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의 밤,

시내에 어둠이 내리면 빽빽하게 들어선 빌딩숲에서 쏟아져 나오는 불빛들은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듯 밤하늘의별들로 변신을 한다지상에 별들이 가득 차자 마치 하늘과 땅이 뒤바뀐 듯 하다.그런 어지러운 별들사이로 황금색 빛으로 가득 찬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모습이 강렬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삼라정보탑의 화려한 야경이었다. 하지만 지수는 런 정보탑에서 바벨탑의 분위기가 느껴져 얼른 시선을 팔달산의 정상쪽으로 돌려버렸다.

 

(......!)

 

하지만 지수가 서있는 화성남쪽성곽남포루에서는 맞은 편의 울창한 소나무숲 때문에 정상에 있는 서장대가 거의 보이지않는다. 마치 전혀 떠오르지않는 깜깜한 그의 기억과  똑같았다.

 

(나는왜지금팔달산에있는것일까?)

 

이상하게도 지수는자신이언제 팔달산에들어왔는지 전혀 기억을 할 수 없었다. 심지어는자신의가족관계도전혀떠오르지않아 정말 괴로왔다. 팔달산의으슥한동굴에서 만난 공노인만이 유일하게 떠오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공노인과 자신이 과거에 무슨 인연을 맺고있었는지는 전혀 종잡을 수 없었다때문에 지수는  마치 자신의 뇌의 일부가  통째로 잘려나간 듯한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에 깊게 빠지곤 했었다.

 

 “……!

 

그때문득밤하늘의별들이어두운숲속으로우르르쏟아졌다. 지수는 웬 별똥별인가 싶어 눈을 크게 뜨고 숲속을 유심히살펴보았다.그런데땅으로마구쏟아지던별들은떼를지어출렁출렁움직이며위로상승하더니 신나게춤추며 자신이 있는 곳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저건......)

 

 한밤중에 지수를 놀라게한 별똥별은 다름아닌초록빛의반딧불이었다. 그러고보니 곤히 잠든 팔달산 주변이 어느새 온통반딧불이천지로 변했다.는갑갑하고 우울했던기분을떨쳐버리기위해서환호성을지르며초록빛의 반딧불이의 바다로 첨벙 첨벙 뛰어들었다. 그리고 어린 아이처럼 팔짝 뛰면서 두손으로반딧불이를잡으려했다. 그러나반딧불이들은슬쩍슬쩍그의손길을잘도빠져나간다.

 

“......!”

 

그런데지수가정신없이반딧불이의 바다를 헤치고 뛰어다니다가문득앞을바라보니누군가도자기처럼반딧불이를잡기위해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

 

거기누구야?

 

사람도지수의목소리를들었는지흠칫놀라며동작을멈추었다. 그리고잠자코지수를바라만본다. 지수가그쪽으로서서히걸음을옮기자문득 바람결에 여자특유의알싸한 향기가실려온다.

 

정화 ?

 

대뜸 그녀의이름을부르는지수의가슴이 갑자기 마구뛰기시작했다.

 

지수?

 

반색을하며지수의앞으로튀어나온사람은예상대로정화였다머리를 뒤로 묶은 정화의웃는얼굴이밤이슬에청초롬하게젖어있었다.  

 

이시각에웬일이야?

 

모두가잠든깊은시각에뜬금없이정화를만나게되자 지수의목소리가 괜시리 떨렸다.

 

. 잠이 안와서 나와보니 사방이온통푸른불빛이잖아. 난처음엔별이떨어지는 줄 알고 소원이나 빌려고 했는데 알고보니 반딧불이들이잖아. 그래서 요녀석들을 혼내주고 있는 거야. 호호,

 

정화는자신이 생각해도 말같지 않은 변명을 하고 있다고 느꼈는지 멋적은 웃음을 살짝 날린다.그런 정화의 웃음과 수수한외모는언제나 지수의 공허하고 외로운 마음을 달래주곤 했었다.

 

그래  나도  혼좀 내줄까?

 

지수도 한 마디 던지고 마침 눈앞으로 날아가는 반딧불이를 오른손으로 날세게 훔친다.그러나 이번에도 반딧불이는 그의 손길을 교묘하게 빠져나간다. 둘 사이의 어색함을 숨기려는 듯 정화가 반딧불이를 얼른 따라간다. 지수는 또다른 반딧불이를 잡으려고 달음질쳤다.한참동안 애꿎은 반딧불이를  잡으려고 이리 저리 따라다니던 두 사람은 다리가 아파오자 결국 금잔디광장의누각난간에나란히걸터앉고 말았다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반딧불이가펼치는밤의무도회만즐겼다이윽고지수가먼저말문을열었다.

 

정화야, 나는왜엄마에대한기억이없을까?

엄마기억?

 

비록 느닷없는 질문이었지만 이미 정화는 그의 고뇌를 안다는 듯 그녀의 예쁜 눈에 걱정이 가득 찼다.

