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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이별 - 김형경 애도 심리 에세이
김형경 지음 / 푸른숲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에 책제목을 보고 고개가 절로 갸웃거려졌다.
이별에 좋은 이별이 어디 있어란 것이 원래 내 생각이었기에. 대부분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그럴 거라 생각한다. 이별은 슬픈 것이야. 이별은 아픈 것이야. 내게 이별이란 단어가 주는 이미지는 그런 식으로 연상되었다. 늘.
뭐, 가끔은 지긋지긋한 관계에서 놓여나는 상태가 되는 이별이란 것에는 속시원하다라는 느낌도 받았지만 말이다.
닌 감정 표현에 서툰 편이다. 그게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즐거워도 행복해도 잘 표현을 못한다. 마음이 아프고 괴로워도 표현을 잘 못한다.
그래서 좋아도 찡그리고, 아파도 찡그렸다.
그러다가 어느새 표정이 없어졌다. 아마도 사춘기를 지나면서 그게 좀더 가속화되었고, 긍정적인 감정 표현은 어느새 거의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 나의 상태를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분명 현명하지 못한 것이라 생각하지만, 어느 정도는 주변 분위기와도 상관이 있는 것임에는 분명하다. 한국인이란 것, 그리고 태생이 경상도란 것. 이 두 가지는 분명 나의 감정 표현에 있어 내 발목을 붙잡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이란 것도.
어릴 땐 속상하거나 마음이 아프면 눈물부터 나왔다. 그냥 엉엉 울면 되었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그것이 꼴불견으로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후로는 냉소적인 미소를 짓는 것으로 바뀌었다. 특히 연인과의 이별에 있어서는..
인간은 살면서 누구나 이별의 순간을 경험한다.
그것은 가족일수도 있고, 연인일 수도 있으며, 내 경우에는 키우던 강아지와의 이별도 포함된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잠시 떨어져 살아야만 했던 것이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상처가 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어린 시절 두 차례의 입원을 계기로 동생과 한동안 떨어져 있었던 것이 내 마음속에 상처로 남아 있었던 것인지는 몰라도, 난 사람의 온기를 그리워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누군가를 만나지 않으면, 누군가가 곁에 있지 않으면 한시도 참을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하기에 당연히 이별은 내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실제로 내가 누군가의 죽음이란 것으로 이별을 한 케이스는 크게 많지 않다. 아직 부모님께선 젊으신 편이고, 건강하시기 때문이며, 동생도 잘 지내기 때문이다. 조부모님의 경우 외할아버지는 내가 너무도 어릴 때 - 즉, 죽음이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나이 - 에 돌아가셔서 슬픔을 느낄 여유도 없었다.
하지만 20대 중반에 맞이했던 할어버지의 죽음과 30대 초반에 맞이했던 할머니의 죽음은 내게 충격이었다. 할아버지의 부고를 들었을 때, 처음엔 멍했다. 그러다가 시간이 얼마 지난 후 눈물이 끊임없이 솟아났다. 왠지 할아버지께 전화를 하고 싶었는데..... 라는 후회가 물밀듯 밀려 왔다. 그리고 몇 년후, 할머니의 부고를 들었을 때는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가 되었던 상태였던지라 그나마 받아들이는 것이 수월했다. 물론 울기도 많이 울었지만, 그나마 그전까지 할머니를 자주 찾아 뵈었던 게 큰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그 후에도 커다란 상실감은 크게 느낄수 없었다. 물론 두 분다 초장수를 누리셨다는 것이 내가 그 이별을 감당하는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된 것도 두 말할 나위 없는 사실이겠지만.
연인과 헤어질 때는 무척 힘들었다.
지금 내 나이가 서른 중반이니 연애 한 번 안해봤다면 말짱 거짓말이고, 여러 번의 연애와 여러번의 이별을 거쳤다. 처음엔 누군가와 헤어지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미친듯이 울고, 잡아 봤지만, 이미 끝난 건 되돌릴 수 없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나는 학교를 휴학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을 정도이니 그 충격은 내게 꽤나 컸던 모양이다.
