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제목부터 눈길을 확 잡아 끈다.
나를 파괴할 권리.
나를 스스로 죽일 권리.
내 목숨을 스스로 끊을 권리.
즉 자살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그런지 전반적으로 내용은 음울하고 어둡고 차갑다.

책장을 넘기면 우리는 세장의 그림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과 구스타프 클림트의 <유디트 1>, 마지막은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의 죽음>이다. 이 세 가지 그림은 모두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 누군가를 죽인 사람, 학살의 현장 등 모든 그림은 죽음과 관련되어 섬뜩하고 기묘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름다워 보인다. 특히 클림트의 <유디트 1>의 경우에는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른 후 그 머리를 손에 든 유디트의 표정이 황홀하기까지 하다.
내가 그림에 대해 먼저 언급한 것은 이 책에 나오는 소제목들이 이 그림들의 제목을 그대로 따왔거나 등장인물의 별명처럼 쓰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등장 인물은 많은 편은 아니다.
일단 책 해설에서 언급된 명칭인 '자살안내자' 혹은 '자살 청부업자'라 일컬어지는 나와 형제인 K와 C, 형제 사이를 왔다 갔다 하던 여자 유디트(세연), 그리고 형인 C와 미묘한 접점을 가졌던 여자 미미, 그리고 자살 안내자인 <나>다 유럽에서 만난 홍콩 여자가 전부다.

그리고 이 소설은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바로 소설 속에 또다른 이야기가 존재한다. 그것은 자살 안내인인 <나>가 <나>의 앞에서 자살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소설처럼 작성한 것으로 이런 것은 액자형 소설의 전형적인 모습이나, 구조는 단 이중 구조일뿐이라 복잡하지는 않다. 오히려, 본 이야기와 본 이야기속에 등장하는 소설이 교차되어 나오는 것이 읽는 재미를 더해주었다. 

<마라의 죽음>은 소설의 화자인 <나>란 존재에 대한 이야기이다. 고객을 찾는 방법, 그리고 그 고객을 완전한 자살로 이끄는 자신의 이야기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유디트>의 경우 형제인 K와 C 사이에 머물던 여자 유디트(세연)에 대한 이야기로, 그녀는 원래 동생K의 여자였지만, 결국 C를 택한다. 그녀가 C를 선택한 이유는 그녀 자신만이 알겠지만, 그녀는 C에게 구원을 원했다. 하지만, 철저하게 이기주의자인 C는 그녀의 눈빛을 외면한다.

<에비앙>에서는 유디트(세연)의 이야기와 홍콩여자의 이야기가 번갈아 가면서 반복된다. 여기에서는 유디트(세연)의 마지막 모습이 담겨 있는데, 그녀는 결국 스스로를 파괴할 권리를 누렸다. 

<미미>의 경우 행위예술가로 이름을 날리는 한 여자와 C의 이야기이다. 그녀는 C에게 어떤 구원을 바랐다. 그러나 C는 미미 역시 외면하고, 자신이 작업한 화면속의 미미에게만 푹 빠져있다. 그에게 있어서 실체보다 그런 영상속의 존재가 훨씬 더 가치가 있었을런지도 모르겠다. 끝까지 이기적이며 나르시시스트인 C. 그에게 구원을 바라는 건 애초부터 무리였을지도 모르겠다. 

<사르다나팔의 죽음>은 미미의 마지막을 기록하고 있는 부분이다. 결국 그녀도 아무런 구원을 받지 못한채 스스로를 파괴해 버렸다. 그것만이 자신이 마지막으로 누릴수 있는 권리인양.

자살을 도와주는 사람과 자살하는 사람. 
이 소설의 화자인 <나>는 타인들에게 자살에 대한 환상을 주고 부추김을 하며, 자살의 길로 이끄는 사람이다. 하지만, C는 결국 세연과 미미라는 두 여자가 자살을 마음 먹게끔 만든 장본인이다. 물론, 그가 그녀들에게 자살에 대한 환상을 심어준 것은 아니다. 그는 어떻게 보면 방관자이지만, 그 방관이 그녀들의 자살에을 결심한 가장 큰 이유였다.

작품을 읽으며 내내 우울했던 건, 왜 그녀들이 하필이면 C와 같은 사람에게서 구원받기를 원했냐는 것이다. 그녀들이 좀더 다른 선택을 했다면, 그녀들은 자신을 파괴할 권리가 아닌 자신을 지킬 권리를 누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작중 화자는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인지, 아니면 환상속에서 속삭이는 악마인지 분간이 잘 안간다. 실제로 여행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집에 머물렀던 흔적을 지우고, 사람들이 자신을 파괴하는 순간을 지켜보고 그것을 기록하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실존하는 사람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 그가 인간이든 악마의 하수인이든- 그녀들의 마음속에는 이미 밝은 희망의 빛이라곤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스스로 구원하지 않고, 남에게 기대서 구원을 바라는 마음 속에서 이미 그 희망의 빛은 싸그리 사라져 버린 게 아닐까. 그리고 그는 그러한 사람들을 찾아 죽음의 길로 종용하는 것이다. 마치 사냥감을 찾아 헤매는 사냥꾼처럼. 그리고 사냥꾼이 한번 점찍은 사냥감은 결코 그 손아귀를 빠져 나가지 못하리라.

그러나 사냥꾼이 아무리 눈빛을 번득이고 있다 해도,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그의 화려한 언변도 우리들이 품고 있는 한가닥 희망의 불씨마저는 꺼뜨리지 못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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