 

다들엄마아빠를구하겠다고 난리인데 나만 혼자야.”

“……”

마치머리가뻥뚫린것같이아무것도생각이안나. 왜그러지?

 

두려움과걱정이가득찬지수의 맑은 시선이정화의 까만 눈동자에머물었다.한순간정화는괴로와하는지수가안돼보여서그의과거를모두밝혀버릴까하는생각이 불쑥 들었다.그러나이후벌어질혼란과두려움을 감당해낼  자신이 없어 정화는 그냥입을다물고말았다.

 

시간이 지나면 좋아지겠지.

아니, 절망적이야.

지수야,

 

안타깝게 지수의 이름만 부르는 정화의 눈빛이 어두운 밤의 색깔보다 더 어두워지는 것을  본 지수는 얼른 화제를 바꾸기로 했다. 정화라고 뭐 특별한 대답을 해주겠는가 싶고 지금  이 순간에는 그저 정화가 자신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고 행복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너에대한내감정이싹틀수있는자리는남아있어서그나마다행이야.

정화는 지수의말이무슨뜻인지 짐짓 모르겠다는 듯 지수를 짓굿게 빤히쳐다본다.

 

그게……”

 

지수는무심코 내뱉은  말이었지만   말한 자신도 조금쑥스운지 말을  얼버버리고는 여전히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는 반딧불이로얼른시선을돌린다.그러다가는 문득 생각난 듯  걱정스런 시선으로 정화를다시 돌아본다.

 

정화야, 내일 부모님들을 구해내겠지?”

최선을 다하면 성공할 거야.

 

정화의  말은 진심이었다.지수는미소를띠우며고개를힘있게끄떡이었다.

 

그래.

너도 몸조심하고……

 

정화가미소를지으며말하자 지수는정화의손을 가만히 잡았다.  그녀는깜짝 놀란 듯 한 표정을 지었으나 손을 굳이 빼지는 않았다

 

정말사람의마음이란참묘했다. 정화는 겨우사흘만에 자신이 그토록 싫어하던지수가 정화의마음에애뜻하게 자리잡을 줄  에도몰랐다.냉혹함이 사라진 지수는 정말 다정다감한훈남이었. 그의따뜻한미소에정화는자신도모르게 차츰 마음을빼앗겨 갔다.

 

그때정화의마음속에 일어난 미묘한 변화를 축하라도 하듯 수많은반딧불이들이초롱불처럼그녀의머리위로몰려왔다. 파란색띠에에워싸여더청초하게보이는정화는전혀딴사람처럼보였다.

 

오늘밤은손님들이유난히많네!

내일의승리를축하해주는 것 같네.

 

정화의감탄사에지수는정화의손을꼭잡은채반딧불을바라보며즐거워했다.정화도 지수의 따뜻한손이 미세하게 떨리고차츰촉촉히젖어오는것을확실히느낄수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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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그래도 약속을 그럭저럭 지킨 것 같은데 문제는 저 꼬맹이들이군.”

 

검귀의 거치른 목소리에 잠깐 상념에 잠겼던 공노인은흠칫 놀라면서  다시 현실세계로 돌아왔다.

 

저 아이들도 위험에 빠진 제 부모들을 살리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이요.”

 

공노인의 강한 항변이었다.

 

그래도 그렇지.우리는 제놈들을 위해서 피를 흘렸건만 감히 우리를 잡으려고 달려들어?”

오죽하면 저러겠습니까?”

폐하의 비호만 아니었으면 저놈들도 이미 여기서 쫓겨났을텐데……이제는 오히려 우리가 피해다녀야 하다니……”

 

검귀는 솟구치는 불만 때문에 말이 안나오는 듯 잠시 말을 끊었다.그는 뒤에 장승처럼 서 있는 두 명의 사내들을 흘끔 쳐다본다.

 

그것 이리 내놔,”

 

검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명을 받은 사내는 등에 지고 있던 작은 자루를 풀어 공노인앞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유리병 같은 것들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나 났다.검귀는 자루속에 손을 넣더니 2홉짜리 녹색 소주병을 하나 꺼내들었다.소주병속에는 자주색 연기 같은 것이 가득 차 출렁이고 있었다. 

 

승상의 명이요. 이것으로 아이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시요.안 그러면 아이들의 목숨이 위험해집니다.”

위험해지다니……그게 무슨 말이요?”

 

소주병과 검귀를 번갈아 쳐다보는 공노인의 얼굴에 불길한 기색이 빠르게 퍼졌다.

 

 

 

잠시 후 지수와 영재 그리고 돈수가 공노인 혼자 있는 동굴속으로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성질 급한 영재가 쪼르르 공노인 앞으로 쫓아나왔다.

 

저 혹시 수상한 자들을 보셨나요?”

아니, 아무도 못보았는데……”

그래요. 이상한데……분명히  이 동굴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는데……지수야, 너도 분명히 보았지?”

