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이야 (양장)
전아리 지음, 안태영 그림 / 노블마인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이십대 후반이라... 그것도 1년만 있으면 서른줄에 접어드는 스물아홉이라면 이런저런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열아홉에서 스물로 넘어가는 시기는 불행끝 행복시작이란 느낌이지만, 스물아홉에서 서른이면 행복끝 불행시작이란 느낌까지 들게 된다. 고교생에서 대학생, 혹은 직장인이 된다는 것은 부모의 간섭을 벗어나 새로운 세상으로 한발짝 내딛는다는 기쁨과 앞으로의 생활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하게 되지만, 이십대에서 삼십대로 넘어가는 길목은 그리 마음이 편치가 않다. 결혼은 안할거냐는 주위의 시선, 몇 년동안 해온 직장 생활에서 느끼는 회의감 등 이래저래 마음이 무거운데, 나이까지 괴롭히니 그야말로 가슴에 커다란 바위가 놓인 기분일거다. 뭐, 나는 이미 삽심대 중반이니 스물 아홉의 동생들을 보면 '그래도 넌 아직 이십대잖냐.. 언니는 벌써 계란 한 판을 채우고, 아이스크림 종류의 갯수를 넘어 중년으로 가는 나이란다'라는 말을 해주고 싶은 충동이 불쑥불쑥 생겨나기도 한다.

시작부터 왜 스물아홉이란 나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을 늘어 놓았냐고? 왜냐하면 이 책의 주인공 정운은 올해 딱 스물아홉이기 때문이다. 정운은 계약직 사원에다가 회사에서는 존재감이 별로 없는 여성이다. 게다가 원래 말수도 적고, 튀는 걸 싫어 하다 보니 건조하고 재미없는 사람이란 딱지가 붙어있다.

이렇다 할 꿈도 목표도 없다. 남들처럼 일에 대한 욕심이나 야망이 있는 것도 아니다. 딱히 좋아하는 일이나 취미도 찾지 못했다. 자주 만나 허물없이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도 없다. 그리고 이제 유일하게 희망을 걸었던 사랑마저 끝이 났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기다리며 살고 있는 걸까. 이제껏 삶을 뒤집어엎을 만한 어떠한 모험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무언가를 잃을까 봐 두려워서, 라고 둘러대곤 했지만 스물아홉이 된 지금에 와서 두 손을 들여다 보니 딱히 잃어버릴 것도 없다. 생각해보면 모험의 부재가 문제였던 것 같기도 하다. 내 삶에는 열정의 증거가 없었다. (29P)

그런 그녀에게 어느날 변화의 바람이 불어 온다. 그건 바로 시리우스란 아이돌 그룹과의 만남에서 시작되었다. 아이돌 그룹을 쫓아다니는 여자아이를 보며 혀를 끌끌차던 정운이 아이돌 그룹의 팬이 되다니! 하지만 늦게 배운 도둑질에 밤 새는 줄 모른다고 정운은 그 아이돌 그룹의 한 멤버에 급속도로 빠져들어 간다. 우연히 만난 여고생과 암표 거래를 하고, 그들의 녹화장에 몰래 숨어 들어가는 등 아이돌의 광팬이 된 정운은 하루하루가 즐겁기만 하다. 늘상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여 찍소리 한 번 못했던 정운의 변화는 상큼하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런 정운을 보며 쓴소리도 한다. 사실 여고생도 아니고 과년한 처자가 아이돌 그룹을 쫓아다닌다는 건 - 그것도 띠동갑 정도의 - 주위에서 보기엔 정상으로는 안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아이돌 그룹에 맛을 들인 이상 그 맛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정운. 어쩌면 아이돌 그룹은 정운에게 있어 일탈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나도 누군가의 팬이었던 적이 있다. 초등학교때는 소방차를 좋아했고, 그후 20대 초반에는 H.O.T를 좋아했고, 20대 후반에는 비를 좋아했다. 동물병원에서 일할 때 같이 일하는 수의사 선생님에게 난 비를 좋아해요, 라고 말했더니, 그 선생님 왈 '샘은 비 이모뻘아니예요?'라는 말에 속으로 은근히 열받았다는. 확실하게 말해두지만 비와 나는 10살도 채 차이나지 않는다. (칫) 하지만 그때는 그저 마음속으로 좋아하고, 앨범만 사서 들었을 뿐이지 콘서트를 보러 간다거나 방송국에 간다거나 하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다.

