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사도 - 괴기.번안편 김내성 걸작 시리즈
김내성 지음 / 페이퍼하우스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난 이제까지 우리 나라 장르문학에 대해 일종의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영미나 일본 장르 문학작가들에 비해 작가수도 턱없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스토리 역시 영미나 일본 쪽 장르 소설의 경향을 답습한 듯한 글들을 보면서 고개를 돌려버리곤 했었다. 물론 지금도 많은 작가들이 우리나라만의 장르문학을 만들기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미 영미나 일본 장르문학에 길들여져버린 나에게 있어서는 아직도 노력이 더 필요하다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끔 만들었다.

김내성. 부끄럽지만 난 처음 들어본 이름이다. 만약 이 백사도란 책이 복간되어 나오지 않았더라면 이 이름을 끝끝내 알 수 없었으리라. 일제시대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공부를 했던 김내성은 일본에서 먼저 데뷔한 작가로 에도가와 란포와 대학 선후배 사이이자, 같은 장르의 소설을 쓰는 동료로 에도가와 란포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가라고 한다. 

백사도는 괴기편과 추리편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괴기편은 5작품, 번안편은 3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총 페이지 수가 300페이지가 안되기 때문에 각 작품은 단편들이라 보면 될 것이다.

괴기편에 수록된 작품중 첫번째 작품인 광상시인은 상처한 한 화가가 M마을이란 곳에서 만난 시인 부부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시인의 부인에게서 자신의 아내의 모습을 보는 화가와 화가에게서 자신의 첫사랑의 모습을 보는 시인의 아내, 그리고 사랑과 증오의 갈림길에서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어버린 시인 추암. 그후 아내의 시체에 화장을 하고, 안거나 업고 다니는 기행을 보이는 시인의 사랑은 소름끼칠 정도였다. 이걸 진정 사랑이라 이야기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저자는 맨 뒤에 우리에게 궁금증을 하나 남긴다. 과연 당신은 로맨티스트인가, 현실주의자인가.

무마는 추리 소설 작가들의 이야기이다. 본격 탐정 소설을 쓰는 주인공 나는 추리 소설 마니아인 허군에게 기괴하고 변태적인 소설을 쓰는 백웅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깊은 밤, 안개속에서 백웅이 허군에게 들려준 이야기의 진실은?

손 페티시를 가진 한 남자의 사랑과 증오,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낸 끔찍한 사건에 관한 이야기는 이게 1930년대에 씌어진 소설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독특하고 재미있었다. 안개는 사물을 희미하게 보이게 만든다. 안개가 주는 착시와 기괴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소설가의 이야기는 마지막 반전으로 유쾌함을 더했다.

표제작인 백사도는 미술전람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백사도를 그린 화가를 찾아가 그 그림에 얽힌 끔찍한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진행되는데, 결국 세사람의 죽음이란 참극을 낳은 그 사건의 뒤에 숨겨진 진실은 끝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본격 추리 소설이라면 이런 결말에 대해 분개하겠지만, 기담에 가까운 이 이야기에서는 이런 결말이 오히려 더 만족스러웠다. 이 작품을 보면서 소름이 끼치는 부분은 비명횡사로 죽은 화가의 부모의 이야기도, 아내를 의심해 추궁하고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간 이야기가 아니었다. 아내의 죽은 모습을 보면서 멋진 그림에 대한 구상이 떠오르고, 그것을 실행하는 화가의 모습과 그 마음이 소름끼쳤다. 가끔 천재적인 예술가들을 보면 기행을 저지르곤 하지만, 이런 모습은 소름이 끼치다 못해 섬뜩하기까지 하다.

악마파는 일본 유학생들의 이야기이다. 그림을 전공하는 주인공과 두 동기 노단과 백추, 그리고 주인공의 동생 루리 사이에 얽히고 설킨 관계는 비극을 낳는다. 이 작품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노단과 백추라는 캐릭터이다. 부잣집 도련님에 덩치도 크고, 리더십을 발휘하며 사람들을 휘어잡는 강자인 노단에 비해 백추는 작은 몸집에 장애가 있는데다가 남들에게 무시당하고 소외되는 약자의 모습을 보인다. (확대해 보면 노단은 사디즘의 경향이, 백추는 마조히즘의 경향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게다가 두 사람의 화풍은 악마파란 것으로 똑같지만, 더욱 흥미로운 것은 한사람은 강자의 모습을, 한사람은 약자의 모습을 그림 속에 담는다는 것이다.

