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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 이야기
모리미 도미히코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수첩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여우.. 라고 하면 어떤 것이 생각나는가.
우리는 여우라고 하면 보통 구미호를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일본은 구미호는 아니지만, 여우불이나 여우 요괴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일본 역시 여우에 대한 이미지는 그다지 좋지 않은 모양이다.
사실 여우는 꾀가 많은 동물이고, 사람이 사는 곳 근처에 사는 동물이라 더욱더 기담이나 요괴이야기의 소재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모리미 도미히코의 <여우 이야기>는 내가 읽었던 그의 전작들과는 너무나도 다른 느낌이었다.
제일 처음으로 읽었던 <달려라, 메로스>를 비롯해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나 <태양의 탑>은 망상과 청산유수같은 달변으로 나에게 쉼없이 웃음을 터뜨리게 했었다. 그러나, 이 책은 그 책들과 너무나도 느낌이 달라 깜짝 놀랄 정도였다.
차분하게 진행되면서도 섬뜩한 공포와 전율을 전해주는 이 책은 1,000년 이상 일본의 수도였던 교토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교토라고 하면 왠지 일본의 옛역사를 떠올리게 해주는 곳이라 이런 기담이란 소재와 딱 어울려 떨어지는 느낌이다.
이 책에는 표제작 여우 이야기 이외에 3편의 단편이 더 실려 있다. 어찌 보면 다 다른 이야기로 보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연작 소설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이 소설집은, 교토에 있는 한 골동품 가게 방련당과 여우탈을 쓴 남자, 그리고 짐승의 얼굴을 하고 있으며 몸뚱아리는 길고 긴 요괴같은 존재가 겹치며 등장한다.
모든 이야기의 시기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이 소설속에 나오는 모든 등장 인물들의 관계는 묘하게 겹쳐지고 있다. 하지만, 이 소설집 속에 나오는 일들이 시간상으로 순차적으로 이루어진 것인지, 아니면 뒤죽박죽 섞여 있는지도 불분명하다.
그러나 제일 불분명한 것은 이 일들의 배후에 있는 존재와 그 결말이다.
환등속에 등장한 그 요사스러운 생김새의 존재는 요괴로도 불리고, 마(魔)라고도 불리지만 확실한 언급은 피하고 있다. 또한 여우탈을 쓴 남자의 존재와 그가 불쑥 나타나는 마츠리와의 관계도 솔직히 말해 어떤 연관성을 가지는지는 불분명하다. 방련당의 주인의 정체도, 마지막 이야기에 나온 할아버지의 존재와 성대한 연회의 비밀도 마찬가지이다.
읽으면서 궁금증은 더욱더 증폭되고, 그 결말이 궁금해지지만, 저자는 결말 또한 확실하게 내어 주지 않는다. 어찌보면 그게 답답할 수도 있겠지만 - 확실한 결말을 좋아하는 독자에게는 -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모든 기담의 소재가 되는 것은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존재나 사건이다. 그렇기에, 그러한 것은 결말을 확실하게 내지 않으면서, 독자의 상상력을 최대로 끌어올리게 하는 작가의 배려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하기에 내가 책에 더 몰두하게 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으면 실제로 교토의 옛길을 따라 걷고 있는 자신이 느껴진다.
어슴푸레한 달빛, 고즈넉한 풍경, 그리고 조용한 거리에 자신의 발자국 소리만이 들려온다.
그러나, 왠지 누군가 저 어둠속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고, 누군가 나를 살며시 따라오는 것 같다.
그 느낌은 점점 구체화되어 내 몸을 둘러싼 공기가 끈적끈적하고 축축하고 비릿해져 간다.
처음엔 가벼운 기담이야기로 생각하며 읽었다가 점점 책의 내용에 몰입할 수록 그 모든 이야기는 내 마음 속에서 실체화 되어 간다.
이 이야기는 결코 끝나지 않은채 지금도 교토의 어느 곳에서인가 계속 이어질듯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