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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구혜영 옮김 / 창해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숙명이란 단어는 운명보다 더 끈질기고 절대 피할 수 없다는 느낌을 준다. 운명은 때로 비껴나가기도 하고, 피할 수도 있지만, 숙명은 절대 그러할 수 없단 느낌이랄까. 원래부터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어떤 힘, 그게 바로 숙명이란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느낌이다.
여기에 두 남자가 있다.
한 사람은 유복한 가정의 장남이자 모든 것에서 뛰어나지만, 세상사에는 초연하다는 표정을 가지고 있는 아키히코이고, 한 사람은 경찰의 아들이자 역시 모든 면에서 뛰어나지만 늘 아키히코에게는 밀리는 듯한 느낌을 받는 유사쿠이다. 유사쿠는 아키히코를 어떤 식으로든 이기고 싶어 하지만, 왠지 아키히코에게는 늘 밀리는 느낌믈 받는다. 미묘한 학창시절을 보낸 두 사람. 그러나 그들의 운명은 고교 시대가 끝남과 동시에 끝난줄 알았지만, 그들은 10년뒤 발생한 살인 사건으로 재회하게 된다.
숙명은 추리 소설이라기 보다는 미스터리 소설이라고 보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용의자가 생기고, 진범을 찾기 위한 수사가 펼쳐지지만, 그 뒤에는 좀더 복잡한 어떤 것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20년전에 벌어진 한 여성의 죽음. 그것은 현재 일어난 사건과 무슨 관련이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아키히코와 유사쿠는 왜 끊어낼 수 없는 인연으로 이어지게 될까. 아키히코가 20여년전 그 병원에 나타났던 이유는 어느 정도 짐작을 했었고, 그것이 맞다는 걸 확인했지만, 역시 반전은 마지막 페이지에 있었다. 그것 하나로 모든 것이 싸악 정리되는 느낌이었달까. 책 제목인 숙명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었단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또한 표지에 실린 파울 클레의 그림의 제목인 <계획>. 난 표지 그림의 제목을 보고 무릎을 탁하고 치게 되었다. 이렇게 절묘할 수가. 신의 안배인지 인간의 계획인지는 잘 알수 없지만, 분명히 이 모든 건 보이지 않는 끈에 의한 계획대로 흘러간 것이었다.
추리 소설 - 살인 사건의 진범을 찾아라 - 의 맛은 떨어지지만, 미스터리로서의 장점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모든 것의 인과 관계가 밝혀지는 순간, 독자들은 깜짝 놀랄 수 밖에 없다. 물론 다르게 생각하면 이보다 더 억지스러울 수는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의 한 사람으로서 난 이런 설정도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을 보면 소재가 참 다양하다는 생각이 든다. 요번에는 의학 기술과 관련한 소재가 쓰였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중에는 뇌이식을 소재로 한 책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도 제목이 <변신>이었을 것이다. 여기에선 그만큼 복잡한 이야기는 없지만, 뇌의 어떤 부분을 자극함으로서 사람을 조종할 수 있는 기술에 대한 것이 언급된다. 인간의 뇌는 복잡하기 그지 없고, 뇌의 신비는 여전히 다 밝혀지지 않았다. 실제로 머리를 다쳐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기사를 몇 번 봤던 기억이 나는데, 뇌에는 인간의 감정을 조절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본서에 등장하는 인간의 감정과 행동을 인위적으로 조종하는 실험 행위는 분명 반인륜적인 처사이며, 그러한 실험은 없어야겠지만, 여전히 어딘가에서는 그런 실험이 실행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숙명은 다양한 소재를 하나로 결합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억지스럽다거나 말이 안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쩌면 어딘가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몰라.. 라는 그런 느낌이랄까. 한편으로는 추리 소설로는 약하고, 의학 미스터리로서는 부족한 점이 있을지는 몰라도 분명한 것은 재미는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1990년에 출간되었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중기작으로 생각한다면, 요즘 작품에 비해 어떻다는 등의 그다지 반감을 느낄 필요도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