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몽
야쿠마루 가쿠 지음, 양수현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현대 사회처럼 무차별 범죄가 기승을 부리던 시대가 또 있을까. 요즘은 무서울 정도로 무차별 범죄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여의도에 차를 몰고 들어와 사람을 마구잡이로 치던 사건, 동해 시청 사건등이 있었고, 일본에서는 2008년 아키하바라에서 칼을 휘두르며 무차별 살인을 저지른 사건을 포함 10년간 70여건에 달하는 무차별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또한 미국에서는 총기 난사사건이 끊이지 않는다. 과연 그런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야쿠마루 가쿠의 허몽은 바로 무차별 살인의 희생자와 유족, 그리고 가해자에 관한 소설이다. 일본은 특히 무차별 살인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만큼, 이는 일본의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직접적으로 건드리고 있는 소설이라 볼 수 있다.

미카미, 사와코 부부에게는 세살난 딸 루미가 있었다. 어느 겨울 공원으로 산책나간 사와코와 루미는 한 무차별 살인자에 의해 공격을 받는다. 그 사건의 피해자는 열두명의 사상자를 내고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는 심실상실자이란 진단을 받게 되어 재판도 받지 않고 교도소에 가지도 않고, 다만 치료 목적으로 병원에 수감되었다. 심실상실자, 예전 용어로는 정신분열증이다. 환각과 환청을 듣고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 지도 모르는채 범행을 저지르는 그런 사람들의 경우 죄를 묻지도 벌하지도 않는다. 
그러하기에 검찰은 어차피 패소가 분명한 사건이란 이유로 불기소 처분을 하고, 언론들 역시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그 사건에 대해 보도를 하지 않게 된다. 열두명이란 희생자를 낸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미카미와 사와코 부부는 이혼을 하게 되고, 각자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사건 발생 4년 후, 미카미에게 걸려온 사와코의 다급한 전화. 루미를 죽인 그 범인이 다시 나타났다는 이야기였다. 미카미는 반신반의 하면서 사와코가 그를 보았다는 곳으로 향하고, 얼마간의 잠복 끝에 범인 후지사키가 삿포로로 되돌아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후 후지사키의 뒤를 쫓는 미카미는 그를 계속 지켜보지만 달리 어쩔 방법이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물론 속마음이야 그를 당장이라도 쫓아가 죽이고 싶은 생각뿐이지만.. 게다가 사와코는 후지사키를 발견한 후 점점 상태가 이상해진다. 후지사키가 자신의 집을 감시하고 있다고 하고, 자신을 죽이러 올거라고 하는 등 정신병적 증세를 보인다. 게다가 루미의 인형을 보고 루미라고 하는 등 사와코의 상태는 점점 심해지기만 한다.

딸을 잃은 부모의 마음, 그것도 무차별 살인자에게 딸을 잃었건만, 범인은 심신상실자라는 이유로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고 풀려 난다는 게 부모에게는 얼마나 큰 고통이었을까. 차라리 내가 죽었더라면 하는 생각도 들지 않았을까. 그런 사와코의 행동은 안타까우면서도 가슴이 아팠다. 특히나 루미의 인형에게 밥먹이는 시늉을 하고 인형에게 말을 거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도 안타까웠다.

허몽은 두 가지 이야기가 동시에 진행된다. 하나는 후지사키에게 딸을 잃은 미카미 부부의 이야기이고, 하나는 유키라는 밤업소 아가씨의 이야기이다. 유키의 이야기가 왜 뜬금없이 나왔을까 싶지만 나중에 보면 이야기가 모두 합쳐지기 때문에 수긍이 된다. 특히 유키는 후지사키의 정신병증을 재발시키게 만든 사건의 중심 인물이기도 하다. 나중에 확실히 나오지만 유키 역시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고, 그녀에게 역시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심실상실자라는 이유로 극악한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가해자가 처벌받지 않는 법제도와 그런 사건에 대해서는 쉬쉬하는 언론들때문에 피해자 가족들은 고스란히 그 고통을 짊어진채 살아야 한다. 결말 부분에 이르러 나오는 사와코가 남긴 편지에는 그 슬픔과 분노와 고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사와코의 선택. 우리는 그녀에게 감히 손가락질을 할 수 있을까.

만약 사와코가 제정신인 상태로 범행을 저질렀다면 그녀는 그 책임을 추궁당해 재판을 받고, 교도소에 수감될 것이다. 하지만 사와코 역시 후지사키와 같은 병명으로 살인을 저질렀다면 그녀 역시 심신 상실자라는 판단으로 죄를 묻지 않고 풀려날 것이다.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복수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도록 만든 원인은 사회에 있다. 물론 후지사키가 처벌을 받더라도 죽은 루미가 살아 돌아올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죄값도 치르지 않은채 풀려나는 범인을 보는 것만큼 사와코에게 고통스러운 일은 없었을 것이다.
 
무차별 살인의 범행은 불특정 다수를 향한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 범행동기를 짐작하기도 어렵고, 또한 범인이 검거되더라도 정신병으로 간주되어 사형은 커녕 교도소에 수감되지 않는 경우도 빈번하다. 또한 그들이 정신병적 증상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는 건 똑같은 인간의 몫이다. 단지 의사 한두명의 진단만으로 그들의 죄는 사해진다. 게다가 그런 경우 재판으로 넘어가도 패소하는 경우가 많기에 불기소 처분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그들을 단죄하고 속죄케 하는 것은 허몽에 불과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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