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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삼인방 - 지키지 못한 약속 ㅣ 생각학교 클클문고
정명섭 지음 / 생각학교 / 2024년 7월
평점 :
"을씨년스럽군."
코끝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에 백석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 사람들은 스산하거나 어수선하면 종종 '을사년스럽다'라고 말했다.
이후에 발음이 변하면서 '을씨년스럽다'라는 표현이 되었어요.
(10p)
참으로 을씨년스러운 시국인지라 이 소설이 남다르게 느껴졌어요.
《광화문 삼인방》은 정명섭 작가님의 역사소설이에요. 시인 백석이 경성에서 신문사를 다니던 시기인 1934년부터 1939년의 이야기이며, 역사적 사실과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져 일제 강점기를 견뎌내야 했던 젊은이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어요. 1934년 우리나라는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지 이십사 년째이고, 한성은 경성으로 이름이 바뀌고, 광화문 자리에는 조선총독부 건물이 세워져 있어요. 이 소설은 백석과 허준, 신현중까지 세 친구의 약속을 다루고 있어요. 세 친구를 주인공으로 설정한 이유는 끝까지 저항하는 길을 선택했던 인물이라는 점이 가장 클 것 같아요. 무엇보다도 시인 백석과 그의 삶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라서 그 의미가 남다르네요. 광복 이후 백석과 허준은 모두 고향이 있는 북으로 돌아갔는데 그로 인해 한국문학계에서 지워져 있다가, 1988년 7월 19일 월북 문인에 대한 해금조치가 발표되면서 그들의 작품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어요.
"백석 군의 시집 《사슴》은 그동안 갈 곳을 잃고 방황하던 문단에 큰 울림이 되었고, 이정표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시의 목적이 무엇이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토론해 왔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논쟁이 있었고, 앞으로도 있겠지만 백석 군의 시는 간명하고 명확하게 자신이 가는 방향을 얘기해 주었습니다. 바로 고향이죠. 읽으신 분은 모두 동의하겠지만, 그의 시선과 언어는 온통 고향으로 향해 있습니다. 이게 바로 백석 군이 우리에게 일깨워 준 시의 본질이 아니겠습니까?" (105p)
"바야흐로 야만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어. 가진 건 펜과 종이밖에 없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 오직 쓰고 기록하는 것뿐이잖아." (115p)
세 친구는 우리말을 못 쓰고, 이름마저도 일본식으로 바꿔야 하는 현실을 답답해 하면서도 자신들이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광화문 삼인방의 약속이 비록 허구의 이야기일지라도 마음 깊숙히 울리네요. 당시 많은 지식인과 문인들이 일본의 식민 통치에 적극 협력하면서 말도 안 되는 합리화,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가 된 건 힘이 약한 탓이고 약자가 강자에게 짓밟히는 건 당연하다는 논리를 펼쳤다고 해요. 엘리트들의 친일행각 속에는 약자 혐오와 도덕성이 결여된 힘 숭배의식이 깔려 있었고, 해방 이후 청산 못한 친일파들과 그 후손들이 여전히 기득권층이 되어 사회를 혼탁하게 만들고 있네요. 최근 장관 후보자가 일제 강점기에 살았던 우리 선조들의 국적이 일본이라며 큰소리 치는 모습에 기가 막혔네요. 나라를 빼앗겼으니 조선인의 국적은 일본이라는 논리는 역사를 전혀 모르는 무지의 소치예요. 제국일본은 조선인을 통제하기 위해 일본국민이라고 떠들었지만 실제로는 인정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조선인에게 헌법이 정한 권리를 부여하기 싫었던 거예요. 국적법을 적용하지 않은 것도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을 이중국적 상태로 묶어 수사 관할 안에 묶어두려고 속셈이었어요. 일본이 우리 영토를 강탈했을 때 우리는 무력에 의한 압제 속에서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했어요.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나온 그대로,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있어요. 우리나라 헌법을 대놓고 부정하면서 일본 식민지배 정당성을 운운하는 이들이 정부 고위직이 된다는 게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가당키나 한가요. 어쩐지 윤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1995년 철거된 조선총독 관저 복원을 추진하려던 게 실수가 아니었네요. 총독부가 무너지는 날 다시 만나자던 광화문 삼인방, 그리고 목숨 바쳐 나라를 되찾으려 했던 독립운동가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오늘을 살아야 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