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탐정의 규칙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혁재 옮김 / 재인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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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이 책을 읽었을 때는 최근작인줄로만 알았다. 1985년 데뷔후 20여년이 넘는 시간 동안 추리 소설을 써왔던 히가시노 게이고, 따라서 이제까지의 자신의 추리 소설 인생을 반추하며 썼던 책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초판이 1996년에 나왔다는 걸 알게 되고 깜짝 놀랐다. 1996년이면 히가시노 게이고 데뷔후 10년. 그때 그는 어떤 생각으로 이 책을 쓰게 된 것일까.

프롤로그부터 에필로그, 명탐정의 최후를 제외하고도 12건의 단편이 실려 있는 이 책은 무척이나 흥미롭다. 추리 소설에 등장하는 등장 인물의 설정을 비롯해 본격 추리 소설에 등장하는 갖가지 트릭으로 무장한 에피소드, 그리고 탐정 시리즈의 최후의 모습까지 보여주고 있으니 코스 요리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명탐정의 규칙에 나오는 등장 인물은 오가와라 반조라는 형사와 명탐정 덴카이치 다이고로. 처음 덴카이치의 이름과 그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부분을 읽었을 때는 왠지 요코미조 세이시의 긴다이치 코스케가 생각났다. 덴카이치와 긴다이치는 발음도 비슷할 뿐더러, 덴카이치는 낡은 양복에 덥수룩한 머리를 북북 긁는 외형적 특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코미조 세이시의 긴다이치 시리즈를 읽어본 독자라면 긴다이치 코스케의 평소 복장이 낡아빠진 하오리에 머리는 까치집을 지었다는 것이 떠오를 것이다. 게다가 사건이 일어나도 혼자서 생각하다가 나중에 사람들을 모아 놓고 사건의 진상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도 꽤나 닮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요코미조 세이시의 이름이나 그의 저서 이름은 확실하게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동요 살인 부분에서는 악마의 **노래라고 책 이름이 언급되고 있다. 참새가 말하길~~이라면서 시작되는 마더 구스. 이쯤되면 요코미조 세이시의 긴다이치를 염두에 두고 이 덴카이치 시리즈를 쓴 게 아닌가 하는 짐작이 확정적으로 바뀌게 된다. 그렇다면 왜? 사실 난 판단을 유보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요코미조 세이시의 책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히가시노 게이고 본인이 아니면 잘 모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비슷한 이름에 비슷한 외모와 성격을 가진 두 캐릭터이긴 하지만, 그건 일단 배제하고 책을 읽다 보면 웃음이 절로 터진다. 탐정이 등장하는 추리 소설에서는 늘 형사는 뒷전. 범인의 범행을 조사하고 범인을 검거하는 형사는 무능력하게 그려지고 어디서 굴러 먹던 개뼉다귀인지도 모르는 탐정이 등장해서 모든 사건을 해결한다. 게다가 이 탐정이란 사람은 발이 얼마나 넓은지 피해자가 의뢰인이기도 하고 초대를 받기도 하는 등 늘 사건이 터지는 곳에 나타난다. (문득 든 생각이지만, 저런 사람 옆에 있다가는 목숨이 열개라도 모자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멋지게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다. 형사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면서....

이 책에는 본격적인 사건 12개가 등장한다. 밀실트릭, 다잉 메세지, 알리바이 트릭, 토막 살인 사건, 마더 구스 등 본격 추리 소설에 등장할 트릭과 추리 소설 장르가 다수 등장한다. 하지만 짧은 단편이니만큼 복잡하고 어려운 사건을 언급하기 보다는 추리 소설 작가들이 자주 써먹는 방법에 대해 독자에게 시원하게 알려 준다는 느낌이다. 추리소설 독자들이 가지는 궁금증을 하나하나 친절하게 알려준다고나 할까. 그러면서도 질낮은 추리 소설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각 사건은 모두 반전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커다란 웃음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폐쇄된 산장의 비밀의 트릭의 경우 머리를 쓴 트릭이라기 보다는 돈을 쳐바른 트릭이다. 또한 다잉 메세지에 관한 이야기인 최후의 한마디에서 피해자가 남긴 다잉 메세지의 의미를 알고 난 미친듯이 웃어 버렸다. 게다가 여사원 온천 살인 사건의 경우 원작 추리 소설을 바탕으로 드라마화 할 경우의 문제에 대해 비판을 하고 있다. 아침 드라마용으로 개조되어 본질을 잃어버린 추리 소설들. 이는 원작자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시청자의 문제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라 분명히 못박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목없는 시체에서는 추리 소설에서 사용하면 안되는 용어 ***에 대해 언급하고 있고, 사라진 범인의 경우 억지로 모른 척을 하고 사건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 탐정의 고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 책은 글씨로만 이루어져있는 매체이기 때문에 시각적인 정보는 독자가 머리에서 재구성할 수 밖에 없다. 그런 헛점을 노리고 범인을 만들어 내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지 않을까. 또한 시리즈에 나오는 주인공급의 캐릭터를 범인으로 만드는 것 등은 시리즈의 아름답지 못한 종착을 향해 달리는 화차와 같다고 넌지시 언급한다. 특히 그것은 에필로그와 명탐정의 최후에 잘 나와 있다.

이 책의 독특한 구성은 추리 소설의 등장 인물들끼리 대화를 주고 받는다는 것에 있다. 즉 오가와라 반장과 덴카이치가 트릭이나 추리 소설의 장르, 그리고 추리 소설의 설정 등에 대해 대화를 주고 받는데, 자괴적이며 자학적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즉, 엉터리같은 추리 소설 속에서는 등장 인물들도 스스로 부끄럽지 않을까 하는 말을 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이 책이 엉터리같은 추리 소설이란 것은 아니다. 본격 추리 소설의 설정이라든지 구성을 잘 따르고 있고, 그 트릭을 잘 이용하면서 칼날같은 비판을 퍼부어 대는 것이다.   

탐정이 등장하고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별별 트릭이 다 나온다고 해서 추리 소설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추리 소설의 질을 높이는 것은 읽는 독자에게도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다고 보여진다. 사실 나 역시 추리 소설을 읽으면서 범인을 알아내거나 트릭을 알아 채버렸을 땐 아~~ 재미없어 라고 말하는 독자 중의 하나로서 무척이나 뜨끔하기도 했다. 요즘 들어서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잔혹한 범죄 방식이나 꼬이고 꼬인 트릭, 범인의 정체보다는 범인의 동기 쪽에 관심을 많이 갖게 되는데 - 즉, 범인의 심리쪽 - , 이것이 긍정적인 방향으로의 선회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여튼간에 독자들이 알고 싶어 하는 추리 소설속 비밀들을 가차없이 까발리고 있으며, 당치 않은 트릭으로 독자의 눈을 사로잡으려는 추리 소설들에 대한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고 있는 명탐정의 규칙. 이는 추리 소설 작가이기도 한 저자 자신에 대한 재평가와 더불어 향후 자신이 걸어 가야 할 추리 소설 작가로서의 길에 대한 의지로도 보인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 책은 재미있다. 설정도 트릭도, 덴카이치와 오가와라의 대화도 웃기고, 마지막 반전도 뒤집어지게 웃긴다. 하지만 다 읽고 나서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웃었던 기억만 난다면 이 책의 재미를 제대로 못느낀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그리고 다 읽은 후에는 히가시노 게이고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뭔지, 추리 소설을 제대로 읽는 독자가 되려면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지 곰곰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절대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만 판단해서는 안될 것이다. 특히 자신이 추리 소설 매니아라고 생각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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