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정호야, 도대체 왜그래?”
완전히 딴 사람처럼 변한 정호의 얼굴이 시커먼 총구멍보다 더욱 무서웠다.혜영의
목소리라 파르르 떨렸다.
“나의
행복성이 파괴되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정호야, 그건 다 가짜야.”
혜영은 혼란에 빠진 정호의 정신을 깨어나게 만들겠다는 듯이 고함을 쳤다.
“또
그 소리!좋아, 현실에서 직접 느끼고 만지는 것과 네가 그렇게
그토록 가짜라고 주장하는 가상현실이 뭐가 다르지? 말해봐!”
“……”
“내
경험으로 말하면 둘 다 똑같아.”
“아니야!”
정호의 주장에 화가 난 혜영은 버럭 화를 냈다. 정호도 혜영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는지 고함으로 맞받아쳤다.
“현실이든
가상이든간에 우리의 뇌가 받아들이고 느끼는 것은 결국 다 똑같아!”
“이런,”
“따지고
보면 인간의 모든 행동들이 결국은 이놈의
뇌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 아니야?”
정호는 혜영에게 반박할 틈도 주지않고 자신의 생각을 속사포처럼 내뱉
으며 들고있던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통을 툭툭 쳤다.혜경은 행여나
권총이 발사될까봐 기겁을 했다.
“그래서
나는 가능성없는 현실에 살면서 나의 뇌를 욕망에
굶주리게 만들기보다는 차라리 가상현실속에서 살면서 나의
뇌를 위하여 살기로 했어.”
“정호야,그건 정상적인 것이 아냐!”
혜영은 정호가 너무나도 깊게 가상현실에 빠져있는 것을 발
견하고는 안타까움과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혜영을 바라보는 정호의 눈빛
이 번쩍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너는 나 같은 패배자들의 고통을 절대
몰라!”
”정호야. ”
“좋아, 네 말대로 너를 따라 바깥세상으로 나간다고 치자.현실적으로 너는
나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지?”
“그건……”
“아마
없을 거야, 너도 너 먹고살기 바쁘니까.”
정호가 비관적인 냉소를 흘리며 내뱉자 혜영은 어떻게든 그의 마음을 돌려야 한다고 절실하게 느꼈다. 그녀는 정호의 품에 안기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하지만
난 최소한 너하고 결혼할 수 있어.”
정호의 얼굴에서 미세한 변화가 일어났다.그러나 그것은 곧 사라졌다. 정호는 혜영을 밀어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하지만
난 이미 승희하고 결혼한 사이야.”
“정호야!”
“그녀는
너무 황홀해. 유일하게 나를 인간으로 대해준 여자야.네 신세를
지면서 밥충이로 살 수는 없어!”
정호의 눈빛이 가상현실속의 승희와의 결혼생활를 회상하듯 몽롱해졌다.혜영은
가상세계에서 정호를 사로잡고 놓아주지않는 승희에 대한 질투심이 다시 불처럼
일어났지만 정호를 미몽에서 꺼내올 방법이 없어 무력감만 느낄 뿐이었다.
“……”
정호는 시계를 흘끔 보더니 권총을 들어 다시 혜영에게 겨누었다. 시커먼
총구밑에서 정호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간단하게
말해서 난 인간이 되고 싶은거야.알겠니?”
“그것였구나.”
마침내 승희가 체념한 듯이 힘없이 중얼거리자 정호는 다시 입을 열었다.
“혜영아, 마지막으로 한 가지 물어 묻겠다.“
마지막이라는 정호의 말에 혜영의 이마에서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뭐…뭔데?”
놀라는 혜경을 섬찍하게 노려보는 정호의 시선이 어둠속에서 심상치않게 빛났다.
“네가
지금까지 본 것에 대해 영원히 입을 다물겠니?”
“그, 그래.”
“정말이지?”
다시 한번 확인을 하는 정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통 알 수가 없어 헤영은 더욱 불안했다.그녀의 몸이 저도 모르게 어린 비둘기처럼 파르르 떨기 시작했다.
“그럼. 영, 영원히 비….비밀을
지키겠어.”
“난
너를 죽이고 싶지 않아,”
매우 착잡한 듯 나지막이 중얼거리던 정호는 뒤돌아섰다.혜영은 그의 얼굴표정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어 더욱 불안했다.
“타앙!”
그리고 잠시 후 파랗게 물들어가는 밤하늘의 정적을 깨뜨리는 총소리가 다시 한번 길게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