루는 그렇게 스러져갔다. 

내가 정윤, 명서, 미루, 단의 나이였을때도 역시나 불안정한 시국속에서 연일 시위가 일어났다. 그때의 쟁점이 된 것은 UR(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으로 쌀개방과 관련한 집회가 많았다. 당시의 국내 사건으로는 백화점 붕괴, 다리 붕괴, 가스 폭발 사건을 비롯해 페리호 침몰 사건, 항공기 추락 사건등 사건 사고도 끊이지 않았던 시기였으며, 또한 내가 다니던 학교는 재단의 비리로 인해 학교내에서도 수업거부, 시험 거부등 일련의 움직임이 있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어.나.벨의 주인공들이 살던 시대와 내가 살던 시대는 약 10년이란 세월의 차이가 나며, 똑같은 사건과 똑같은 쟁점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중심을 관통하는 문제들은 똑같지는 않더라도 비슷한 흐름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지금이라고 다를까. 그러하기에 작가가 굳이 시대적 배경을 언급하지 않은 것도, 특정 대명사를 언급하지 않은 것도 납득이 간다. 여전히 우리는 소용돌이의 한가운데 살고 있으며, 사랑에 웃고 울고, 어지러운 시국에 대해 고민하고, 절망하고, 대항하면서 산다. 언젠가 좋은 날이 찾아 오기를 기다리며, 언젠가의 일을 약속하면서 산다. 그러나 그 순간은 너무도 힘들고 절망적이라 삶에서 손을 놓고 싶어질 때도 있다. 영원히 그 시간이 지속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시간은 언제나 밀려오지만 똑같은 날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을 젊은 날에 인식하고 있었다면 뭔가 달라졌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랬다면 누군가는 작별하지 않고 누군가는 살아남았을지도.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되는 그 순간에 또다른 일이 시작되기도 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11p)

책을 읽는 내내 무거운 기분과 우울한 감정이 번갈아 가며 달려들듯 찾아왔다. 시대의 제물이 되어 스러진 영혼인 미루와 단의 이야기에도, 그들을 방관했다는 죄책감과 미안함에 서로에게 끝내 결을 허락하지 못했던 윤과 명서의 이야기에도 슬픔과 아픔의 감정이 번갈아 가며 찾아왔다. 하지만, 명서가 갈색 노트 뒷부분에 적어 놓은 '언.젠.가.언.젠.가.는.정.윤.과.함.께.늙.고.싶.다.' (370p)라는 글처럼 언젠가가 지금 이순간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은 마음이 누그러진다. 과거의 언젠가에 약속했던 것이 지금에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은 우리 인간이 현재를 살아내고, 미래를 살아가기 위한 희망이 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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