으응.”

 

지수는 마지못해 대답을 했다. 사부의 거처에 뜬금없이 난입한 것이 못내 불편했기 때문이었다.영재는 동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두리번거린다.그 모양을 지켜보던 공노인은 짐짓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지수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 난리냐?”

무예24기 시범단을 찾던 중 수상한 남자들이 이 동굴속으로 뛰어들어오는 것을 보았어요.”

그래.여기에는 아무도 안왔는데.그런데 정말 그들과 싸울 작정이냐?”

 

공노인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꼭 그런 것은 아니예요.”

 

지수가 난감한 얼굴로 이야기를 꺼내자 동굴의 판자앞에 서있던 영재가 고개를 돌리며 크게 말했다.

 

하지만 여차하면 그들과 한판 붙을 거예요.”

그들은 너희들이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야.

하지만 저희는 총이 있어요.”

 

영재는 K2 소총을 치켜들고 대꾸했다.

 

그래도 그들은 너무 위험해. “

자꾸 위험하다고 하시는데 사부님은 혹시 그들에 대해서 뭔가 알고계시나요?”

 

영재의 눈빛이 예사롭지않게  반짝했다.오히려 공노인이 시선을 슬쩍 피할 정도였다.

 

알긴……시범단이 우리를 도와주기는 했지만 너무 잔인해보여서 그러는 거다.”

하지만 내일까지 그들을 잡지못하면 엄마 아빠가 다 죽는데 어떡해요.”

 

돈수가 눈시울을 붉히며 울먹이었다.

 

“황박사 그자가 정말 잔인한 짓을 하는구나.,”

 

공노인이 한숨을 내쉬자 판자벽앞에 서있던 영재가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사부님여기에왜 판자를 세우셨나요?”

찬 바람이 새어나와서 막았어.”

그래요?”

 

영재는 그렇게 대꾸는 했지만 뭔가 미심쩍인지 계속 그앞에서 얼쩡거리며 판자틈사이를 들여다 본다.그러자 공노인은 결심을 굳힌 듯 공노인은 묵묵히 듣고만 있는 지수에게 작은 자루를 내밀었다.

 

그들과 싸우지 말고 차라리 황박사하고 정면대결해라!

네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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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지월의 말이 사실이었단 말이야?

 

공노인은 정말 자신이 지하궁전을 발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짜릿한 전율을 온몸에 느꼈다그후 몇 개월을 정신나간 사람처럼 동굴을 파내려가던 그는  결국 숨겨진 지하궁전의 입구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그런데 지월이 예고했던 위험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어느 날 동굴의 벽을 삽으로 찌르자 공간이 확 뚫리면서 은은한 빛에 싸여있는 웅장한 성문이 눈앞에 확 드러났다.

 

이게 정말 아마라궁이야?”

 

탄성을 지르던 공노인은 조심스럽게 성문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휘둥그래진 눈앞에 수많은 옛날 누각들이 펼쳐졌다.그런데 갑자기 커다란 누각 한 쪽에서 창검으로 무장한 군졸들이 한 떼로 쏟아져나오더니 곧바로 공노인을 포위했다.포도대장같은 벙거지와 군복을 차려입은 자가 다짜고짜 지휘봉으로 공노인을 가리키며 눈을 부라렸다.

 

감히 아라마궁을 침범을 해?여봐라, 당장 저 놈의 목을 쳐라!”

 

벙거지의 호통에 군졸들은 주저없이 검과 창을 치켜들고는 공노인에게 달려들었다.영문도 모른 채 공노인의 목이 졸지에 달아날 판이었다. 그때였다.

 

멈춰라!”

 

어디선가 거친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제일먼저 공노인의 목을 향해 검을 내리치던 군졸 한 명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그의 등에 큼직한 화살이 꽂혀 파르르 흔들리고 있었다. 뜻밖의 사태에 깜짝 놀란  공노인이 주위를 살펴보니 전방에 있는 누각의 지붕위에서 복면을 쓴 무사들이 활을 겨누고 있었다. 군졸들이 놀란 틈도 없이 그들은 날렵하게 몸을 날려 땅위으로 사뿐히 내려섰다. 그리고는 검을 뽑더니 군졸들을 향해 범처럼 달려들었다.순식간에 서너 명의 군졸들이 피를 토하며 쓰러지자 포도대장은 황급히 검을 뽑아들고 직접 복면무사를 상대했다.당황했던 군졸들도 그 사이 복면무사들을 재빨리 에워쌌다.하지만 복면무사들의 무예가 워낙 출중해서 군졸들은 쉽게 침입자를 제압하지 못했다.

 

빨리 도망가지 않고 뭐해!”

