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공노인은 정화로부터 영산수호회 회의에서 무예24기시범단을 둘러싸고 격론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는 깊은 근심에 잠겼다.
혹시라도 아이들이 무예시범단을 만나러갔다가 부모들을 구하겠다는 욕심에 자칫 그들과 싸우기라고 하면 정말 큰일이었기때문이었다.
공노인이 그토록 걱정을 하는 까닭은 자칭 무예시범단이라는 자들이 지금은 비록 그들을 도와준 고마운 자들이었지만 동시에 매우 위험한 자들이라는 것을 그는 이미 겪어봤기 때문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아이들이 크게 다칠 것이 뻔했다. 그는 당시 자신이 시내에 볼 일이 있어 비상회의에 불참한 것을 뒤늦게 후회했다.
“……!”
어쨌든 그가 아이들을 찾아 급히 자리에 일어나려고 할 때 등쪽에서 뭔가 인기척이 있었다.그가 무심코 돌아보니 언제 나타났는지 세 명의 사내가 자신을 향해 조용히 걸어오고 있었다.얼핏 보아 붉은 갑옷차림에 커다란 검을 가슴에 품고있는 사내들은 그가 염려하고 있던 무예시범단들이었다. 가운데에 서 있는 훤칠한 자는 검귀라고 불리던 장수였다. 공노인은 그들을 대하는 순간 심장이 멈춰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누, 누구……”
“우리는 며칠 전에 아이들을 도와줬던 무예24기시범단이오.”
“그, 그렇군요.”
공노인이 일부러 처음 보는 척 했다.그러자 검귀는 공노인을 유심히 쏘아본다.
“우리는 이미 오랜 전에 알던 사이 아니요?”
“……”
“쯧, 너무 그렇게 시치미를 떼니 갑자기 서운해지려고 하는군.”
검귀는 계속 공노인의 반응을 떠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그래도 살아남기 위해서 공노인은 더욱 태연한 척 했다.
“무슨 말인지?”
“뭐, 그동안 비밀을 잘 지켜왔으니 이제는 아는 척 해도 괜찮소.”
“비밀이라니? 난 아무 것도 모르오.”
“정말 옛날 일을 모른다는 말이요?”
“……”
검귀의 집요한 추궁에 공노인은 아예 입을 다물어버렸지만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소리가 얼마나 격렬했던지 검귀가 알아들을까봐 걱정이 들 정도였다. 그의 기억에 검귀는 몇번이나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아주 잔혹한 자였다.
약 15년 전 공노인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면 공영실 박사는 한국두뇌개발센타에서 지수에 대한 뇌실험 문제로 황박사와 심하게 다투다가 강검사의 부하들에 의해 강제로 쫒겨났었다.그후 여기 저기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팔달산에 거처를 만들었다.
그렇게 10년을 세상을 등지고 그저 촌부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던 공노인은 어느 날 산책을 하다가 지월이라는 이상한 자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 아니 저게 뭐야? ”
그날도 팔달산 정상에 있는 서장대로 향하는 오솔길을 따라 한가롭게 걷던 공노인은 건너편 산중턱에서 푸른 불빛이 번쩍하는 것을 우연히 목격하게 되었다.한바탕 소나기라도 쏟아지려나 싶어서 힐끔 하늘을 쳐다보았지만 오후 3시를 갓 넘긴 맑은 하늘은 비가 올 낌새가 아니었다.그가 잘못 보았나 하고 다시 걸음을 옮기는데 다시 푸른 불빛이 연달아 산중턱에서 다시 작렬했다.
"......!"
퍼뜩 심상치않은 일이 일어난 것을 직감한 공노인은 급히 그곳으로 뛰어갔다.헉헉거리며 산중턱에 도착해보니 전방 20미터 앞에서 자기 또래의 웬 중년 남자가 바닥에 앉아 열심히 땅을 파고있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아, 실례합니다.”
산속에서 오랫동안 사람을 만나지 못해 무척 적적했던 공노인은 반색을 하며 중년남자에게 다가가 슬쩍 말을 붙여보았다. 발굴용 작은 삽을 열심히 놀리며 바쁘게 땅을 파헤치던 중년남자는 동작을 멈추고 쓰윽 그를 올려다본다.초로에 접어든 남자의 수수한 얼굴에 흙부스러기 언뜻 언뜻 묻어있었지만 왠지 범상치 않은 위엄이 서려 있었다.
“누, 누구시죠?”
“난 이 산속에 사는 공영실이라는 사람이오.”
“아. 난 지월(沚月)이라고 합니다.”
지월은 인상대로 붙임성이 있는 사람인 듯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가벼운 목례를 했다.
“지월?”
”연못속의 달이라는 뜻입니다.”
“재미있는 이름이군요.”
미소를 지으며 이름의 의미를 되새기던공노인은 지월의 발 주변에 흙더미가 제법 쌓여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에게 물었다.
