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일 주일 - 제9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전수찬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6월
평점 :
품절



 서로 통한다는 말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말이 잘 통하는 경우와 마음이 잘 통하는 경우.
전자의 경우, 즐겁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러나 깊이는 없다.
후자의 경우, 즐겁게 대화를 나눌 수 있고, 깊이도 있으며, 든든하기도 하다.
당신에게는 당신과 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십니까?

<어느덧 일주일>은 사람 사이의 소통을 소재로 씌어진 소설이다.
우리는 타인과 한없이 가까워지길 원하면서도, 또 반대로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기도 원한다.
사실상, 어른이 되어 가면서 사람들과 가까워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서서히 깨닫게 된다.

어린 시절은 그전 순수하게 받아 들여졌던 일도, 어른이 되면 자꾸만 거리를 두게 된다.
이해의 폭은 점점 좁아지고, 그만큼 거리가 생긴다.
그렇다고 거리가 불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상대를 전부 이해할 수 없는 이기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준태와 기연은 사실 불륜 커플이다.
기연의 남편이 남도로 떠난 일주일동안 이 둘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서로를 갈구하면서도 어차피 가지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기연은 남편이 있는 여자이니까.
또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준태와 기연은 겁을 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타인을 자신의 영역 깊숙히 끌어들인다는 행위 자체는 자신을 그만큼 드러내고 보여줘야 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으니까.

준태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아버지와의 소통을 어려워하고, 기연은 남편과의 소통이 어렵다. 자연스레 서로 결핍되어 있는 부분이 톱니처럼 딱 맞아 떨어져 서로 편안한 관계가 되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바뀌면 어떻게 될까.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새로운 소통 관계의 출발을 암시하는 문장으로 끝난다. 어떻게 보면 소설 전반적인 내용에 비해 급선회한 결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소설은 주인공인 준태와 기연의 이야기도 하고 있지만, 그외에도 세상은 수없이 많은 소통의 단절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 준다. 노숙자 아저씨의 상대없는 고함과 삿대질, 일부 빗나간 종교인들의 외침, 조합원들의 농성...
이 모든 것은 세상을 향해 부르짖는 행위이지만, 정작 자신에게 돌아오는 건 메아리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은 완전히 소통이 단절되는 것만을 보여주고 있지는 않다. 준태는 기연의 오빠와 조금이나마 소통을 하게 된다. 대학 입학 후 스스로의 울타리에 갇혀 버린 한 남자와 아버지와 소통을 하지 못해 무거운 마음을 가진 남자의 소통. 이것은 두 남자가 아버지란 존재와의 사이에서 느끼는 소통의 단절에서 오는 결핍에 대한 상처 핥아주기로 보인다.
기연의 오빠는 지나친 기대를 하는 아버지로 인해 마음을 닫아 버렸고, 준태는 아버지와의 나이 차이 때문에 서로 소통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가족들과의 소통이 가장 원할할 것같지만, 그렇지 않은게 현실이다.

가족이란 작은 울타리, 그리고 사회라는 큰 울타리를 아우르며 사람들 간의 소통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어느덧 일주일>은 가볍게 읽히면서도 묵직한 주제를 담아낸다. 하지만 암시적으로 드러난 결말이 언제나 좋은 결과를 가져 온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래도, 우리는 그 결과가 어떻든 사람과의 소통에 있어서의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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