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지기가 들려주는 기이한 이야기
나시키 가호 지음, 김소연 옮김 / 손안의책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조금은 고루한 생각일지는 몰라도, 난 기담이라면 그 배경이 조금은 옛날이라야 그 맛이 더욱더 살아 난다고 생각한다. 지금처럼 낮이고 밤이고 환한 도시에도 도시 괴담이란 게 존재하긴 하지만, 역시 기담이나 괴담은 어스름한 달빛 아래, 삐걱대는 계단소리 뒤에 풍성한 자연 속에 숨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집지기가 들려주는 기이한 이야기는 약 100년전, 그러니까 일본의 연호로 따지자면 메이지 시대쯤이려나. 전기가 상용화되지 않은 시대이니, 그 정도로 생각하면 될 듯 하다. 화자인 와타누키 세이시로는 프리라이터로 죽은 대학 친구인 고도의 집에서 집지기 일을 맡게 된다. 그때부터 생겨나는 기묘한 일들.

이야기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봄... 이렇게 계절을 따라 흘러가면서 진행된다. 작품 내 소제목들은 각각 계절을 상징하는 식물들을 따와서 지어졌는데, 기담과 꽃 이야기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독특한 정취를 가져다 주었다.

매일매일 쓰다듬어 주니 자신에게 연심을 품은 배롱나무, 도코노마에 걸린 족자에서 튀어 나온 죽은 친구인 고도, 어느 날부터 눌러 살게 된 개 고로 등 등장하는 건 평범한 사람뿐 만이 아니다. 갓파라든지 여우 요괴, 너구리 요괴, 에비스의 형상을 한 수달 요괴, 벚꽃 요괴, 대나무 요괴 등 요괴도 다양하게 등장한다. 게다가 일본의 신화에 근거한 신들도 등장하니 이 소설속에는 평범한 인간이 아닌 이세계(異世界)의 존재들이 더 많이 등장하는 듯 싶다.

하지만 사람이라고 평범치만은 않다. 와타누키는 족자에서 죽은 친구가 나와도 놀라지 않고, 옆집 아주머니는 갓파라든지 수달 요괴나 벚꽃 요괴등에 대해 들어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게다가 너구리 요괴는 스님으로까지 변신을 하는데, 그 당사자인 스님은 너털웃음을 지을 뿐이다. 또한 고로 또한 평범한 개가 아니라 요괴들의 중개자로서 활약을 하고, 와타누키가 이세계에 떨어지지 않도록 지켜주는 역할도 하니 입이 떡 벌어질 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무척이나 신기했던 건 와타누키를 비롯해 옆집 아주머니, 스님, 그리고 후배인 야마우치는 와타누키기 만났거나 겪은 요괴나 신비한 일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들인다는 것이다. 현대인들이라면 헛것을 봤겠지라고 치부할테지만, 그때 사람들은 조금더 융통성이 있었나 할 정도로 이세계의 존재를 쉬이 받아 들인다. 아마도 자연과 가깝게 살아서 그러한 것들이 당연히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일까.

문명과 진보가 조금씩 인간 세상을 장악하면서 우리는 이제까지 우리와 함께 존재해 왔던 것들의 존재를 부정하고 안보려고 애썼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인간들이 삶의 영역을 확장하면서 더이상 그들은 인간 가까이 존재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분명 어딘가 깊고 깊은 산 속이나, 인간의 발이 닿지 않는 곳에선 그들이 여전히 존재할까.

사계절의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인간과 함께 존재해왔던 존재들의 이야기는 무섭고 괴이쩍다기 보다는 다정하고 따스하다. 특히 죽은 인간의 혼을 싣고 오는 너구리 요괴 이야기는 요괴에 대한 이미지를 깡그리 날려 주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옛날 요괴들은 인간과 가까이 살면서 인간에게 도움을 주었을지언정 인간을 해하는 존재는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현대 사회에서는 인간에게 인간이 가장 큰 천적이 되었으니 말이다. 

이 책에선 또한 흥미로운 점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바로 고도의 죽음과 관련한 것인데 고도는 호수에서 배를 타고 가다가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일본 이야기에서는 물은 이계와 연결되는 곳이란 이미지가 많은데, 역시 고도가 사라진 호수 역시 그런 역할을 한 듯하다. 이계의 음식은 함부로 받아 먹으면 안된다는 설정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도 본 듯 하다. 저승의 음식을 먹으면 다시는 이승으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설정이랄까. 여기에서는 포도가 그러한 역할을 하고 있다.

눈을 감으면 사계절 풍경이 바뀌어 가는 모습이 눈에 보일 듯 하다. 그 속에선 너구리 요괴도 여우 요괴도 에비스를 담은 수달 요괴도 갓파도 사람과 더불어 평안히 공존하고 있다. 비록 가끔 사람에게 장난을 치긴해도 직접 해는 가하지 않는 요괴들...  이제는 이렇게 이야기 속에서밖에 만날 수 없는 그런 존재들이 문득 그리워진다. 아니,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그들은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우리가 눈치채 주길 바라면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