그후 30대에 들어선 나. 결국 작년에는 일본 성우가 나오는 행사를 보러 가기도 했다. 직장 동료의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분당에서 인천 공항으로 날아가 공항 게이트에서 성우가 나오길 목빼고 기다렸다. 와우, 처음으로 그런 걸 해봤는데, 이거 은근 짜릿하고 좋았고, 다음날 성우 공연 2부를 모두 관람하면서 소리 지르고, 손 흔들고 난리를 쳤다.

정운을 보면서 작년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돌 스타에 푹 빠져버린 정운의 마음이 너무나도 마음에 잘 와닿았다고 할까? 빡빡한 일상에 치여 시름시름 반건어물녀가 되어갈 때 정운에게 구원의 빛을 보여준게 바로 아이돌 그룹 시리우스였다. 일상에서는 맛보지 못할 즐거움과 일탈의 기분을 그들과 함께 하면서 느끼는 정운을 보면서, 정운씨 힘내!!라고 응원해 주고 싶었다.

정운은 아이돌 그룹을 쫓아다니다가 두 사람의 남자와 만나게 된다. 한명은 정운에게 가짜 암표를 팔았지만, 아이돌 스타의 팬의 세계에 좀더 가까이 할 수있도록 만든 주희란 아이의 사촌 오빠인 우연. 우연은 다정다감하며 배려심이 깊은 스위트한 타입의 남자이고, 한 사람은 '얌전히 살고자 하는 사람의 전투 본능을 끌어낸다 (125P)'는 소리를 듣는 안하무인에 까칠한 성격이 돋보이는 방송국 PD 형민이다.

우연과의 만남은 편안하고 따스하지만 끌림이란 게 없고, 형민과의 만남은 불편하고 눈만 마주치면 싸움이지만 끌림이란 게 존재한다. 우연과의 키스는 달콤하고 따스하지만, 형민과의 키스는 짜릿하고 뜨겁다. 이 정도만 봐도 정운이 누구에게 끌리고 있는지 확실하지만, 정운은 두 사람 누구에게도 쉽사리 다가서지 못한다. 아마도 이들을 만나기전 사귀던 동주가 유부남이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일도 있었고, 또 곧 다가올 삽십대란 것이 부담스러워 정운이 쉽사리 마음을 굳히지 못했다는 것도 수긍이 간다. 이런 정운을 보며 참 안타까웠다. 차라리 짝사랑이 속편하다는 정운의 생각은 그녀의 속내가 어떤지 보여 준다.

인생의 어느 한 부분에도 내 뜻대로 시럽을 부을 수 있다면, 복잡하게 엉킨 인연의 선들을 단숨에 녹여 주고 실수를 망각한 채 늘 달콤하게 살아갈 수 있을 텐데. (155P) 


형민에게 끌리지만, 그와 사랑을 시작하는 건 두렵다. 게다가 형민의 마음도 아직은 잘 모르겠다. 당연히 사랑에 주저하게 되지 않을까. 거기에다 계약직 사원에서 잘리지를 않나, 계단에서 미끄러져 다리를 다치지 않나 정운에게는 시련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고진감래라고 힘겨운 시간은 점점 희망찬 날들로 바뀌어 간다.

왠지 한편의 로맨틱 코미디를 보는 그런 느낌이랄까. 특히 사사건건 부딪히는 두 사람이 사실은 서로 끌리는 관계였고, 나중엔 일도 사랑도 성공한다는 결말. 그래서 결말 부분은 약간 틀에 박힌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20대 후반의 싱글 여성의 일과 사랑, 그리고 그 나이 또래의 심리 묘사가 무척이나 잘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정운과 우연, 형민 외에 등장하는 캐릭터 중 눈에 띄는 캐릭터는 여고생인 주희, 정운의 상사였던 조팀장, 그리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고무공 같은 성격의 정운의 언니가 있다. 이들의 등장은 감초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그래서 이 책이 더 재미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누나도 누나의 팬이 되어줄 사람을 찾으세요" (231P) 라는 현우의 말처럼, 정운은 이제 자기 자신의 팬이 되어 잘 살거라 생각한다. 그 길을 찾기까지 수없이 많은 잘못된 길로 들어서기도 했지만, 정운의 방황은 이제 끝이다. 방황끝, 행복시작! 

사진 출처 : 책 본문 中 (21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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