 

이리떼처럼 달려드는 군졸 두 명을 한 칼에 해치운 복면무사 한 사람이 멍하니 그 격전을 지켜보고있는 공노인을 향해 버럭 고함을 쳤다.그제서야 공노인은 주춤 주춤 뒤로 물러섰다.그때 그의 도주를 눈치 챈 군졸 한 명이 창을 치켜들고 공노인에게 달려들다가 복면무사가 던진 단도를 등에 맞고는 구슬픈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기겁을 한 공노인은 자신이 뚫고왔던 동굴속으로 허겁지겁 뛰어들어갔다.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않고 냅다 도망쳤다. 

 

공노인은 숨을 헐떡이며 동굴로 돌아와서도 한동안 떨리는 마음을 도저히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어떤 때에는 자신이 목격한 것들이 모두 혹시 꿈이 아니었나 싶어 허벅지를 꼬집어보기도 했다.하지만 모든 일들이 끔찍한 현실이었다.그러자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두려움이 물밀듯이 그를 엄습해왔다.

 

(도대체 살기등등한 군졸들의 정체가 뭐지?)

 

그나마 다행인 것이 복면의 무사들이 자신을 도와준 점이었다.하여간 그는 영문도 모르고 죽을 뻔 하다가 간신히 구조당한 것이 매우 답답했다.하지만 다시는 그 지하궁궐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그러던 중 자신을 죽이려다 실패한 군졸들이 동굴을 따라 몰려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덜컥 겁이났다.

그는 급히 동굴을 다시 메꾸고 싶었지만 짧은 시간안에 길고도 긴 동굴을 다시 메꾼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급기야는 황금에 눈이 멀어 괜히 발굴을 시작했다는 뒤늦은 후회마저 들었다. 하여간 급한 대로 그는 동굴입구만 대충 흙으로 대충 막고는 그것도 미진해서 판자를 대고 못질을 했다.그러는 사이에 어느 덧 저녁이 되었다.

 

“……!”

 

깊은 생각에 몰두해있던 그는 등뒤에서 찬기운이 이는 것을 느꼈다. 뭔가 심상치않은 것을 느낀 공노인은 불안한 기색으로 뒤돌아보다 흠칫 놀랐다.눈앞에 웬 낯선 칼잡이가 검을 들고 서 있기 때문이었다.

 훤칠하게 키가 큰 칼잡이의 눈이 유독 가늘고 길게 째졌다.공노인이 벌떡 일어나려하자 칼잡이는 재빨리 칼을 뽑아 그의 목에 얹었다.피부깊숙히 스며드는 강철의 섬뜩함에 공노인은저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후후, 이제 네 목을 떼어야 할 때가 되었군.”

 

칼잡이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번쩍이는 검을 치켜들었다.

 

, 누구요?”

나는 네가 훔쳐본 아라마궁을 지키는 검귀장군이다.”

그런데 왜 나를 해치려는 거요?”

네가 우리 아마라궁을 보았기때문이다.모든 것이 네 탓이니 날 원망하지마라.”

도대체 그 따위 궁이 뭐길래 날 죽이려는 거요?”

감히 우리 궁을 폄하하다니……이놈!”

 

검귀는 당장이라도 공노인의 목을 베겠다는 기세로 칼을 치켜올렸다.공노인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그때 문득 칼과 칼이 날카롭게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꼼짝없이 죽는구나 했던 공노인은 무슨 일인가 싶어 슬그머니 눈을 떴다.그의 눈앞에서 웬 낯선 검이 검귀의 검을 가로막고 있었다. 덕분에 목숨을 구한 공노인이 얼른 그 검의 주인을 치켜올려보니 전의 그  복면무사가 서 있었다.

 

네 놈은 누구냐?”

 

당황한 검귀가 복면무사를 노려보며 소리치자 복면무사는 검귀의 칼을 서서히 밀어낸다.

 

난 이자의 수호무사다! 무고한 목숨을 해치지 말라!”

무고하다니? 이놈은 아마라궁을 위험에 빠뜨린 자이다.”

 

검귀는 복면무사에게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으려고 용을 쓰는 듯 서로 맞댄 두 개의 검이 부르르 떤다.슬쩍 밀렸던 복면무사의 검이 다시 검귀의 검을 밀쳐냈다.

 

언제까지 아마라궁이 숨겨질 것 같은가?”

네 놈 말투를 보니 폐하의 사주를 받은 것 같은데?”

 

복면무사를 향해 내뱉는 검귀의 얼굴에 굵은 핏줄이 우드득 일어섰다.다시 검귀의 검을 막아내느라고 힘겨운지 복면무사의 팔이 부르르 떤다

 

“……!”

후후, 그렇지만 어쩌겠느냐. 난 아마라궁을 지켜야한다는 승상의 명이 더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우리 모두는 폐하의 명만을 따라야 하오.”

 

되받아치는 복면무사의 목소리에 날이 잔뜩 섰다.하지만 검귀는 콧방귀를 꼈다.

 

, 무슨 소리야! 아무리 폐하라 해도 아마라궁을 위험에 빠뜨리면 따를 수 없어.”