연인과의 이별에서 난 여러 가지 패턴을 경험했다. 붙잡아 보기, 새로운 연애 하기, 도망치기, 착한 여자 되어 보기, 그리고 담담하게 받아들이기.
여러 가지를 써놓았지만, 각각이 다른 건 아니다. 대부분 두 세개가 연결되어 이별에 적응해 나갔다. 붙잡아 보다가 안되서 결국 헤어지면 애써 담담한 척을 했다. 누군가 그 사람 잘 지내라고 물으면 웃으면서 잘 지낸다고 했다. 난 그게 정답인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애써 착한 여자가 될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난 이별에 통 적응을 하지 못한채로 나이를 먹어 갔다. 헤어짐은 늘 아프다는 것을 뼛속 깊이 각인시킨채.
그러다가 20대 후반이 되면서 오랜 기간 사귄 연인과 헤어지게 되었을 때는 내 쪽에서 이미 이별 준비를 말끔히 마친 상태였다. 몇 년 내내 사귀면서 싸우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를 반복하는 동안 그 만남이 가져다주는 모든 것에 질려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이별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만난 시간이 길면 길수록 공유했던 것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함께 먹은 음식, 함께 간 곳 등등 생각보다 이별 후에 정면으로 바라봐야 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30대 초반 마지막 연인과 헤어졌다. 그때는 분노로 가득했다. 나를 속였던 사람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것을 진즉에 깨닫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분노. 사랑이라 여겼던 것이 모두 거짓같이 느껴져 매일매일 검은 오라를 내뿜었던 자신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에 걸쳐 이별 준비를 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의외로 간단한 해답이 있었다. 모든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긍정도 하지 않는다가 그 해답이었다. 너와 만든 추억은 다른 사람을 만나서도 만들수 있는 거에 불과하다라는 생각. 그게 내가 찾은 해답이었다. 그렇게 되니, 그 사람과 헤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한가닥 미련조차 남지않게 되었다. 오히려 속이 시원한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나이를 먹으면서 스스로 이별에 대처하는 방법을 스스로 익혀왔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별을 극복하는 방법은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 보는 것이다. 이별을 긍정하고 감싸안는 것. 무척이나 힘들지만, 의외로 시간은 잘 흘러가고, 감정은 무디어 진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해 왔던 이별의 패턴과 내가 이별에 대해 대처하던 여러 모습을 마주하게 되면서 쓴웃음이 지어졌다. 나도 참.. 바보같았구나하고.
이별하면서 착한 사람이 될 필요도 없었고, 누군가 대체할 사람을 만날 필요도 없었고, 자신의 껍질속에 몸을 움츠리는 달팽이가 될 필요가 없었다.
다만 현실을 바로 보고, 이별을 긍정하고, 마음을 다독이며 스스로를 더 사랑하면 되었다는 걸 조금 늦게 깨닫긴 했지만, 내가 이별의 리비도를 잘 받아들이고, 그걸 긍정적인 방향으로 잘 받아 들였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왠지 속이 개운해진 느낌이랄까. 지금도 가끔 나에게 괜찮냐고 묻는 사람이 있는데, 난 정말 괜찮다고 하는데도, 다른 사람 입장에서는 내가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젠 더욱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난 이별을 잘 극복했고, 그 에너지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환해서 잘 쓸고 있다고. 비록 책에서 제시한 것처럼 야외 활동같은 행동은 별로 하지 않았을지라도, 그것을 독서나 공부 혹은 다른 대체적고 긍정적인 활동으로 바꾸어 생활해 왔기 때문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은 비록 혼자라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충족감과 행복감이 충만하다.
이 책을 좀더 일찍 만났으면 이별에 대해 더 잘 대처했을텐데라는 아쉬움도 들지만, 그러나 앞으로의 인생을 생각해 볼 때, 내가 앞으로도 겪어야 할 수많은 이별의 패턴을 생각해볼 때, 지금에라도 이 책을 만난 것이 참 다행이라 생각한다.
왠지. 이제 더이상 이별은 두려워질 것 같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