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밀꽃 필 무렵 베스트셀러 한국문학선
이효석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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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 전인가, 아마 그보다 더 오래된 것 같아요.

여름이면 봉평을 방문했는데, 실제 메밀꽃이 핀 들판을 본 적은 없지만 항상 이 소설이 떠올랐던 것 같아요.

이효석 작가님의 <메밀꽃 필 무렵>은 뭔가 아련한 달밤의 추억 같아요. 

허 생원과 동이의 아찔한 첫만남부터 달밤에 고개를 넘고 개울을 건너는 장면들이 눈앞에 그려져요. 이야기로 치자면 무진장 짧은, 그저 몇 개의 장면으로 끝날 내용인데도, 이상하게 자꾸 여운이 남아요. 평생 인연이라고는 나귀뿐인 서글픈 인생을 살아온 허 생원에게도 꼭 한 번의 첫일이 있었으니, 그 잊을 수 없는 장소가 봉평인지라 그 뒤로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봉평 장을 빼논 적이 없어요. 그 사정을 잘 아는 조 선달은 매번 봉평 장으로 가는 길에 허 생원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아요. 그런데 이번에는 그 길을 세 사람이 함께 걷고 있어요.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길이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 섰다.

방울 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메밀밭께로 흘러간다."  (14p)


개울을 건너다 발을 헛디뎌 몸째 풍덩 빠져 버린 허 생원을 동이가 가뿐히 업어 물을 건넜을 때, 허 생원은 그 등어리가 뼈에 사무치게 따뜻하여 좀더 업혔으면 바라는데 그 마음을 너무나 알 것 같아서 코끝이 시큰해졌어요. 나이를 먹은 탓인가봐요. 예전에는 영화의 한 장면 같았던 이야기가 어느새 인생 파노라마처럼 보이니 말이에요. 척하면 척, 말하지 않아도 공감할 수 있는 것이 세월의 힘인 것 같아요.


"... 난 거꾸러질 때까지 이 길을 걷고 저 달 볼테야."  (15p)


이 책 속에는 <메밀꽃 필 무렵> 외에도 <화분>, <약령기>, <수탉>, <분녀>, <산>, <들>, <장미 병들다>가 수록되어 있어요. 저마다 사연을 가진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자꾸만 허 생원이 생각났어요. 걷고 또 걷는 장돌뱅이 인생, 딱히 내세울 것 없는 신세지만 아름다운 달빛에 감동하는 그 찰나의 기쁨이 그를 또 걷게 하는 힘이 아닐까라는... 여덟 편의 작품으로 이효석 작가의 문학 세계를 다 알 수는 없겠지만 그 안에 담긴 인생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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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1-10-13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년전 이효석문학관과 메밀꽃 핀 들판에 가 본 적이 있어요. 그 동네 분위기가 좋았답니다. 구월 초입이었는데 햇살 좋은 날 한바퀴 걸으며 해바라기도 했지요. 세월의 힘이랄까 척하면 말 안 해도 알 수 있는 것들, 동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