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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편지의 기술
모리미 도미히코 지음, 오근영 옮김 / 살림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연애 편지라.. 왠지 그 이름만으로도 설렌다. 하지만 조금 부끄럽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난 연애 편지를 써 본 기억이 있던가.... 중고교 시절엔 몇 통을 받아 본 기억은 있으나 연애 편지를 보내 본 기억은 거의 없다. 대학 시절엔 연애 편지보다는 좋은 책에 몇 구절 마음을 담아 상대에게 보낸 기억이 있다. 지금이야 휴대 전화 문자나 이메일을 통해 용건을 전하는 시대이다 보니 손으로 쓴 편지는 거의 기억이 없지만, 그래도 내가 한창 청춘을 구가하던 그 시절엔 그래도 손으로 쓴 편지가 많았다. 고작 십 몇년의 세월이 편지 문화를 확 바꾸어 놓았다는 생각에 조금은 씁쓰레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연애 편지란 것의 속성이란 어떠한가. 쓰는 사람도 부끄러워지고, 받아서 읽는 사람도 부끄러워지는게 연애 편지다. 막상 좋아하는 상대에게 고백하기 위해 편지를 쓰다 보면 피치 못하게 닭살 돋는 단어들이 들어가게 마련이니까. 뭐 따지고 보면 대놓고 사랑한다, 좋아한다... 라고 고백하기 보다는 편지로 마음을 전하는 것이 조금 덜 부끄러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얼마 전에 겐지이야기를 읽으면서 와카란 것에 흠뻑 빠졌다. 상대에게 직접 말을 하지 않고 시의 형식을 빌어 자신의 마음을 담아 보내는 글인 와카. 그 속에 담긴 의미들은 직접적이지 않아 더욱더 아름다웠다. 요즘 사람들은 대놓고 고백을 하는 경향이 있는데 본인 입장에선 그걸 아주 부끄러워해서 피하고만 싶은 입장이지만, 그래도 편지는 조금은 덜 부끄럽단 생각이 든다. 상대의 반응을 직접 보지 않아도 되는 잇점도 있으니 말이다.
연애편지의 기술. 이 책은 편지 형식의 책이다. 편지 형식으로 씌어진 책은 츠지 히토나리의 <사랑을 주세요>를 읽은 기억이 나는데, 그때는 두 사람이 주고 받는 형식으로 씌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모리미 도미히코의 연애편지의 기술은 모리타 이치로라는 대학원생이 친구, 선배, 여동생등에 보내는 답장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교수의 음험한 조종으로 노토 반도에 해파리 연구를 하러 오게 된 모리타 이치로는 그곳에서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서신왕래 무사수행을 결심한다. 그건 사람들과의 편지 교류를 통해 연애편지의 기술을 획득하고, 더 나아가 연애편지 대필사업 벤처기업을 세우겠다는 야무진 꿈을 담은 것이었다.
모리타 이치로가 편지를 보내는 대상은 무척이나 다양하다. 사랑에 빠져 연애 상담을 해오는 친구, 자신을 괴롭히던 선배, 과외 제자인 초등학생, 여동생, 그리고 작가 모리미 도미히코에까지... 재미있는 것은 편지의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그의 인격이 조금씩 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여러 명의 사람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그런 면이 있다. 상대와의 관게가 어떤가에 따라서 조금씩 태도를 달리 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한 것은 상대를 기만하기 위한 행위라고 보기 보다는, 친분관계에 따른 예의로 받아 들이는 것이 옳은 것 같다.
하지만 서신왕래 무사수행을 입으로 부르짖으면서도, 친구의 사랑이 차곡차곡 결실을 맺어가자 질투가 나 절교를 선언하고, 앞에 있으면 무서운 선배지만 근처에 없으니 무서울 게 없다는 태도로 까부는(?) 모리타의 모습이 어린애같아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대는 정말로 '수행'을 하고 있는겐가... 라고 묻고 싶었다고나 할까?
게다가 우리나라와는 달리 편지 제일 밑에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이름을 함께 쓰는 형식에서 보이는 기발한 표현은 배꼽을 잡고 웃게 만들었다. 본문에 나오는 표현들도 모리미 도미히코의 청산유수같은 어휘 구사 능력을 확실히 보여주지만, 역시 마지막의 두 줄이 실로 촌철살인의 표현이었다.
모리미 도미히코의 책은 늘 기대를 하게 만들고, 그 기대를 만족시켜준다. 대학생들의 망상 폭주 청춘 구가 소설, 배꼽잡게 만든 너구리 요괴 이야기, 일본의 기온마츠리 전야제인 요이야마를 배경으로 한 작품, 그리고 전혀 다른 작가가 쓴 작품처럼 보이는 기담인 여우 이야기까지 그의 작품은 모두 각각 독특한 색깔을 가지고 있다. 현실과 판타지가 절묘하게 결합된 매직 리얼리즘의 기법을 이 책에선 볼 수 없었지만, 서간체라는 독특한 형식이 그 아쉬움을 달래준다. 대신 그의 고풍스러운 문체와 톡톡 튀는 어휘구사력은 변함없으니 너무나도 즐겁다.
비록, 서신왕래 무사수행을 성공적으로 끝내지는 못한 모리타 이치로지만, 연애 편지에 있어서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는 깨달은 바가 있는 듯 하다. 그의 사랑이 이루어질지 이루어지지 않을지는 미지수이지만, 그에게 화이팅을 보내고 싶다. 사랑을 할 때는 나설 때와 물러설 때를 잘 구별해야 한다. 비록 모리타가 아직까지는 나설 때를 잡지 못해 방황하는 마음을 보내지 못한 편지로 대신했지만, 다이몬지 산에서 빨간 풍선을 날리는 날에는 꼭 고백에 성공하기를 바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