따르지 않으면 반역으로 다스린다.”

나약한 왕이? 무슨 힘으로?”

내가 바로 폐하의 힘이다!”

 

화가 매우 난 듯 복면무사는 검귀의 검을 거칠게 밀어제치면서 고함을 쳤다.그 바람에 그의 칼 끝이 검귀의 목에 직접 닿게 되었다.복면에 뚫린 두 개의 구멍사이로 섬찍한 살기가 쏟아져나온다.그것에 흠칫 놀란 검귀는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검귀도 밀리면 안된다고 생각했는지 곧 다시 검을 고쳐잡고 공격자세를 취했다.

 

네놈이 날 대적하겠다고?”

내 검은 반역자를 용서치않는다!”

 

복면무사가 서슬 퍼렇게 나오자 검귀는 쉽게 덤벼들지 못한다. 결정적으로 복면무사의 무술수준이 그를 능가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좋아, 협상을 하지.”

 

검귀는 짐짓 호기롭게 검을 걷어들이더니 공노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신이 아마라궁과 이 동굴에 대해서 영원히 입을 다물겠다는 약속을 하면 오늘은 그만 물러가겠다.”

약속을 지키겠소.”

 

공노인은 누그러진 검귀의 태도가 다시 돌변할까봐 얼른 대답했다.그러자 검귀는 다시 험상궂게 말했다.

 

하지만 누구라도 우리 아마라궁에 들어오는 자가 있으면 당신이 누설한 것으로 알고 지체없이 당신의 목을 따러 오겠소.”

알겠소.”

우리가 밤낮으로 당신을 지켜보겠소.”

 

검귀가 협박하듯이 다시 공노인에게 쏘아부치자복면무사는 검귀의 목을 향해 검을 대고 허공에 쓰윽 긋는 시늉을 했다.

 

검귀, 너야말로 어설프게 이 어르신을 해치려하면 이렇게 될 줄 알아!”

 

복면무사의 경고에 검귀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그리고는 말없이 뒤로 물러서서는 왔던 길로 급히 돌아갔다.그러자 복면무사도 검을 칼집에 집어넣고는 공노인에게 말했다.

 

저자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좋겠소. 내가 당신을 지키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까.”

알겠소.”

 

 공노인은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그러다가 문득 묻는다.

 

그런데 왜 당신은 나를 지켜주는 것이요?”

그건 폐하의 깊은 뜻이니 묻지 마시요.”

 

복면무사는 짤막하게 대답을 하고는 뒤돌아서 아까 검귀가 사라졌던 방향으로 급히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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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공노인은 정화로부터 영산수호회 회의에서 무예24기시범단을 둘러싸고 격론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는 깊은 근심에 잠겼다.

혹시라도 아이들이 무예시범단을 만나러갔다가 부모들을 구하겠다는 욕심에 자칫 그들과 싸우기라고 하면 정말 큰일이었기때문이었다.

공노인이 그토록 걱정을 하는 까닭은 자칭 무예시범단이라는 자들이 지금은 비록 그들을 도와준 고마운 자들이었지만 동시에 매우 위험한 자들이라는 것을 그는 이미 겪어봤기 때문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아이들이 크게 다칠 것이 뻔했다. 그는 당시 자신이 시내에 볼 일이 있어  비상회의에 불참한 것을 뒤늦게 후회했다.

“……!”

어쨌든 그가 아이들을 찾아 급히 자리에 일어나려고 할 때 등쪽에서 뭔가 인기척이 있었다.그가 무심코 돌아보니 언제 나타났는지 세 명의 사내가 자신을 향해 조용히 걸어오고 있었다.얼핏 보아 붉은 갑옷차림에 커다란 검을 가슴에 품고있는 사내들은 그가 염려하고 있던 무예시범단들이었다. 가운데에 서 있는 훤칠한 자는 검귀라고 불리던 장수였다. 공노인은 그들을 대하는 순간 심장이 멈춰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 누구……”

우리는 며칠 전에 아이들을 도와줬던 무예24기시범단이오.”

, 그렇군요.”

공노인이 일부러 처음 보는 척 했다.그러자 검귀는 공노인을 유심히 쏘아본다.

우리는 이미 오랜 전에 알던 사이 아니요?”

“……”

, 너무 그렇게 시치미를 떼니 갑자기 서운해지려고 하는군.”

검귀는 계속 공노인의 반응을 떠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그래도 살아남기 위해서 공노인은 더욱 태연한 척 했다.

무슨 말인지?”

, 그동안 비밀을 잘 지켜왔으니 이제는 아는 척 해도 괜찮소.”

비밀이라니? 난 아무 것도 모르오.”

정말 옛날 일을 모른다는 말이요?”

“……”

검귀의 집요한 추궁에 공노인은 아예 입을 다물어버렸지만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소리가 얼마나 격렬했던지 검귀가 알아들을까봐 걱정이 들 정도였다. 그의 기억에 검귀는 몇번이나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아주 잔혹한 자였다.

