렉싱턴의 유령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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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본 작가이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0순위에 올라있는 무라카미 하루키. 하루키의 책은 30권이 넘게 읽었지만, 렉싱턴의 유령은 처음이다. 장편 소설들은 대부분 발표 순서대로 읽었지만 단편집의 경우 같은 단편이 여러권의 책에 수록되어 있기도 한 경우도 많아서 어쩌다 보니 빠뜨리고 읽지 못한 게 바로 이 책같은 경우이다. 총 7편의 단편이 수록된 이 단편집은 여타의 하루키의 소설과는 조금은 다른듯한 맛이 느껴져서 참 좋았다.

표제작이자 제일 처음으로 수록된 렉싱턴의 단편의 경우, 외국의 환상문학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점은 하루키가 미국 생활을 했던 것에도 연관이 있겠지만, 그가 좋아하는 작가 대부분이 미국 작가란 점에 있다는 것과도 연관이 있을 듯 하다. 그래서 그런지 때때로 하루키의 작품은 동양권 작가가 쓴 글이라기 보다는 서양권 작가가 쓴 글같은 느낌을 주는데, 렉싱턴의 유령이 바로 그런 작품이다. 지인의 여행으로 빈집을 돌보게 된 주인공 <나>가 겪은 기묘한 날을 소재로 하고 있는 이 작품은 오래된 집, 그리고 비오는 날에 나타난 유령들이 이야기이다. 보통 오랜된 집이나 오래된 물건에는 혼이 깃들기도 한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런게 아니었을까. 어쩌면 오래전에 이집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영혼일 수도 있겠지만... 유령이 등장하지만 무섭다기 보다는 신비로운 느낌을 더 많이 줬던 작품.

녹색의 짐승은 이 단편집에 수록된 작품 중 가장 짧은 분량이며, 역시나 서양의 환상문학같은 느낌을 준다. 이 작품 역시 공포스럽다기 보다는 사람의 마음이나 생각의 잔인함과 대조되는 녹색의 짐승이 받는 고통에서 보여지는 안타까움과 고통이 더 크게 와닿았던 작품.

침묵은 하루키 단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한 화자가 청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이 바로 그런 것인데, 실제로 하루키는 이런 식으로 작품의 소재를 얻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잠깐. 이 작품은 학창시절 집단 따돌림을 당한 사람의 경험담이 소재가 되고 있다. 또래 집단 속에서의 따돌림이란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상상외로 엄청나게 큰 상처와 절망을 안겨준다. 그래서 그걸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이니까. 이 작품속의 화자는 그 시간을 인내로 견뎌내긴 했지만, 그가 정말 힘들었던 건 대놓고 괴롭히는 사람이 아니라 그를 대놓고 괴롭히지는 않아도 그를 본체만체하며 침묵을 지켰던 사람들이었다. 침묵은 금이라고도 하지만, 때로는 침묵하지 않는 쪽이 나은 경우도 있다.

얼음 사나이 역시 제목처럼 판타지풍의 작품이다. 얼음 사나이가 어떻게 생겨나는지는 본인도 모르고 다른 어떤 누구도 모른다. 그러나 그와 사랑에 빠지게 되어 결혼을 하게된 여인은 문득 그와 함께 남극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는 정신적으로 외톨이라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는 못본척 모른척 지나쳐야할 것도 있었을지도....

토니 다키타니는 짧은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한 남자의 인생을 다루고 있다. 그의 부모, 그의 탄생, 그의 성장 과정, 그리고 결혼과 아내의 죽음까지. 물론 한 사람의 인생이 그런 식으로 짧게 축약될 수는 없으나 작품내에서의 위화감은 전혀 없다. 셀 수 없이 많은 정도의 옷을 사들이던 아내, 그리고 아내의 죽음후 남겨진 것은 아내의 옷뿐.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이후 남은 것은 아버지가 모았던 레코드들뿐. 그 두가지를 없애버린 후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지막 글을 읽었을 때 밀려오는 것은 깊은 쓸쓸함뿐.  

일곱번째 남자는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을 여전히 상처로 끌어안고 살아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였다. 쓰나미에 밀려 실종된 친구의 얼굴을 떠올리며, 계속 고통을 받았던 남자. 그러나 실종된 친구의 마지막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였느냐에 따라서 그의 인생은 사뭇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물론 죄책감은 있었겠지만, 공포라는 트라우마가 남지는 않았을테니. 

마지막 작품인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는 다른 단편집에서도 많이 읽었던 것이었지만, 다 읽고 나서 드는 위화감이란... 내가 읽었던 작품은 이것보다 길었고, 내용도 더 추가되어 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알던 기존의 작품은 아닌듯 했다. 나중에 후기를 보면서 알게 되었는데, 이 작품은 원래 작품의 내용을 약간 손봐서 짧게 만든 것이라고 한다. 차이점을 주기 위해 제목에도 문장 부호가 하나 들어갔다고... 

상실의 시대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눈치챘겠지만, 이 작품에서 나오는 내용중 장님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가 나오는 파트 - 즉, 주인공의 회상장면 - 은 상실의 시대에도 나온다. 와타나베가 친구와 함께 친구의 여자 친구인 나오코를 문병하러 갔던 장면인데, 하루키의 단편을 읽다 보면 다른 장편 소설에 그 작품이 고쳐져서 사용된 걸 발견하게 된다. 요런 것도 하나의 재미가 아닐까.   

하루키의 작품은 읽을 때마다 늘 감탄하게 된다. 다양한 소재들도 그렇지만 장편이나 단편, 에세이등 모두 각각의 감칠맛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평을 쓰기 힘든 작품이 하루키의 작품이기도 하다. 읽을 때는 참 재미있는데, 그 느낌을 말로 표현하기가 참 힘들다. 어쩌면 워낙 그의 작품에 관한 해석이 많다 보니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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