갑작스레 사라진 백추, 그리고 노단과 루리의 결혼. 하지만 그 결혼은 루리의 실종과 노단의 자살이란 것을 막을 내린다. 그후 다시 나타난 백추가 나에게 보여준 진실은? 이 모든 걸 예술이라는 미명하에 묵인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서 예술적 광기의 끝은 없는가 하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이단자의 사랑은 가장 소름끼치는 작품이었다. 시인과 의사라는 대조적인 직업을 가진 두 사람과 그 두 사람의 사랑을 동시에 받은 애련. 애련은 시인과 결혼을 하지만, 결코 의사를 잊지 못하는 듯 하다. 질투심에 사로잡혀 애련의 목을 조르고 만 시인은 그녀를 앞마당에 묻고, 그녀의 무덤위에 수밀도를 심는다.

4년을 기다려 첫 수밀도를 수확한 날, 의사가 시인을 찾아 오게 되고, 술자리에서 서로가 감추고 있던 비밀을 드러내는데..... 사실 시인이 아내의 무덤에 수밀도를 심어, 아내의 몸을 먹고 자란 수밀도를 먹을 날을 기다린다는 설정도 기가 막힌데, 의사가 한 일은 더욱 기가 막혔다. 죽여서라도 자신의 애련을 자신의 일부로 만들고 싶었던 시인은 의사의 말에 자신이 했던 일이 모두 헛수고였다는 걸 알게 된다.

시인과 의사라는 대조적인 성향의 인물의 설정은 정말 최고였다. 감성적인 부분이 발달한 시인과 논리적인 부분이 발달한 의사가 선택한 방법은 그 둘의 성향을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 점이 정말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괴기편의 작품들을 보면 시인, 화가, 소설가 등 예술 계통에 종사하는 인물들이 중심인물로 등장한다. 그래서 그들의 기이한 행동이 어느 면에서는 납득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독한 사랑과 증오라는 다소 흔한 소재에 예술가들의 기괴한 기질, 탐미적 경향, 그리고 관능적인 여인들을 묘사한 장면들은 시종일관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또한 예술이라는 명목하에 자행되고 묵인되어온 참혹한 진실들은 일반인인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기는 하지만, 그들의 예술을 추구하는 마음에 대해서만은 고개를 숙이게 만든다.    

번안편은 셜록 홈즈가 등장하는 소설을 우리나라 풍으로 고쳐 쓴 것이다. 즉, 원작의 내용이나 줄거리는 그대로 둔 채, 지명, 인명, 시대등만 바꾼 것인데, 이 또한 무척이나 흥미롭다. 백발연맹은 제목에서 짐작되듯이 셜록홈즈의 모험 편에 수록된 빨강머리 연맹의 번안작품이고, 히틀러의 비밀은 셜록 홈즈의 귀환에 수록된 여섯개의 나폴레옹을, 심야의 공포는 셜록 홈즈의 모험편에 수록된 얼룩띠를 각각 번안한 작품이다. 특히 여섯개의 나폴레옹을 번안한 히틀러의 비밀은 라디오 방송극에 쓰일 법한 극화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한 사항이다. 그러하기에 번안편은 특히 셜로키언들에게 또다른 재미를 줄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책 뒤에 수록된 추리문학소론은 추리 소설 팬들이라면 누구나 궁금해 할 본격 추리 소설과 변격 추리 소설의 계보와 특징들에 대해 잘 정리되어 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이 백사도에 수록된 작품들 중 괴기편은 변격 추리소설에 속하는 작품들이다. 우리나라의 장르문학의 1세대이자, 현재에 이르러 재조명을 받게된 그의 본격 추리 소설 작품은 어떨지 무척이나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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