15년 전 공노인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면 공영실 박사는 한국두뇌개발센타에서  지수에 대한 뇌실험 문제로 황박사와 심하게 다투다가 강검사의 부하들에 의해 강제로 쫒겨났었다.그후  여기 저기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팔달산에 거처를 만들었다

그렇게 10년을 세상을 등지고 그저 촌부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던 공노인은 어느 날 산책을 하다가 지월이라는 이상한 자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아니 저게 뭐야?

그날도 팔달산 정상에 있는 서장대로 향하는 오솔길을 따라 한가롭게 걷던  공노인은 건너편 산중턱에서 푸른 불빛이 번쩍하는 것을 우연히 목격하게 되었다.한바탕 소나기라도 쏟아지려나 싶어서 힐끔 하늘을 쳐다보았지만 오후 3시를 갓 넘긴 맑은 하늘은 비가 올 낌새가 아니었다.그가 잘못 보았나 하고 다시 걸음을 옮기는데 다시 푸른 불빛이 연달아 산중턱에서 다시 작렬했다.

"......!"

퍼뜩 심상치않은 일이 일어난 것을 직감한 공노인은 급히 그곳으로 뛰어갔다.헉헉거리며 산중턱에 도착해보니 전방 20미터 앞에서 자기 또래의 웬 중년 남자가 바닥에 앉아 열심히 땅을 파고있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 실례합니다.”

산속에서 오랫동안 사람을 만나지 못해 무척 적적했던 공노인은 반색을 하며 중년남자에게 다가가 슬쩍 말을 붙여보았다. 발굴용 작은 삽을 열심히 놀리며 바쁘게 땅을 파헤치던 중년남자는 동작을 멈추고 쓰윽 그를 올려다본다.초로에 접어든 남자의 수수한 얼굴에 흙부스러기 언뜻 언뜻 묻어있었지만 왠지 범상치 않은 위엄이 서려 있었다.

, 누구시죠?”

난 이 산속에 사는 공영실이라는 사람이오.”

. 난 지월(沚月)이라고 합니다.”

지월은 인상대로 붙임성이 있는 사람인 듯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가벼운 목례를 했다.

지월?”

”연못속의 달이라는 뜻입니다.

“재미있는 이름이군요.

미소를 지으며 이름의 의미를 되새기던공노인은 지월의 발 주변에 흙더미가 제법 쌓여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에게 물었다.

대체 이 산속에서 뭘 하는게요?”

별 것은 아니고……”

뭐 대단한 것이라도 묻혀있소?”

그동안 산속에서 무료하게 생활해왔던 공노인은 이야기를 재미있게 만들어가기 위해서 일부러 농담 비슷하게 말을 툭 던졌다.

그럼요.이 땅속에 지하궁전이 묻혀있는데……”

그런데 지월은 뜻밖에도 꺼림낌없이 자신의 속내를 드러냈다.

지하궁전요?”

아마라라고 불리는 궁전이요.”

지월은 아주 확신있게 고개를 끄떡이었다.공노인이 이거 또 황당무계한 소리야 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지월은 그것이 싫은지 자리에 다시 앉았다.그리고 삽으로 다시 땅파는 작업을 시작했다.

당신도 나를 미친 놈이라고 생각하는군요.”

당신이 고고학자라면 몰라도……”

고고학자는 아니지만 난 지하궁전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있소.”

그 증거라는 것이 대체 뭐요?”

그것이 말이요.”

그때부터 지월의 입에서 나온 지하궁전에 대한 이야기는 공노인에게는 다소 황당하게 들리는 면이 많이 있었다.그런데 듣다보면 묘하게 끌리는 점이 있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공노인은 깜짝 놀라며 얼른 공상가의 이야기에서 벗어났다. 하여간 지하궁전에 대한 존재 여부를 떠나서 공노인은 지월에게서 묘한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그래서 그는 틈날 때마다 지월에게 놀러가곤 했었다.갈 때마다 지월이 파들어간 동굴은 점점 깊어지고 넓어져 갔다.그런데 어느 날이었다.지월이 걱정스런 얼굴로 공노인에게 말했다.

이보게, 이제 이 일을 그만 해야겠네.”

왜 이제 정신을 차렸나?”

그게 아니고 놈들이 내 발굴을 알아챌까봐 그러네.”

놈들이라니?”

지하궁전에서 사는 자들이지.그들은 자신의 세계가 세상에 드러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네.”

다들 자신들의 세계가 까발겨지는 것을 싫어하잖아.”

공노인은 이내 실실 웃으면서 맞장구쳤다.

농담이 아니래두. 문제는 내가 직접 이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거야.”

말을 마친 지월은 지긋이 공노인을 쳐다본다.공노인은 화들짝 놀라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보고 대신 파라고?”

그랬으면 정말 좋겠는데.”

