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치는 여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
엘프리데 옐리네크 지음, 이병애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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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있어 독일 문학이란 것은 일종의 기피 대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서적으로도 맞지 않을 것이란 편견과 독일이라는 이미지가 주는 딱딱함 때문이랄까. 또한 순문학보다는 장르문학 쪽을 주로 읽는 내가 이해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도 크다. 내가 이제껏 접한 독일 문학이라고는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과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만을 읽은 게 고작이다. 두 작품 다 무척이나 낭만적이며, 정열적인 사랑을 그린 작품이고, 고전이라 무척 즐겁게 읽었지만, 현대문학이란 건 일단 두려움이 더 크다. 

내게 있어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작품은 처음이다. 아니, 독일 현대문학은 처음이라고 해야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책 뒷표지의 작가적 실험정신이라는 말에 일단 겁부터 집어 먹었다. 혹시 엄청나게 복잡하고 난해한 이야기가 아닐까라는 생각에... 책 표지를 넘기기 전에 긴장부터 해버린 나....

책장을 펼치고 읽기 시작하면서 처음 느낀 건, 무척 독특한 느낌이다라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문장이 현재 시제로 서술되어 있는 건 몇 번 접해본 것이라 낯설지는 않지만, 익숙한 느낌은 아니다. 하지만 현재 시제로 서술되는 것은 바로 내 눈앞에서 지금 상황들이 벌어지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 하며, 책 내용에 더욱 집중하게 만든다는 이점이 있다. 따라서 독특하다는 점은 현재 시제로 서술되는 장면들이 아니라 표현력이란 부분일 것이다. 단순한 동작 하나도 마치 연극 무대 배우들의 공연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라든지, 다양한 비유들은 작가의 표현력에는 끝이란 게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게끔 만들었다. 게다가 짤막짤막한 문장들은 익숙치 않은 작가의 문장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책의 주요 등장인물은 세 사람으로 압축된다. 피아노 교사를 하고 있는 에리카 코후트와 그녀의 어머니, 그리고 에리카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속삭이는 그녀의 학생 발터 클레머이다. 에리카는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으며, 어머니의 지배하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것은 어린 시절부터 지속되어 온 것이라 감히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한다. 어머니는 폭력과 폭언으로 그녀를 지배하기도 하지만, 그녀가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그녀는 아무나 어울릴 수 없는 특별한 사람이라고 여기게 만든다. 즉, 에리카를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어머니일뿐이다.

매일매일 똑같은 시간에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는 에리카이지만 가끔 어머니에게 반항이라도 하듯 새옷을 사들이고, 어머니 몰래 핍쇼를 보러 다니고, 포르노 극장에 가고, 밤 깊은 공원에서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을 훔쳐보기도 한다. 또한 어머니에게 종속되어 피지배자로 살아가지만, 자신의 학생들에 대해서는 그들을 멸시하거나 모욕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주도권 장악일 뿐이다. 집으로 돌아온 에리카를 기다리는 것은 자신의 지배자인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벌써 서른이 넘은 에리카에게 다가오는 20대의 청년 발터는 신선한 자극이기도 하지만, 두려운 대상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구애를 해오는 발터. 그러나 에리카는 어머니가 두렵다. 어머니는 에리카를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기 때문에 절대로 남에게 빼앗기려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에리카는 발터에 대해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지만, 결국 마음을 허락키로 한 그녀가 발터에게 요구한 것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발터가 자신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실은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발터를 지배하고 싶은 욕망. 그런 에리카의 요구에 발터는 당황과 더불어 모욕감을 느끼게 된다. 이미 성장과정에서 비뚤어져 버린 에리카의 욕망을 이해하기엔 발터는 너무 젊고, 그녀에 대해 거의 모르기 때문이다. 에리카는 자신이 쓴 편지에 대한 내용을 발터가 부정해주기를 바라고, 따스하게 그녀를 안아주길 바라면서도 입으로는 다른 소리를 한다. 에리카가 발터를 대하는 모습은 어머니의 지배를 받으면서 형성된 마조히즘 성향과 어머니의 지배를 벗어나고 싶어 자해를 하다 형성된 사디즘 성향이 합쳐져 사도마조히즘이란 비뚤어진 욕구와 욕망으로 발전하게 된 모습인 것이다. 이렇다 보니 발터가 그녀를 이해해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발터는 진정으로 에리카를 사랑했을까? 난 아니라고 본다. 자신의 피아노 선생으로, 예술가로 존경하는 모습과 세상에는 무관심하고 자신의 세계에만 틀어 박혀 있는 에리카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컸지 않을까. 그런 것은 중간중간 나오는 발터의 생각에 잘 드러난다. 그리고 그는 일시적인 관계이더라도 보통의 남녀관계를 원했다. 따라서 에리카의 요구를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것은 결국 강간과 폭력이라는 형태로 끝을 맺는다.

책의 결말부분은 씁쓸하기만 하다. 에리카는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한 발터를 찾아가 칼로 찌르려 하지만 결국 멀리서 발터를 지켜보다가 자신의 어깨를 찌르고 집으로 돌아간다. 결국 에리카는 어머니의 지배, 어머니의 '작은 일인용 사립동물원'(360p 인용)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더이상 - 어머니가 죽을 때까지 - 에리카는 결코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관계는 모녀 사이이자, 여자 사이인 사람들의 지배와 피지배관계, 그리고 예술가와 제자, 남녀 사이의 지배와 피지배 관계에서 보이는 것은 상하 관계밖에 없다. 즉, 평등한 관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결국 등장인물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헤게모니 다툼을 반복할 뿐이다.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도 '절대적'인 평등한 관계는 없다고 본다. '평등해 보이는' 관계만이 존재할 뿐. 그렇다고 해서 이런 절대적인 굴종관계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 무척 흥미로운 부분은 저자의 시선이 아주 냉담하다는 것이다. 여성 작가이기에 등장하는 여성 등장인물에 대해 따스한 시선을 보낼거라는 예상을 마구 깨졌다. 물론 에리카가 특수한 성향을 가진 인물임이 분명하기에 그럴 수도 있겠지만, 에리카는 결국 자신의 옭아매고 있는 올가미를 스스로 헤쳐나오지 못했고, 결국 그 올가미에 스스로 몸을 던지는 것으로 끝나버렸기에 더욱 냉담한 시선을 보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딱 잘라 말해서, 피아노 치는 여자는 읽기 쉬운 책은 아니었다. 게다가 같은 여자로서 에리카를 바라보고 있자니, 굴욕감이 밀려들어 오기도 했다. 시쳇말로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하는데, 내가 꼭 그런 느낌이다. 에리카는 벌써 서른 중반의 어른인데도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려 하지도 않았고, 현재상황에서 빠져나오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머니와 자신의 관계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이양해서 만족감을 얻으려는 모습에서는 욕지기가 치밀어 오를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나중에 문득 에리카를 떠올리게 된다면 그때는 에리카를 동정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기는 한다. 동정뿐, 이해는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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