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와 빨강
편혜영 지음 / 창비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조금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등장 인물 중 이름이 나오는 사람은 거의 없고, 시간을 가리키는 명확한 개념도 없었다. 그리고 왜 이 주인공이 그런 처지에 몰리게 되었는지에 대해 납득 또한 잘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남자가 있다. 그는 C나라로 파견된 직원이다. 그곳에 도착한 그는 전염병 검사를 받고 잠시 격리 조치된 후 풀려 나지만, 그가 일할 회사에서는 열흘 정도를 더 쉬라고만 한다. 그는 배정받은 숙소에 가지만 복도에 놔둔 트렁크도 잃어 버린 후 막막해지기 시작한다.

그가 도착한 곳은 C나라의 Y시의 제 4구.
그곳은 온통 쓰레기로 뒤덮여있다. 원래 쓰레기 매립지 위에 세워진 도시이지만 전염병의 확산으로 온 도시는 쓰레기로 뒤덮였다. 사람들은 패닉 상태가 되어 가게를 습격하고 전염병이 옮을까봐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도 거의 피한다.

애시당초 그는 왜 이곳에 오게 되었을까. 전염병이 발생하게 되면 파견이란 것 자체가 백지화되는 게 아닐까. 게다가 그는 C나라의 언어도 기초 수준으로밖에 습득하지 못한 상태이다. 유일한 접촉 상대인 몰이란 사람과의 연락 두절. 그리고 트렁크를 잃어버린 후 그는 기존의 자신과 연결되었던 것이 하나둘씩 끊어져가는 것을 느끼게 된다. 또한 모국으로 전화를 걸었을 때 그에게 들려온 소식은 전처가 살해당했다는 소식. 그는 기묘한 위화감을 느낀다.

재와 빨강은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암울하다. 한 남자가 서서히 밑이 보이지 않는 암흑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한없는 고독에 삼켜지는 걸 보아야 했다. 우리는 자신과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음식을 먹는 등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 곁에서 살면서 안정을 얻는다. 그런 속성을 가진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낯설어지면 불안에 떨게 되고 초조해짐을 느낀다.

게다가 남자는 아내살해 용의자가 되었다. 낯선 나라, 낯선 땅, 낯선 언어. 게다가 그와 과거를 연결했던 물건은 C나라에 오자마자 잃어버렸다. 그를 둘러싼 환경이 이제까지의 것과는 이질적이 되어 버린 것이다. 게다가 알 수 없는 전염병까지 유행을 한다.

남자는 도망을 치고 부랑자 신세가 된다. 쓰레기를 뒤지고 공원에서 잠을 자고 하는 등 이제까지의 삶은 없다. 노숙자끼리의 세력 다툼, 그리고 질병에의 노출. 그곳에서 인간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타인을 해하기까지 한다.

살해된 아내. 전염병의 창궐.
왠지 어울릴 법하지 않은 두 가지 이야기.
그러나 그것은 결과론적으로 같은 것을 도출해 낸다.
주인공인 남자를 고립시켰다는 것.

그러나 전염병은 늘 그러하듯 인간을 몰살시키기엔 약했다. 페스트, 스페인 독감, 홍콩 독감, 한타 바이러스, 에볼라 바이러스, 사스, 조류 독감, 신종 인플루엔자 등으로 끊임없이 인간을 위협하는 전염병 바이러스. 그러나 인간은 끊임없이 살아 남았다. 마치 완전히 박멸하기란 불가능한 쥐떼처럼. 그리고 지구 자체가 멸망하지 않는 한 인간은 계속 살아 남을 것이다.
부랑자가 되어 쓰레기를 뒤지고 살던 그가 맨홀밑에서 살아가다가 다시 세상속으로 나온 것 처럼.

그는 커다란 시스템 속의 한 부품으로 살다가 교체되었고, 버려졌다가 다시 재활용되었다.
우리 인간은 모두 그런 존재가 아닐까. 인간위에 존재하는 시스템의 부품으로 언제나 교체될 위협을 안고 살아가는 무명씨같은 존재.
주인공의 이름은 없다. 등장하는 인물중 유진과 몰은 이름이 있긴 하지만 유진은 세상의 수많은 유진 중의 하나일 뿐이고, 몰 역시 세상의 수많은 몰 중의 하나일 뿐.

재와 빨강은 주제 사라마구의 <눈 먼 자들의 도시>나 이사카 코타로의 <모던 타임스>를 문득문득 떠올리게 했다. 인간은 사회속에 살지만 결국은 고독한 존재이며, 커다란 시스템의 일부일 뿐이란 서글픈 현실. 난 이 책을 통해 보고 싶지 않았던 진실, 외면하고 싶었던 사실을 확인해 버린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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