지월의 눈빛이 아주 진지해졌다.

나보고 몽상가가 되라고?”

몽상가가 아니라 위대한 발굴자가 되는 거라고!인류를 위해서……”

지월의 얼굴빛이 매우 진지해졌다.그러자 공노인은 크게 손사래를 쳤다.

그건 그렇다치고 자네 말대로 파고들어가다가 지하궁전에 사는 놈들이 나를 죽이려고 들면 난 어쩌라구?”

그건 자네 팔자에 맡겠야지. 어쩌겠나?”

, 그런 위험한 일을 시켜놓고는 그런 태평스런 말을 해?난 못하네!”

그때 공노인은 그렇게 강력하게 거절했었고 며칠 후 지월은 이상하게 바람처럼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그가 떠난 후 발굴용 삽을 한참 바라보던 공노인은 호기심에 이끌려 삽을 들고 지월이 파내던 곳을 조심스럽게 굵어보았다.흙부스러기가 와르르 바닥에 떨어졌는데 흙더미가 노랗게 반짝거렸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가 손가락으로 찍어보자 노란빛 금속가루가 섞여있었다. 그의 놀란 시선이 동굴벽에 꽂혔다.흙더미가  떨어져나간 부분에 공노인을 반기듯 황금맥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이럴 수가! 이것 금이잖아!

 

탄성을 지르던 공노인은 삽으로 허겁지겁 동굴벽을 파헤치기 시작했다.생각보다 흙은 매우 부드러워서 금방 깊이 파낼 수 있었다.금맥의 크기가 점점 커지면서 그의 흥분도 급상승했다. 공노인에게 엄청난 흥분을 안겨준 금맥은 끝없이 이어졌다.그가 금맥을 정신없이 파낼수록  동굴은 더욱 깊어졌다. 발굴을 시작한 지 하루 만에 어른 한 사람이 설 수 있는 정도의 긴 터널이 만들어졌다.

“……!”

그런데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금맥은 어느 순간 딱 끊어지고 말았다. 대신 금맥이 끈어진 곳에서  계단의 한 부분인 듯한 대리석이 살짝 보였다. 그 순간 금맥에 쏠렸던 것보다 더 큰 흥분이 폭발했다한참동안 그가 정신없이 흙을 파헤쳐 들어가자 놀랍게도 완전한 모양의 계단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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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수는 그런 영재를 한번 마땅치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활터를 가로질러갔다.   곧 그곳에 규모가 작은 누추한 목조 건물 화령전(華寧殿)이 나타났다.

 

화령전은 1800 6 28일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순조(純祖)가 그의 덕을 기리고자 세운 건물로 안에 정조의 초상화를 모시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그래서 그런지 지수일행은 정전(正殿)인 운한각(雲漢閣)은 이웃 행궁과는 달리 전혀 단청을 하지 않아 딴 세상의 건물처럼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올라가지 마세요’라는 푯말이 세워져있는 운한각의 짙은 갈색의 마루을 쭉 살펴보니 정면에 황금색 휘장이 양쪽으로 접혀져 있는 공간이 보인다.창호지 문이 양 옆으로 활짝 열려진 가운데에 검은 색 깃털이 달린 망건을 쓰고 노란색과 붉은 색이 화려하게 어울려진 용포위에 검은 색 군복을 차려입은 정조대왕이 부채를 위엄있게 손에 쥐고 지수를 바라보고 앉아있다.마치 살아있는 듯한 강하고도 맑은 왕의 눈빛에 지수는 슬그머니 시선을 내리깔았다.마루의 오른 쪽 구석에는 한때 주인의 영혼을 태워왔던 가마가 또다른 외출을 꿈꾸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조바심이 난 영재가 마루안쪽까지 살펴보겠다는 듯 신발을 신은 채 마루위로 올라섰다. 그 모습을 보고 지수는 눈쌀을 찌푸렸다.

 

어딜 들어가!

“가마뒷쪽을 뒤져보려고.

저건 영혼을 실고다니던 가마였다는데  괜찮겠어?

뭐 어때!

 

영재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얼른 마루 기둥에 붙여진 가마에 대한 안내판을 흝어보고는 주춤한다

"그만 딴곳으로 가자."

 

 지수가 재촉하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영재는 두 말없이 가마를 포기하고 마당으로 훌쩍 내려섰다.

 

지수 일행이 화령전에서 빠져나와 화성행궁의 오른쪽 담장을 따라 다시 한 40m 정도  올라가니 득중정(得中亭)이라는 현판이 붙은 웅장하고 수려한 누각이 나타났다.정조대왕이 활쏘기를 했다는 곳이다.그 너머로 수백년 된 향나무가 운치있게 솟아나 있는 것이 보였다.

 

, 이제 행궁 본채다.

 

영재는 뭐가 그리 급한지 얼른 행궁의 긴 담장의 중간에 에 나 있는 어느 문으로 겁없이  쏙 들어갔다.곧바로 동서남북으로 연결된 미로와 같은  작은 방들이 수없이 전개되었다.

