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영혼의 길고 암울한 티타임
더글러스 애덤스 지음, 공보경 옮김 / 이덴슬리벨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구매할 때 구매를 확정 짓게 만든 요소는 일단 더글러스 애덤스의 책이란 것. 그리고 지나칠 정도로 흥미를 끄는 제목. 그리고 책 띠지에 씌어 있는 '가장 훌륭하게 정신 나간 추리 소설!'이란 문구였다.
오호라.. 더글러스 애덤스가 추리 소설을!?
이제껏 더글러스 애덤스의 소설이라고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시리즈 1~5권을 본 기억밖에 없기에, 굉장한 흥미가 생겨났다.
안내서 시리즈를 읽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정말 정신 사나우면서 한편으로는 연이은 폭소에 때로는 삐딱한 풍자까지 있어 읽는 내내 지겨울 틈이 없는 소설이다. 물론 코드가 절대적으로 맞아야 재미있는 소설이긴 하지만, 본인의 코드와 잘 맞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책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신줄 살짝 놓고 읽는 게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는 묘미가 있는 책이기도 하다.
안내서 시리즈에 비하자면 영혼의 길고 암울한 티타임은 지극히 정상적인 책으로 보인다. 물론 더글러스 애덤스의 톡톡 튀는 어휘 구사력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건 전개 등은 훌륭히 남아 있지만, 안내서 시리즈에 비하면 평범할 정도이다. 게다가 고맙게도 안내서 시리즈에 나오는 헉소리 나올 정도의 숫자도 나오지 않는다. (본인이 숫자에 약하므로...)
어쨌거나 전체적인 느낌은 무척이나 흥미진진했고, 즐거웠다. 마무리가 조금 약하단 게 흠이랄까. 하긴 워낙 사건을 방대하게 만들어 작가 자신도 수습하기가 좀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긴한다. (笑)
공항에서의 여직원 실종 사건, 그리고 목이 잘린 채 발견된 사체가 등장하면서 본격적인 추리 소설인가 싶지만, 역시 평범한 추리 소설이 갖는 진중함보다는 약간 가벼운 느낌은 든다. 게다가 갑자기 난데 없이 등장하는 북유럽의 신들!!! 어라라, 역시 더글러스 애덤스의 소설이 맞구나 하고 드디어 수긍이 간다.
오딘과 토르의 등장으로 추리 소설 + 판타지 + SF의 독특한 설정이 완전하게 갖추어 졌다.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괴이쩍고 수상쩍은 사건들은 하나의 연결점을 가지고 서서히 그 형체를 드러낸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탐정 더크 젠틀리의 능력(?)도 한 몫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타의 추리 소설처럼 탐정이 사건을 끝내주게 해결하는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오히려 신들의 문제에 인간이 개입한 것처럼 보이며, 결국 해결도 신이 하게 되는 것이다.
더크 젠틀리가 한 일은 의뢰인과의 약속에 늦어 의뢰인 살해 당하게 만들기를 비롯해서 코뼈 부러지기, 독수리에게 쫓기기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비참한(?) 상황을 연이어 마주하게 된 것뿐? 물론 그가 전체적인 사건의 흐름을 이야기해 주기는 하지만, 그것으로는 좀 역부족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은 든다.
하지만 모든 사건이 북유럽의 신들과 연결되어 있던 만큼, 역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적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신은 불멸의 존재였지만, 그건 오래전 이야기. 이 소설에 나오는 신들은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죽어가고 있다. 예전에는 천재지변이라도 일어날라치면 신을 먼저 찾고, 신이 내리는 벌이라 생각했지만 과학기술문명의 발달로 인해 우리는 그것이 단순한 자연재해임을 알고 있다. 즉, 현대 사회에서는 신들이 설 자리가 점점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신은 신이라는 자리를 버리고 은퇴하고 싶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신이란 사람의 믿음이 있는 곳에 존재하는 법이니까.
한 여성의 실종 사건과 한 남자의 살인 사건이라는 추리 소설의 요소에 북유럽의 신인 오딘과 토르를 등장시켜 신화와 결부시키고, 그것에다가 더글러스 애덤스의 특기인 SF적 요소를 적절히 혼합시켜 재미있는 추리 소설이 한 권 등장했다. 수식어 하나를 사용해도 더글러스 애덤스 표라고 특허를 내도 될 만큼 톡톡 튀는 어휘 구사력은 안내서 시리즈 만큼은 아니더라도 독자에게 허를 찔린 웃음을 터뜨리게 만들기에는 충분하다.
하지만, 살해당한 남자의 집에 있던 꼬마의 정체는 결국 밝혀지지 않았고, 엔딩 역시 두루뭉술하게 마무리되었다는 점은 역시 좀 아쉽다. 게다가 탐정의 역할이 시원찮았다는 것도 좀 아쉽다고나 할까. 하지만 역시 더글러스 애덤스의 소설의 백미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던 일이 나중엔 퍼즐 조각처럼 착착 제자리를 찾아 들어간다는 것이다.
엉뚱하면서도 기발하고, 웃음을 유발하면서도 현대 사회를 비스듬히 꼬집고 있는 더글러스 애덤스의 영혼의 길고 암울한 티타임. 이 책이 더크 젠틀리 시리즈의 2탄이라고 하는데, 아직 1편인 더크 젠틀리의 성스러운 탐정 사무소를 읽어 보지 못해서 무척이나 아쉽다. 과연 1편에서는 더크 젠틀리가 탐정다운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줄 것인지 무척이나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