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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해례본을 찾아서 ㅣ 달아실 한국소설 22
주수자 지음 / 달아실 / 2024년 10월
평점 :
네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나는, 그리고 우리는 어땠을까.
숨쉬는 공기처럼 당연하게 여겼던 언어라서 한글의 소중함을 잠시 잊고 있다가, 이 책을 읽으며 다시금 일깨웠네요.
어찌보면 한글은 우리의 아픈 역사와 궤를 같이 하고 있어요. 한글의 수난기는 1930년대 말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였고, 그 시기에 한글은 처참히 짓밟혔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어요. 누가 어떻게 무엇을 통해 생존할 수 있었는지, 그 중심에 있는 한 권의 책을 주인공으로 다룬 책이 나왔어요.
"천태산인 김태준은 국문학자이고, 학문은 그의 목숨이었다. 그는 자신의 시간을 기꺼이 소진하며 오백 년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내 호적을 찾아 주었다. 그가 그렇게 목숨을 걸지 않았던들, 먼지투성이 고서들 틈에서 꺼내 준 해례본이 아니었던들 나는 천박한 태생으로 전락했으리라."
(12p)
《소설 해례본을 찾아서》는 주수자 작가님의 소설이에요. 저자는 소설 속 「암클 투서」 허중달 이야기는 유희춘의 『미암일기』 부분에서 빌려와 각색한 것이고, 김태준에 관한 내용은 『김태준 평전』 (김용직, 일지사, 2007)을 참고한 것이며, 소설에 등장하는 김태준, 이용준, 박진홍, 간송 전형필, 이현상 등은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실존 인물이지만 서사 자체는 허구적 상상임을 밝히고 있어요. 역사적인 사실을 살펴보자면 김태준(1905년~1949년)은 평안북도 운산 출신으로 호는 '천태산인'이며, 한문학자이자 국문학자로서 일제강점기 말에 경성콤그룹에서 활동한 공산주의계열 독립운동가였어요. 그동안 김태준 국문학자를 잘 몰랐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네요.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의 항일투쟁 업적은 분단 이후에 이념의 잣대로 인해 배제되어 왔고, 청산하지 못한 친일파들이 독립운동가들을 좌파 빨갱이로 몰아갔던 거죠. 이념과 사상에 관계없이 독립운동, 항일투쟁을 한 사람은 그들의 업적을 제대로 평가하고 인정해줘야 해요. 반대로 친일파들은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해요. 김태준은 1931년에 이희승, 조윤제, 김재철 등과 조선어문학회를 결성하여 한국 문학사의 기초를 닦은 연구자였다는 사실만으로도 한글날에 기려야 할 인물들 중 한 분이네요.
1940년 여름, 김태준은 제자 이용준에게서 "우리 집안에 훈민정음이 가보로 내려오고 있다"는 얘길 듣고, 문화재 수집가이자 연구가였던 간송 전형필에게 해례본의 존재 사실을 알렸어요. 전형필은 일제의 감시 위험을 무릅쓰고 해례본을 인수해 온전히 보존함으로써 한글 창제원리를 세상에 알리는 역할을 했어요. 훈민정음 해례본은 전형필 사후 1962년 12월 국보 70호로 지정되고,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어요. 한글창제의 취지와 목적, 창제 원리가 적혀있는 이 한 권의 책이 지닌 가치를 생각한다면 해례본을 지켜낸 분들의 노고를 기억해야만 해요. 소설 말미에는 '김태준과의 가상 인터뷰'가 나오는데, 김태준은 이용준이 언급한 해례본이 진서임을 확인한 후 간송에게 연락했을 때 그가 했던 말을 가슴에 콕 박히네요. "후대에게 얼마나 부끄러울 뻔했소. 이것마저 일본에게 빼앗겼더라면." (197p) 불행하게도 21세기 대한민국에는 일제강점기의 친일정신을 드러내는 후안무치의 족속들이 살고 있네요. 지금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해례본의 정신이 아닐까 싶어요. "정음은 해례본으로 인하여 새로운 미래를 펼칠 것이기에." (186p) 누군가의 입술, 심장, 영혼의 울림으로 영원히 반짝이며 이어질 거라는 걸, 우리에게 알려주었네요. 한마디의 말, 한줄의 글을 쓸 때에도 늘 감사하며 바르고 아름답게 사용하기로 다짐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