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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생명의 지문 - 생명, 존재의 시원, 그리고 역사에 감춰진 피 이야기
라인하르트 프리들.셜리 미하엘라 소일 지음, 배명자 옮김 / 흐름출판 / 2024년 10월
평점 :
의학 드라마에서 수술 장면이 나오면 나도 모르게 숨죽인 채 바라보게 돼요.
한 사람의 생명이 달린 절체절명의 순간을 목격한다는 건 아무리 실제가 아니라고 해도 경건해지는 것 같아요.
《피, 생명의 지문》은 심장외과 의사이자 심리학자인 라인하르트 프리들과 작가 셜리 미하엘라 소일이 함께 쓴 책이에요. '생명, 존재의 시원, 그리고 역사에 감춰진 피 이야기'라는 부제와 함께 '2024년 독일 최고의 과학책 최종 후보작'이라는 소개글을 보면서 굉장히 진지한 지식의 여정일 거라고 짐작했는데, 첫 장을 읽자마자 깜짝 놀랐어요. 웬만한 드라마, 영화, 소설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흥미진진했어요. '피'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이토록 재미있게 풀어갈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강렬한 첫인상처럼 처음 등장하는 장면이 너무나 압도적이에요. "아무리 강심장인 심장외과 의사라도 순간적으로 피가 얼어붙는 그런 광경이 있다." (14p) 왜 피가 얼어붙는 광경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때로는 영상보다 글로 묘사된 내용이 더 충격적일 수 있으니까요. 첫 장에서는 프리들 박사가 병원에서 긴급 전화를 받고 달려갔을 때 마주하게 된 환자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돼요. 그 환자는 아직 의식이 있었고 수술대로 옮겨지는 동안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를 계속 반복하더니 프리들 박사를 빤히 보다가, "이제 죽는 건가요?"라고 물었고, 자신의 이름이 하미트라고 말했어요. 만약 소설이었다면 하미트가 병원에 오기 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시간을 되돌려서 보여줬겠지만 이 책은 대중 교양 과학서라서 '피'에 관한 지식들을 설명해주고 있어요. "일반적으로 피를 생명과 동일시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몸에서 흘러나가 돌아오지 않는 피는 곧 죽음이다. 그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붉은 수혈팩을 여러 개 달아놓고 전기펌프로 하미트의 몸에 피를 공급했다. 혈액형을 몰랐던 탓에 우선 비축해두었던 Rh-O형 피를 혈액 냉장고에서 꺼내왔다. Rh-O형은 누구에게나 수혈할 수 있으므로 응급 상황에서 언제든 사용할 수 있다." (21p) 물 흐르듯, 아니 피가 흐르듯 자연스럽게 '피'와 생명에 관한 지식들을 이야기하고 있어서 푹 빠져들었네요. 그러다가 다시 하미트의 수술 과정 이후 이야기까지 절묘하게 오가며 삶과 죽음, 의학과 과학, 역사, 문화, 심리의 영역까지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네요.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의식의 바다로 뛰어들었고, 혈류가 어떻게 영혼을 휘감아 돌고 신경망에 생명을 불어넣는지 탐구했다. 그리고 죽더라도 같은 파도를 타고 새로운 바다로 간다. 모든 것은 흐른다. 신체와 마음의 상처는 삶의 흐름을 영원히 차단할 수 있다." (337p) 라는 것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어요. 책을 읽는 내내 "판타 레이 Panta rhei. 모든 것은 흐른다." 라는 문장이 머릿속에 맴돌았는데, 역시 마지막 장에서 틱낫한 스님의 말씀으로 긴 여운을 남기네요. "나는 숨을 들이쉬고 마음을 가라앉힌다. 나는 숨을 내쉬고 미소 짓는다. 지금 여기로 돌아오면, 이 순간은 기적이 된다." (342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