“대체 이 산속에서 뭘 하는게요?”
“별 것은 아니고……”
“뭐 대단한 것이라도 묻혀있소?”
그동안 산속에서 무료하게 생활해왔던 공노인은 이야기를 재미있게 만들어가기 위해서 일부러 농담 비슷하게 말을 툭 던졌다.
“그럼요.이 땅속에 지하궁전이 묻혀있는데……”
그런데 지월은 뜻밖에도 꺼림낌없이 자신의 속내를 드러냈다.
“지하궁전요?”
“아마라라고 불리는 궁전이요.”
지월은 아주 확신있게 고개를 끄떡이었다.공노인이 이거 또 황당무계한 소리야 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지월은 그것이 싫은지 자리에 다시 앉았다.그리고 삽으로 다시 땅파는 작업을 시작했다.
“당신도 나를 미친 놈이라고 생각하는군요.”
“당신이 고고학자라면 몰라도……”
“고고학자는 아니지만 난 지하궁전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있소.”
“그 증거라는 것이 대체 뭐요?”
“그것이 말이요.”
그때부터 지월의 입에서 나온 지하궁전에 대한 이야기는 공노인에게는 다소 황당하게 들리는 면이 많이 있었다.그런데 듣다보면 묘하게 끌리는 점이 있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공노인은 깜짝 놀라며 얼른 공상가의 이야기에서 벗어났다. 하여간 지하궁전에 대한 존재 여부를 떠나서 공노인은 지월에게서 묘한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그래서 그는 틈날 때마다 지월에게 놀러가곤 했었다.갈 때마다 지월이 파들어간 동굴은 점점 깊어지고 넓어져 갔다.그런데 어느 날이었다.지월이 걱정스런 얼굴로 공노인에게 말했다.
“이보게, 이제 이 일을 그만 해야겠네.”
“왜 이제 정신을 차렸나?”
“그게 아니고 놈들이 내 발굴을 알아챌까봐 그러네.”
“놈들이라니?”
“지하궁전에서 사는 자들이지.그들은 자신의 세계가 세상에 드러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네.”
“다들 자신들의 세계가 까발겨지는 것을 싫어하잖아.”
공노인은 이내 실실 웃으면서 맞장구쳤다.
“농담이 아니래두. 문제는 내가 직접 이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거야.”
말을 마친 지월은 지긋이 공노인을 쳐다본다.공노인은 화들짝 놀라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보고 대신 파라고?”
“그랬으면 정말 좋겠는데.”
지월의 눈빛이 아주 진지해졌다.
“나보고 몽상가가 되라고?”
“몽상가가 아니라 위대한 발굴자가 되는 거라고!인류를 위해서……”
지월의 얼굴빛이 매우 진지해졌다.그러자 공노인은 크게 손사래를 쳤다.
“그건 그렇다치고 자네 말대로 파고들어가다가 지하궁전에 사는 놈들이 나를 죽이려고 들면 난 어쩌라구?”
“그건 자네 팔자에 맡겠야지. 어쩌겠나?”
“헐, 그런 위험한 일을 시켜놓고는 그런 태평스런 말을 해?난 못하네!”
그때 공노인은 그렇게 강력하게 거절했었고 며칠 후 지월은 이상하게 바람처럼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그가 떠난 후 발굴용 삽을 한참 바라보던 공노인은 호기심에 이끌려 삽을 들고 지월이 파내던 곳을 조심스럽게 굵어보았다.흙부스러기가 와르르 바닥에 떨어졌는데 흙더미가 노랗게 반짝거렸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가 손가락으로 찍어보자 노란빛 금속가루가 섞여있었다. 그의 놀란 시선이 동굴벽에 꽂혔다.흙더미가 떨어져나간 부분에 공노인을 반기듯 황금맥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이럴 수가! 이것 금이잖아!”
탄성을 지르던 공노인은 삽으로 허겁지겁 동굴벽을 파헤치기 시작했다.생각보다 흙은 매우 부드러워서 금방 깊이 파낼 수 있었다.금맥의 크기가 점점 커지면서 그의 흥분도 급상승했다. 공노인에게 엄청난 흥분을 안겨준 금맥은 끝없이 이어졌다.그가 금맥을 정신없이 파낼수록 동굴은 더욱 깊어졌다. 발굴을 시작한 지 하루 만에 어른 한 사람이 설 수 있는 정도의 긴 터널이 만들어졌다.
“……!”
그런데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금맥은 어느 순간 딱 끊어지고 말았다. 대신 금맥이 끈어진 곳에서 계단의 한 부분인 듯한 대리석이 살짝 보였다. 그 순간 금맥에 쏠렸던 것보다 더 큰 흥분이 폭발했다, 한참동안 그가 정신없이 흙을 파헤쳐 들어가자 놀랍게도 완전한 모양의 계단이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