그 각각의 방에는 환관, 나인, 상궁 등의 조선시대의 생활상을 잘 이해할 수 있겠끔 소소한 생활용품들이 단촐하게 놓여져 있었다.하지만 그 어느 방에도 그 용품들을 썼었을 주인공들의 모습은 통 보이지 않는다. 마치 모두 동네마실이라도 나간 듯 했다.지수는 흔한 마네킹이라도 하나씩 갖다놓았으면 훨씬 더 실감이 났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이윽고 그들이 오밀조밀한 복래당(福來堂), 장낙당(長樂堂)을 거쳐나오니 툭 터진 마당이 드러나고 왼쪽 중앙에 봉수당(奉壽堂)의 전면이 지수 일행을 맞이했다. 그 옛날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정순왕후를 위해 환갑연을 베풀어 주었다는 장소였다.

 

“여기에도 그자들의 흔적은 없군.

 

영재는 약간 불만스러운 듯이 뇌까리더니 봉수당의 정면에 있는 중양문을 통해 다음 건물로 나갔다.그곳도 역시 넓은 마당이었는데 잡초만 무성할 뿐이었다. 그들이 다시 좌익문을 밀치고 앞으로 나아가니 30m 전방에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新豊樓)의 웅장한 자태가 한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화성행궁의 마당중에 제일 넓어보이는 마당에 놀랍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누워 있는 모습이 보였다

 

!"

 

사람들의 무리를 발견한 지수 일행은 그토록 찾아헤매던 무예시범단이 마당에 모여 낮잠을 자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얼른 기둥뒤로 몸을 숨겼다.영재는 K3소총으로 그들을 조준했으나 총구가 부르르 흔들렸다.

 

그런데 좀 이상한데.

 

마당을 가득 채운 채 누워있는  그들의 동향을 예리하고 긴장된 눈빛으로 살펴보던 지수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보초도 없이 무방비상태로 낮잠을 자는 것도 수상했지만 꿈쩍도 안하는 것이 더욱 이상했다.마침내 지수는 포복을 하고 슬금 슬금 장용영이 모여있는 곳으로 접근해갔다.

 

이런,

 

혹시 들키지나 않을까 싶을 정도로 너무 바짝 다가갔던 지수는 마침내 고개를 쭉 들고 탄식을 했다.

 

모두 마네킹이잖아.

 

그의 말에 영재와 돈수는 그제서야 안심을 하고는 황급히 지수곁으로 달려왔다.그리고 두 사람의 눈이 엄청 커졌다.

 

정말이네.

그런데  우리가 전에 봤던 시범단하고 차림새가 너무 똑같아.

 

영재와 돈수는 금방이라도 벌떡 일어날 것 같은 퇴색한 붉은 갑옷을 입은 마네킹들을 이리 저리 굴려보며  유심히 살펴보았다.

 

정작 찾으려는 자들은 안보이고 마네킹만 우글거리다니……에잇!

 

영재는  화가 나는 듯 곁에 있던 병사 마네킹을 발로 힘껏 차자, 팔 하나가 뚝 떨어져 저만치 날아간다.

 

그만해라아무리 버려진 마네킹이라도 그러면 안돼지.

도대체 그자들은 어디에 숨은 거야?

 

영재는 씩씩거리며 마당 주변을  이리 저리 돌아다니며 두리번거린다 지수도 신풍루쪽으로 다가가 문틈사이로 바깥 동정을 살피던 지수가 놀란 얼굴로 돌아본다.

 

“쉿! 광장에 보안군들이 잔뜩 깔려 있어.

 

보안군이라는 말에 신풍루의 좌우에 있는 남군영과 북군영을 기웃거리던 영재는 움찔하여 걸음을 멈추었다.잠시 그들이 숨죽이고 있자 광장너머에서 차소리가 신풍루의 정문 사이로 크게 들려왔다. 그속에 보안군들이 이야기하는  소리도 가깝게 들려왔다.그들이 금방이라도 행궁안으로 들이닥칠까봐 영재는 겁을 잔뜩 집어먹고 뒤로 물러섰다.

 

 “빨리 다른 건물로 가자.

 

영재와 돈수는 느티나무 아래에 있는 재빨리 쪽문안으로 도망쳤다.그때 지수는 중양문 사이로 누군가 바람처럼 뛰어가는 것을 발견했다.

누구야!”

지수는 고함을 치며 그곳으로 뛰어갔다.하지만 무인복장을 한 사내 두 명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을 치다가 행궁담장에 다다르자, 그것을 훌쩍 뛰어넘는데 보통 사람의 행동이 아니었다.

거기 섯!”

지수도 놓칠세라 행궁담장을 넘으려는데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겨우 그가 담장에 올라서서 보니 정체불명의 사내들은 팔달산 기슭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공노인이 거주하는 부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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