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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카페에서 작가를 만나다 1 - 혁명.이데올로기 편 ㅣ 철학카페에서 작가를 만나다 1
김용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6년 12월
평점 :
철학자 김용규의 철학 카페에서 인문학 콘서트가 열립니다.
초대손님은 시인 김선우와 소설가 김연수입니다.
이 책은 혁명과 이데올로기라는 주제를 통해 시민으로서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이야기합니다.
똑같은 단어도 어떤 시기에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먼저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라는 낭독 공연을 보면 크레온 왕에게 하늘의 법을 내세워 저항하다가 끝내 죽음을 맞이하는 안티고네를 만나게 됩니다. 크레온 왕의 조카딸이자 며느리가 될 그녀는 반란을 일으켜 역적으로 몰린 오빠의 장례를 치름으로써 신의 법을 따릅니다. 결과적으론 왕의 법을 어긴 것이지만 이에 앞서 그녀는 옳다고 여기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로 인해 다가올 불행을 당당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저자는 안티고네를 통해 시민불복종과 직접행동의 지침이 된다고 설명합니다.
강연에서는 알랭 바디우, 슬라보예 지젝, 데이비드 그레이버와 같은 학자들이 구상하는 21세기의 혁명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여기에서 포스트 안티고네가 등장합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저항의 목적과 방법이 더욱 일상적이고 다양하게 확장된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2002년 영화배우 마틴 쉰이 내레이션을 맡은 다큐멘터리 <독재자를 무너뜨리는 법>이 미국 PBS에서 방송되면서 유명인사가 된 포포비치를 들 수 있습니다. 포포비치는 자신이 개발한 '웃음행동주의'에 바탕을 둔 다양한 아이디어와 비폭력적인 저항 전술을 전파함을써 전 세계의 시위 문화를 비폭력적으로 바꾸는 역할을 했습니다. 지금 이시간에도 대한민국에서는 시민불복종과 직접행동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불평등을 야기하는 모든 법률, 제도, 명령, 관행에 대한 끊임없는 저항이야말로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필수 요소입니다.
저자는 현대 자본주의 경제의 탐욕적인 성격과 폭력성을 '몰아세움'과 '닦달'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합니다. 이는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가가 현대 과학기술의 특성이라고 규정한 '몰아세움'과 '닦달'이라는 용어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자유화를 원칙으로 세계화되면서 전세계의 환경과 인간을 극단으로 몰아세우고 닦달하여 그것들을 오염시키고 파괴합니다. '하면 된다'는 이데올로기가 최상의 가치가 되고, 이러한 긍정성이 과잉인 사회가 우리를 점점 더 극단적인 자기 닦달로 몰아가고 급기야 설정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 개인은 좌절감, 자기상실에 빠지게 됩니다. 지젝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내재적 모순과 구조적 불균형에서 오는 한계와 무능력이 드러날 때마다, 즉 점점 더 "썩을수록"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바꾸는 혁명화 작업을 한다고 합니다. 바로 썩을대로 썩은 한국 사회의 모습이야말로 혁명의 도래기를 맞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혁명은 필요에 의한 변신 작업입니다. 그런데 왜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금기어로 인식된 것인지 참으로 답답합니다.
시인 김선우와의 대담에서 '일상이 혁명이다. 모든 순간이 혁명이다'라는 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특히 김선우 시인의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에 실린 <사랑에 빠진 자전거 타고 너에게 가기>라는 시는 혁명을 이토록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구나라는 걸 알려줍니다.
"....사랑에 빠져서 정말 좋았던 건 세상 모든 순간들이 무언가 되고 있는 중이었다는 것..." (217p)
우리에게 소중한 건 일상에 있습니다. 이러한 일상에 비해 이념이니, 혁명이니, 이데올로기니 하는 것들은 얼마나 끔찍하고 부질없는 것인지.
원래 이데올로기라는 용어는 긍정적인 의미로는 이념 또는 사상, 부정적인 의미로는 허위의식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역사와 현실을 왜곡 또는 전도하여 만든 허구적인 이념과 사상'을 가리키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려되는 건 정치이념을 이데올로기로 몰아가는 세태입니다.
모스크바 재판을 다룬 아서 쾨슬러의 장편소설 <한낮의 어둠>이라는 낭독 공연을 소개한 것은 이데올로기가 어디서 어떻게 생겨나고, 무엇을 하며 어떻게 극복하는가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김연수 작가의 <밤은 노래한다>는 이데올로기에 갇혀 희생된 사람들과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혁명가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혁명가들의 비극은 그들의 목적이 사악하지 않고 오히려 숭고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자신들은 진리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는 굳은 믿음이라서 더 처절하고 끔찍합니다.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저자는, 밤이 오면 횃불을 켜듯이 이제는 혁명을 일으켜야 할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혁명가가 되어어 한다고, 그것이 시대적 소명이라고. 다만 이데올로그로서의 혁명가가 되어선 안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문제는 언제나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므로 어떻게 하면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지 않는 혁명, 이데올로기에 함몰되지 않는 혁명을 수행할 것인가에 주목해야 합니다.
소설가 김연수는 <밤은 노래한다>에서 마지막 장면이 도스트옙스키적인 해결책이냐는 저자의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 찝찝한 거죠. 찝찝함에도 불구하고 살려둔 거죠. 그게 제가 생각한 해결책이었습니다. 어디서 그걸 직관적으로 깨달았는가 하면요. 입체 사진을 봤는데 두 개가 핀트가 안 맞잖아요? 다른 부분들이 존재하고 있죠. 그걸 렌즈로 들여다보면 두 상이 합쳐지면서 입체가 생기는 거죠. 약간 다르다는 것의 찝찝한 느낌, 이런 게 같아지면 모노로 딱 또렷하게 보일 텐데 하는 찝찝함을 놔두고 견디는 것 자체가 이 세계의 어떤 깊이를 주는 게 아닐까, 그때부터 해결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됐어요.
예를 들면 이분법 같은 거나 양자택일하는 문제들, 어릴 때 많이 물어보잖아요?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이럴 때 대답을 하지 말자는 해결책을 발견하고 난 뒤에 알게 된 거예요. 어떤 사람이 나에게 '이걸 할 건가? 저걸 할 건가?' 할 때 두 개 다 하는 게 정답이더라고요. '국제주의냐, 민주주의냐'라고 했을 때 같이 하는 대신에 찝찝함을 견디는 거죠. 한쪽이 깨끗해지는 건 없다는 거죠. 아까 생각하기에 그 견디는 게 남을 위해 참는 거잖아요? 싹 없어졌으면 좋겠는데 참는 것.
<한낮의 어둠>의 마지막 구절에 나오던 배 밑의 짐, 그 윤리하는 것, 그렇게 꼴 보기 싫은 것들을 나한테 큰 해를 안 끼치는 한에서 참고 견뎌주는 것이 윤리가 아닐까라는 제 생각이었습니다." (393-394p)
이보다 더 적절한 답변이 또 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개인으로서 또는 시민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한낮의 어둠을 이겨내고 밤을 노래할 수 있는 힘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