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수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1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이규원 옮김 / 작가정신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내가 살고 있는 지방에는 수령 700년, 높이는 31m에 육박하고 그 둘레는 13m가 넘는 거대한 은행나무가 있다. 원래 위치에서 수몰 될 위험이 있어 지금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지만, 그 나무의 위용은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압도한다. 유구한 시간을 묵묵히 한자리에 존재해 왔던 나무들은 아무런 말도 없지만, 그 속에 품은 사연은 얼마나 많을까. 100년이상 그 자리에 존재했던 나무들만 봐도 인간보다 수명이 길다는 걸 감안할 때, 과연 700년이란 세월동안 그 자리를 지켜온 나무는 도대체 몇 세대의 인간들의 삶과 죽음을 보아 왔을까. 그 나무 그늘에서 더위도 식히고, 사랑도 고백하고, 또는 전쟁이나 자연 재해로 인해 죽어가는 사람들도 무수히 지켜 봤을 것이다.

인간보다 수명이 절대적으로 긴 나무들은 한 해 살이 혹은 다년생 식물들과는 달리 정령이 깃들여져 있을 것만 같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지만, 700년의 세월은 강산이 70번이나 변하는 것을 봐왔으니, 정령이 깃들어 있다고 해도 거짓은 아닐 것 같다.

천년수에 등장하는 나무는 녹나무이다.
녹나무라고 하면 난 이웃의 토토로가 먼저 떠오른다. 사츠키의 동생 메이가 작은 토토로를 따라가다가 떨어진 녹나무 안에 자고 있던 거대한 토토로는 정령의 일종이다. 그런 귀엽고 사랑스러운 이미지와 함께 한 녹나무는 천년수를 읽으면서 급속도로 반전되었다.

오기와라 히로시의 책은 아직 몇 권 읽지는 않았지만, 그의 입담과 유머로 시종일관 즐겁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천년수는 같은 작가가 쓴 작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무겁고 암울하다. 물론 벽장속의 치요에서도  거대한 나무가 숨기고 있던 비밀에 관한 단편이 나오지만, 그것의 분위기보다 몇 배나 더 어둡고 무겁다.

총 8편의 단편이 실린 이 책은 단편 하나 하나가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다. 연작 단편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는데, 모든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가 교차한다. 하지만, 그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도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시간을 뛰어 넘어 이어지고 있다.

맹아는 천년의 세월동안 살아온 녹나무의 탄생을 그리고 있다. 흔히들 벚나무 밑에는 시체가 묻혀 있어 벚나무는 그 시체를 자양분으로 싹을 틔우고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고 하지만, 여기에서는 이 녹나무가 그런 나무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여전히 그 녹나무의 싹을 틔우게 만들어준 아이와 그 아이의 부모의 영혼이 떠돌고 있는 듯 하다. 

유리병에 담아둔 약속은 2차 세계대전 말을 배경으로, 우듬지가 부르는 소리는 수 십년전 유곽에서 일했던 유녀의 이야기와 현대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매미 우누나는 막부시대 사무라이의 이야기가, 밤에 우는 새는 산적의 이야기와 현대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뻐꾸기 둥지는 녹나무 근처에 있는 작은 연못에 관한 전설과 과련된 이야기이고, 할매의 돌계단은 할머니의 추억과 관련된 이야기가 현대의 이야기와 교차 서술된다. 마지막 단편인 낙지는 천년을 지내온 나무의 마지막을 이야기하고 있다.   

아주 오래전 이야기부터 할머니의 이야기까지, 굉장히 긴 시간을 아우르고 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사고 방식은 그다지 변함이 없어 보인다. 과거의 일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그 모든 것을 이 녹나무는 묵묵히 지켜 보아 왔다. 변함없이 그 곳에서.

이 책을 읽으면서 난 누가 이런 이야기를 우리에게 해주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녹나무가 우리에게 자신이 본 것을 이야기 해주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그것보다는 우리가 녹나무 자체가 되어 사람들에게 일어났던 일을 보고 있는 느낌이라는 게 더 맞는 것 같다. 모든 이야기는 아무런 감정 없이 사람들의 생과 사를 보아왔던 녹나무를 통해, 바로 내게 전달되는 느낌이랄까.

비록 저자는 모든 이야기의 결말을 굳이 언급하지 않았지만, 과거의 일을 미루어 볼 때 그 결말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오히려 서술을 간략화함으로써 우리의 상상력을 더욱더 부채질 하고 있는 작가의 필력은 경외심을 갖게 한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 밀려오는 서늘함.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무들에게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비밀이 몇 가지 쯤은 숨겨져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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