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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중간의 집 ㅣ 사건 3부작
가쿠타 미츠요 지음, 이정민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일본 소설을 읽다보면 한국의 정서와 너무나 흡사해서 놀랄 때가 있습니다.
여자에게 있어서 결혼은 왜 희생이 강요되는 것일까요?
아무리 양성평등을 외쳐도 여전히 여성에게 강요되는 역할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아내가 되고, 며느리가 되고, 아이의 엄마가 되는 것이 행복이 아닌 족쇄가 될 때...
<언덕 중간의 집>은 전업주부로 살아가는 두 여성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소설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현실적인 심리 묘사가 돋보입니다. 어린 자녀를 둔 엄마들이라면 백퍼센트 공감할 정도로 소름돋는 이야기.
같은 여성이라도 미혼이거나 손주를 둘 정도로 나이든 사람이라면 쉽게 공감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똑같은 아픔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에게 아픔을 설명하기란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그 아픔에 공감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일지도...
리사코는 4년 전 스물아홉 살 나이에 결혼하여 세살배기 딸아이를 둔 전업주부입니다. 결혼 당시 리사코는 일을 그만둘 생각이 없었는데 결혼 후 곧바로 임신하여 심한 입덧과 빈혈 때문에 아기가 걱정되어 직장을 그만둡니다. 그 후 3년 동안 몇 번이나 그때의 선택을 후회할 정도로 육아로 인한 스트레스가 심했습니다. 하지만 요즘 들어 그 시기를 견뎌내며 아이 곁에 있기를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남편 요이치로는 평범한 회사원으로 퇴근이 늦는 날이 많지만 일찍 퇴근하면 딸 아야카의 목욕을 시켜주는 자상한 아빠입니다.
평범한 리사코의 일상을 깬 것은 바로 형사재판의 보충 재판원으로 선정된 것입니다. 작년엔가 재판원 제도 공문이 온 것을 반송하지 않는 바람에 수락한 것으로 간주된 것입니다. 어린 아야카 때문에 걱정하던 리사코는 어쩔 수 없이 아이를 시댁에 맡기고 공판에 참석합니다. 오랜만에 공들여 화장하고 옷을 차려입고 나선 리사코는 묘한 기분이 듭니다. 그런데 그녀가 담당하게 된 사건은 영유아 학대 사건입니다. 도쿄 도내의 삼십 대 여성이 물 받은 욕조에 생후 8개월 된 딸을 떨어뜨렸고 퇴근한 남편이 발견하여 구급차를 불렀지만 딸은 이미 사망한 상태였습니다. 그녀는 아기가 울음을 그치지 않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떨어뜨렸다며 사고가 아닌 고의성을 인정하여 살인죄 혐의로 체포됐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미즈호.
검사의 설명에 따르면 미즈호는 몹시 악독한 여자인 반면, 변호인의 설명에 의하면 그녀는 매우 가엾고 연약한 엄마라서 오히려 남편 쪽이 피고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법정에서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양쪽의 의견은 이렇게 달랐고 리사코를 포함한 재판원들은 공판 과정에서 각자 의견을 나누게 됩니다. 리사코는 자신의 아이를 죽인 미즈호를 끔찍하게 바라보면서도 점점 미즈호에게 자신을 투영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살해를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 미즈호가 겪어야 했던 고통과 외로움에 공감한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미즈호는 누구나 부러워할만한 멋진 집에서 예쁜 아기를 키우는 평범한 주부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벌어졌을 비극이라는 것. 미즈호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는 것. 공교롭게도 미즈호의 집은 리사코가 열심히 돈을 모아서 언젠가 살고 싶었던 집이었습니다. 상상으로나마 그 집에서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그렸는데 이젠 더이상 상상할 수 없습니다. 리사코는 피고를 심판한 것이 아니라 줄곧 자신을 심판하고 있었습니다. 미즈호가 저지른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녀 역시 피해자였음을 생각하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리사코는 미즈호를 통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결혼과 동시에 아내로서, 엄마로서, 며느리로서 사느라 '나'는 없었던 삶. 남편 요이치로에게 빼앗긴, 아니 스스로 얌전히 던져버린 자아.
겨우 열흘 간의 재판이었지만 리사코는 새로운 자기 자신을 마주하게 됩니다. 책을 덮으며 리사코를 응원했습니다. 그리고 나를 위해 응원했습니다.
* 이 소설에 나오는 매우 현실적인 며느리와 시어머니 간의 에피소드 (181p)
... 웬만해서는 감기도 걸리지 않는 내가 그만 열이 나고 말았다. 요이치로를 출근시키고 나서 열을 재니 38도나 되었다. 아야카에게 옮을까봐 걱정되면서도 바로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아이에게 애니메이션 DVD를 틀어준 채 리사코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파에 누워 있었다. 그때 시어머니가 전화를 걸어 왔다. 용건이 무엇이었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리사코는 자신이 열이 나서 누워 있다고 전했다. 아야카를 돌보러 와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어머, 열이 난다고? 감기가 왔나 보구나. " 그러면서 시어머니는 내가 가서 밥해주마. 라고 덧붙였다.
"괜찮아요." 리사코는 사양했다. "아이 점심 정도는 그럭저럭 해 먹일 수 있어요. 저는 식욕이 전혀 없고요."
"아니, 아범은 어떡하니?" 시어머니가 물었다.
순간 리사코는 무슨 말인가 하고 어리둥절해하다가 겨우 이해하고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창피했다. 시어머니는 아들의 저녁을 걱정하고 있을 뿐인데, 자신은 김칫국부터 마셨던 것이다. "괜찮아요, 그이는 오늘 회식이 있대요."라고 순간적으로 내뱉은 거짓말까지 리사코는 기억하고 있으며, 몇 달이나 지난 일을 여전히 되새기는 자신을 혐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