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도시여행자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노블마인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요시다 슈이치는 내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작가로 신간이 나오면 바로 구매하는 편이다. 도시 여행자란 다소 낭만이 깃들여진 제목, 그리고 마치 항공 우편을 받은 듯 한 표지. 표지를 살펴보면서 신초사 요시다 슈이치란 소인을 보면서 두근거림을 느끼고, 발신인에 적혀 있는 주소를 보면서 왠지 정말 요시다 슈이치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은 듯 했다.
겉표지를 벗겨 보자 책 목차에 실린 제목들이 때로는 영어로, 때로는 일본어 발음의 영어 표기로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또한 나중에 책을 다 읽고 나서 알게 된 것이지만 목차에 나온 제목뿐만 아니라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장소들 역시 표기되어 있었다. 물론 실제 지도와는 다른 지도. 그러나 누군가의 기억속에는 존재하고 있을 지도란 생각이 들었다.
낯선 거리와 도시, 혹은 낯익은 곳이라 할지라도 특별한 추억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냥 평범한 길이요 도시일 것이다. 그러나 좋은 추억이든 좋지 않은 기억이든 그곳을 떠올리게 할 무언가가 과거에 존재했다면 그곳은 더이상 평범한 곳은 아닐거라 생각된다.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취를 남긴 그곳. 그곳엔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누군가의, 혹은 나의 기억과 추억이 켜켜이 쌓여 있으리라.
도시 여행자라는 제목만을 봤을 땐 연작 단편집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의외로 책 원제는 마지막 단편인 캔슬된 거리의 안내였고, 여러 개의 도시가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도쿄, 오사카, 그리고 서울 정도의 도시가 언급될 뿐이었다. 그래서 생각과는 조금 다름에 약간 실망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역시 책을 읽으면서 그런 실망감은 비누 거품이 소리없이 사그라들듯 사라졌다.
총 10개의 단편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이름도 나이도 직업도 모두 다르다. 그들중에는 사랑을 시작한 사람도 있고,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기도 하고, 우연히 스쳐 지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교차되기도 한다. 또한 과거의 일을 회상하는 사람도 있고, 하루하루 힘겹고 지난한 삶속에서 신선한 경험을 하는 사람의 이야기도 있다. 오랜만에 만나는 오랜 지기와의 즐거운 만남을 묘사한 단편도 있고, 자신의 현재 삶과 과거를 교차시켜 보여주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야기들은 공통점이라곤 눈씻고 찾아 봐도 없어 보이고, 이야기의 결말은 단단하게 맺어져 있지 않고 여백을 남긴다. 다음 이야기는 직접 상상해봐.. 라고 말하듯이. 그래서 그런지 추리 소설처럼 ?인과 범행동기가 명료하게 밝혀지는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물에 물탄듯 술에 술탄듯 맹맹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독자에게 상상할 여지를 가득 안겨준다는 점이 무척이나 즐겁다.
어렴풋하게 상대에 대한 마음을 깨달은 두 사람은 과연 앞으로 어떻게 될까 라든지, 여행지에서 스쳐지나간 사람에 대한 기억은 그냥 예쁜 추억으로만 남을까.. 하는 그런 생각도 해 본다. 물론 이 책의 제목은 도시 여행자이지만, 여행 이야기는 분명 아니다. 대체로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 이야기이지만, 그런 평범한 속에 숨어 있는 축복과도 같은 어떤 순간을 보여주기도 한다.
우리는 매일매일 수많은 거리를 지나가고, 수많은 사람과 스쳐 지나가지만 보통은 그냥 그렇게 스쳐 지나가기만 할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수많은 평범한 날들을 보내지만 그 속에서 가끔은 평범치 않은 상황과 마주할 때도 있게 마련이다. 그러한 것들로 가득한 것이 바로 이 도시 여행자가 주는 느낌이랄까.
물론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나 행복으로 똘똘 뭉쳐있어요~~라는 느낌은 주지 않는다. 방황, 불안, 분노, 망설임등 부정적인 감정도 분명 존재하지만, 그 속에는 분명 안온함이나 평온함도 존재한다. 그리고 때로는 희망을 엿보기도 한다.
전반적으로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지만, 개인적으로 마음에 든 작품을 꼽으라면 나날의 봄, 영하 5도, 새벽 2시의 남자, 24 Pieces가 인상에 남는다. 특히 마지막 작품인 캔슬된 거리의 안내는 작가 자신의 마음속 이야기를 덧붙인 듯한 느낌을 받았다. 글을 쓰는 소설가로서의 자신을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에게 투영시켜 놓은 느낌이랄까. 작가로서의 고뇌나 창작의 힘겨움등을 조심스레 고백해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요시다 슈이치만의 감성과 절제된 표현으로 가득한 도시 여행자.
이 책은 한 곳에 정착해서 살고 있지만, 언제나 마음은 다른 곳을 표류하고 있는, 그러면서도 기억과 추억에 매달려 살아 가고 있는 오늘날 우리들의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