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걷다 ㅣ 하다 앤솔러지 1
김유담 외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9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늘상 다니던 길이라서 더 모를 때가 있어요.
발걸음을 재촉하며 걸을 때가 많거든요. 그러다가 문득 느긋하게 걷는 날에는 '원래 이 길이 이랬던가?'라며 다시 보게 되더라고요.
눈앞에 있어도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길을 주면 달라지듯이, 소설은 무심코 지나쳤던 세상을 저배속으로 바라보게 만드네요. 어느 길 위에서 스쳐 지나갔을 누군가의 이야기, 어쩌면 나의 이야기일지도... 더딘 걸음, 느린 속도에 속이 터지다가도 그게 아니었다면 놓쳤을 순간들을 생각하면 우리에겐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필요해요.
《걷다》는 열린책들 하다 앤솔러지 시리즈 첫 번째 책이에요. 동사 <하다>를 주제로 우리가 하는 다섯 가지 행동, 즉 <걷다, 묻다, 보다, 듣다, 안다>에 관해 스물다섯 명의 소설가가 함께한 단편소설집 시리즈라고 하네요. 이번 책은 '걷다'를 주제로 쓰여진 김유담, 성해나, 이주혜, 임선우, 임현 작가님의 단편을 만날 수 있어요. 김유담 작가님의 <없는 셈 치고>에서는 아픈 고모를 챙기는 조카딸 선화의 이야기인데, "그보다 더 쓰라린 건 마음인지도 몰랐다." (42p), "모른 척하는 일이 더 아프게 느껴져서..." (43p)라는 두 문장으로 요약되네요. 딱 한 번 등장하는 화자의 이름은 '선화'인데, 그 이름이 나오는 장면에서 마음이 짠해졌어요. 가질 수 없는 마음이란 슬픔일까요, 아니면 절망? 그냥 없는 셈 치는 게 가능한지 모르겠네요.
성해나 작가님의 <후보(後步)>에서는 퇴행성 관절염을 앓는 근성에게 의사는 산책을 권했어요. 뒤로 걷는 것이 관절에 무리가 덜 간다는 조언이 떠올라 조심스레 뒤로 걷는 근성은 모든 게 뒤로 흘러가는 풍경을 보다가 문득 세실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네요. "혹시 재즈 좋아하세요?" (78p) 만약 세실에 내게 물었다면, 좋아질 것 같다고 말해줄 것 같아요. 재즈가 듣고 싶은 밤이네요.
이주혜 작가님의 <유월이니까>는 그들이 그토록 기다렸던 유월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네요. 그 사건 이후로 달라진 삶, "이제 곧 유월이야." (113p)라는 말이 유난히 슬프게 느껴지는 건, 펄럭이는 방패연을 든 남자와 트랙을 돌며 뛰고 있는 여자, 그리고 그 뒤를 좇아 뛰는 남자의 마음을 알기 때문이겠지요.
임선우 작가님의 <유령 개 산책하기>는 유기견인 열세 살의 영국코커스패니얼 '하지'에 관한 이야기예요. "하지야, 왜 나에게 돌아왔니? 왜일까, 왜 돌아왔을까?" (126p) 그 이유가 뭔지, 너무 환히 잘 보이네요. 어라, 나만 보이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 눈에도 보였다는 게 완전 반전이네요. 어쩌면 이것이 사랑의 힘인지도 모르겠네요. 충분히 사랑해주지 않았다고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만큼 그리웠던 거죠. 하지는 진짜 착한 개였나봐요.
임현 작가님의 <느리게 흩어지기>는 혼자 사는 명길의 산책 이야기예요. 글쓰기 모임에서 유독 살갑게 구는 성희는 명길에게 자꾸, "언니는 알죠? 언니는 이해하잖아요." (166p)라고 말하지만 명길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요. 산책을 하다가 낡고 허름한 수첩을 발견했다면 주워서 펼쳐 볼까요, 아니면 그냥 지나칠까요.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그야 펼쳐봐야 알 수 있지요. 직접 겪어봐야 안다는 말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