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베개 책세상 세계문학 9
나쓰메 소세키 지음, 오석륜 옮김 / 책세상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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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을 올라가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지理智에 치우치면 모가 난다. 감정에 말려들면 낙오하게 마련이다.

고집을 부리면 외로워진다. 아무튼 인간 세상은 살기 어렵다.

살기가 지나치게 어려워지면, 살기 편한 곳으로 옮기고 싶어진다.

어디로 이사를 해도 살기가 쉽지 않다고 깨달았을 때, 시가 태어나고, 그림이 생겨난다."

 (9p)


첫 문장을 읽으면서 한 편의 시 같다고 느꼈어요. 오르막길, 특히 산을 오르는 길은 평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험난한 길이라는 점에서 인생 고비에 비유할 수 있는데, 소설 속 주인공은 산길을 오르면서 우리에게 예술이 어떻게 탄생하는지 이야기해주고 있네요.

《풀베개》는 일본 근대문학의 대문호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이에요.

이 소설은 일본 메이지 39년, 1906년 작품으로 이 시기를 전후로 일본 문단은 근현대 문학이 싹트는 시기였다고 하네요. 책 맨뒤에 나오는 작품 해설을 보면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과 일본 문단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네요. 우선 책 제목인 '풀베개'는 풀로써 베개를 삼는다는 뜻으로 여행을 상징하며, 자연 속 '비인정 非人情'의 경지를 상징한다고 하는데, '비인정'이라는 단어는 '인간의 의리나 인정 따위에서 벗어나 그것에 구애되지 않는 것' (202p)을 가리킨다고 하네요. 비인정은 따뜻한 마음이 전혀 없는 몰인정과는 다른 의미예요. 주인공 '나'는 화구 상자를 어깨에 걸친 채 유유히 산길을 오르며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바라보면서 시를 읊고 있어요. 살짝 웃음이 났던 장면은 멋드러지게 풍유를 즐기던 주인공이 쏟아진 비를 흠뻑 맞고는 "비인정이 약간 지나친 것 같다." (23p)라고 표현한 부분이에요. 인적 드문 산길을 걸어서 주인공인 도착한 곳은 시골 마을에 위치한 온천장이에요. 어찌나 감성이 풍부한지, 거기에 관찰력까지 더해져 구석구석 세밀하게 묘사한 데다가 야릇한 꿈까지 전반적으로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기네요. 주인공이 원했던 건 비인정 여행이지만 역시 여행에서 사람을 빼놓을 순 없는 것 같아요. 주인공과 여인과의 대화가 무척 흥미로운데, 문득 그 여인이 방을 나서며 했던 마지막 말 때문에 현실인가, 아니면 꿈인가 알쏭달쏭했는데 뭔들 어떤가 싶더라고요.


"화가니까 소설 같은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을 필요는 없는 겁니다. 그렇지만 어디를 읽어도 재미있습니다. 당신하고 얘기하는 것도 재미있고요. 이곳에 묵는 동안에는 매일 얘기를 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뭣하면 당신한테 반해도 좋아요. 그러면 더 재미있겠지요. 그러나 아무리 반해도 당신과 부부가 될 필요는 없는 겁니다. 반해서 부부가 될 필요가 있을 때는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을 필요가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몰인정하게 반하는 사람이 화가인 거군요?"

"몰인정이 아니지요. 반하는 방법이 비인정 非人情 이라는 겁니다. 소설도 비인정으로 읽으니까 줄거리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이렇게 제비 뽑듯이 펼쳐진 곳을 멍하니 읽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아요, 지금 당신이 읽고 있는 데를 조금 얘기해주세요. 재미있는 것이 나오는지 듣고 싶네요."

"얘기하면 안 돼요. 그림도 얘기로 해버리면 그 가치가 없어지고 마는 거 아닙니까?"

(125-126p)


화가인 주인공은 잠깐 인정세계를 떠나 여행 중이기에 한껏 자유로움을 누리고 있어요. 화가의 눈을 통해 우리는 비인정 속 인간의 정으로 그려진 한 폭의 그림을 보았네요. 주인공이 나미 씨의 얼굴에서 본 그것, 마지막 장면을 보다가 다시 첫 문장을 곱씹게 되네요. 나쓰메 소세키가 우리에게 건네는 풀베개, 느긋하고 풍요로운 예술의 힘인 것 같아요.


"인간 세상을 만든 것은 신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다. 

역시 보통 사람이고, 이웃끼리 오고 가는 그런 사람이다.

보통 사람이 만든 인간 세상이 살기 어렵다고 해도 옮겨갈 나라는 없다. 

있다면 사람답지 못한 나라로 갈 수밖에 없다.

사람답지 못한 나라는 인간 세상보다 더 살기 힘들 것이다.

옮겨 살 수도 없는 세상이 살기 어렵다면, 

살기 어려운 곳을 어느 정도 편하게 만들어서 짧은 생명을, 

짧은 순간만이라도 살기 좋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시인이라는 천직이 생기고, 화가라는 사명이 주어진다. 

예술을 하는 모든 사람은 인간 세상을 느긋하게 만들고, 

사람의 마음을 풍성하게 해주는 까닭에 소중하다." 

 (9-1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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