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시체의 죽음
야마구치 마사야 지음, 김선영 옮김 / 시공사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이 책의 제목을 보고 먼저 떠올린 건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이란 영화였다. 제목 자체가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서 하나 더 연상되는 건 <새벽의 저주>나 <28일 후> 같은 좀비 영화였다. 보통 좀비라고 하면 시체가 부활한 것을 의미하며, 그들에게는 인간으로서의 징후는 모두 사라진채 동물적 본능(특히 식욕)만이 남아 있다. 게다가 비틀비틀 걸으며 제대로 죽이지 않으면 죽지도 않는 그런 이미지랄까. 

그러나, 이 책에 등장하는 살아 있는 시체는 그것과는 좀 다르다. 좀비와는 다른 특징을 보이기 때문이다. 사고 능력도 정신 능력도 살아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르지 않다. 다만 시체인지라 몸이 썩어 들어가지만, 생전의 육체적 한계를 가뿐히 뛰어넘는 능력을 보여 준다.

솔직히 말해서 시체가 살아 나서 돌아다니는 것도 무서운데, 사고 능력을 갖추고 있다니 이건 기절초풍할 일이다. 게다가 본인이 숨기면 주위 사람은 눈치채지 못한다는 것. 죽은 자의 부활이란 설정을 갖고 있지만, 기존의 좀비와는 다른 살아 있는 시체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 소설은 좀비 퇴치라는 것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면서 이야기를 진행시켜 나간다.

솔직히 이 책의 도입부는 좀 지겨운 편이었다. 이런 저런 설명이 계속 이어져 도대체 언제쯤 본문에 들어가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만큼. 하지만 본격적인 사건이 일어나기도 전에 주인공이 죽어 버렸다!? 그리고 부활했다. 살아 있는 시체로.

그리고 시작되는 의문의 사건들.
장례업을 업으로 삼고 있는 발리콘가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범인은 과연 누구인가. 그리고 그 속에 깊숙히 감춰져 있던 진실은?

이 소설은 살아 있는 시체가 탐정이 되어 이 사건을 풀어 나가는 구조로 되어 있다. 물론 형사가 등장하긴 하지만, 형사는 오히려 우왕좌왕하는 캐릭터로 이 소설에 있어서는 양념과 같은 캐릭터이다. 적재적소에서 웃음을 터뜨리게 만들어 주는.

이정도로 보면 좀 이상하지 않은가?
시체가 살아 나고, 그 살아난 시체가 탐정이 된다는 설정도 이상한데, 코믹한 요소까지 겹쳤다!?

사실, 죽음이나 살인과 같은 것은 무겁고 음침한 소재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죽음 뒤에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만, 사람은 불멸의 존재도 불사의 존재도 아닌다. 따라서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 소설은 그러한 죽음의 무겁고 억압된 이미지를 벗어나 죽음 자체에 대해 숙고하게 하는 책이다. 코믹한 요소가 뒤섞였다고 해서 죽음 자체를 가벼이 다루는 것은 아니다. 다만 죽음을 어떻게 보느냐에 중점이 맞춰져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책에서 재미있는 것들이 눈에 많이 띈다. 본문의 소제목은 책이나 음악의 노래 가사에서 따온 구절들이 많다.  그리고 그것은 대부분 죽음에 관한 것이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노래인 크림슨 크림의 <에피타프>란 노래의 가사가 나와 오랜만에 참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또한 본문 내용 중에는 영화 <텍사스 전기톱 연쇄 살인 사건> 이야기가 에둘러 표현되기도 하고. 영화 <13일의 금요일>의 제이슨도 언급된다. 여기서는 제임스의 죽은 쌍둥이 동생 제이슨이 할로윈에 살아나 살인극을 벌이는 것처럼 소문이 퍼져 있지만...(아름이 똑같다)
여기까지는 '음...이정도는 이해할 수 있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 <주문 많은 요리점>의 제목을 패러디한 <주문 많은 장의점 - 동부편>을 보고는 뒤집어지게 웃었다.

또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차량 추격전 장면에서도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시체가 운전하는 영구차와 또 다른 시체가 운전하는 핑크색 영구차, 그것을 뒤쫓는 경찰과 폭주족이라... 왠지 시체가 운전하는 영구차라 생각하면 무척 섬뜩할 것 같지만, 반대로 뒤집어서 생각하면 엄청 코믹한 요소가 된다.

이런 코믹한 요소와 더불어 발리콘 일족에게 닥친 죽음의 비밀을 풀어가는 과정이 적절하게 혼재되어 비록 700페이지 가까운 두꺼운 책일지라도 금세 읽힌다. (물론 도입부는 좀 지겹다) 게다가 사상 유례없는 살아 있는 시체 탐정이라니! 이런 특수성이 있기에 무척 즐겁게 읽히는 엔터테인먼트 소설같기도 하지만, 그 저변에는 죽음이란 것에 대한 고찰과 죽음을 대하는 인간의 본성과 숨겨진 두려움이 바탕으로 깔려 있다. 가벼운 터치로 진행되는 듯 보여도 절대 가벼울 수 없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코믹함  + 추리라는 장르로 절묘하게 엮어낸 저자의 필력에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저자가 참고했을 방대한 양의 자료에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가장 놀라운 것은 이것이 저자의 데뷔작이란 것이었다.

데뷔작답지 않은 탄탄한 스토리와 개성 강한 인물들, 그리고 독특한 설정은 이 책에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들 것이다. 죽음은 죽음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죽음이란 것은 또다시 새로운 생과 이어지는 순환을 반복하며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 돌아가는 것이다. 세상에는 살아 있으면서도 삶의 의욕을 가지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살아 있는 시체들이 많다. 죽어서도 삶에 집착하는 진짜 살아 있는 시체들과 살아 있으면서도 삶에 의욕을 갖지 않는 살아 있는 시체들, 당신은 어느 쪽의 살아 있는 시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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