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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레이드 ㅣ 오늘의 일본문학 1
요시다 슈이치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남녀가 한집에 산다면? 이상한 생각을 먼저 하게 되는 것이 이 세상의 진리다.
하지만, 다섯명의 남녀가 한집에 산다면? 무슨 사연이 있겠거니 하고 생각하게 된다.
참 재미있지 않은가? 남녀 둘이서 한집에 서는 건 동거고 여러명이 함께 사는 것은 공동생활이라니.
물론 나 역시 마음 잘 맞는 친구들과 한 집에 사는 걸 꿈꿔보긴 했지만, 그건 동성 친구들의 경우이고 이성과 함께 산다는 건 역시 고개가 저어진다. 물론 동성 친구들과도 한 집에서 산다는 건 매일매일 수련을 통한 득도의 시간을 보내야 하지만, 이성과 함께 산다면 상대에게 마음이 기울지 않도록 방어막을 단단히 쳐야 순조로운 공동 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순조로운 공동 생활을 하는 다섯명의 남녀가 나온다. 나이는 18살에서 28살까지.
여자 둘, 남자 셋. 하는 일도 모두 다르고 가치관이나 사고방식도 다 다른 그들이 어떻게 한 집에서 그렇게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까.
답은 의외로 간단할지도 모르겠다. 서로간에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사생활에 대해 일체 간섭을 하지 않으며, 상대에게 적당한 관심만 갖고, 자신의 마음을 다 보여주지 않으면 되니까.
스기모토 요스케는 21살의 대학생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요즘 대학생들처럼 생각없고 대충대충 사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친한 선배의 여자친구를 좋아해서 그녀와 묘한 관계가 되기까지 한다.
오코우치 고토미는 직장 생활을 때려치고, 무작정 상경한 아가씨로, 현재 잘 나가는 배우 마루야마 도모히코와 연애중이다. 하지만 지금은 무직에 연애중이라 해도 진짜 연인으로 봐야 하나 싶을 정도로 둘의 사이는 필요이상의 만남은 없다. 게다가 혼자서 목을 메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마루야마에게 열중하지만, 그의 아이를 임신했을 때는 의외로 담백하게 행동하는 수수께끼의 여자다.
소우마 미라이는 잡화점 점장으로 일하고 있는 24세의 여성이지만, 일러스트레이터로 성공하기를 꿈꾼다. 하지만 아직 그녀의 일러스트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미라이는 술을 좋아하고 늘 밤늦게 술에 취해 들어 오기도 한다. 게다가 영화의 강간 장면만 모아 놓은 비디오를 남몰래 보기도 하는 조금은 독특한 아가씨랄까.
고쿠보 사토루는 18세의 제일 어린 나이로 일명 밤일에 종사하는 녀석이다. 다섯명의 동거인중 제일 나중에 들어온 녀석으로 가장 험난하게 세상살이를 경험하고 있는 아이이기도 하다. 마약도 하고, 몸도 파는 그야 말로 막나가는 아이랄까. 게다가 일면식도 없는 타인의 집에 몰래 들어가는 기벽도 있다.
이하라 나오키는 28세로 다섯명의 동거인중 나이가 제일 많다. 인디영화 기획사에 근무하고 있으며, 헤어진 애인과 미묘한 관계를 유지하는 인물로, 다섯명의 등장인물 중 가장 근면하고 성실해 보이는 이미지이지만, 그에게는 커다란 비밀이 하나 있다.
이 책은 다섯명의 인물들의 각각의 시선으로 그려진다. 다섯명의 인물 모두 자신의 이야기에서는 주인공이 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서는 조연이 되는 그런 느낌이랄까. 그렇다 보니 자신이 보는 자기자신과 타인의 눈으로 보는 다른 사람들의 이미지는 무척이나 다르다. 뭐, 트러블 없이 살려고 하다 보면 자신을 더욱 감추고, 상대가 원하는 이미지로 살아햐 하니까 그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모든 것을 까발려 보여주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들 적당히 상대에게 맞춰주고 살 뿐. 어쩌면 우정이나 사랑같은 감정들도 그런 것을 기반으로 생성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는 것은 자아가 좀 덜 발달한 어린아이 시절일지도 모르겠다. 자아가 발전하고 타인을 의식할수록 자신을 숨기는 게 사람들 아닐까. 사회의 규범에 맞춰 살아야 세상을 좀 더 편하게 살 수 있으니 자신을 숨기고 살 수 밖에 없는 게 아닐까.
함께 살고 함께 생활해도 완전한 타인인 그들. 그중에서 누구하나 빠져도 아쉬울 게 없다. 이런 인간관계에 씁쓸함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스스로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서는 그런 방법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얼굴에 분장을 하고 역할에 맞는 옷을 입고 행진하는 가장행렬처럼 이들은 적당한 거리와 친밀감을 유지하면서 사는 철저한 타인들이었는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그렇게 사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