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의 밤,
시내에 어둠이 내리면 빽빽하게 들어선 빌딩숲에서 쏟아져 나오는 불빛들은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듯 밤하늘의별들로 변신을 한다. 지상에 별들이 가득 차자 마치 하늘과 땅이 뒤바뀐 듯 하다.그런 어지러운 별들사이로 황금색 빛으로 가득 찬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모습이 강렬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삼라정보탑의 화려한 야경이었다. 하지만 지수는 그런 정보탑에서 바벨탑의 분위기가 느껴져 얼른 시선을 팔달산의 정상쪽으로 돌려버렸다.
(......!)
하지만 지수가 서있는 화성남쪽성곽남포루에서는 맞은 편의 울창한 소나무숲 때문에 정상에 있는 서장대가 거의 보이지않는다. 마치 전혀 떠오르지않는 깜깜한 그의 기억과 똑같았다.
(나는왜지금팔달산에있는것일까?)
이상하게도 지수는자신이언제 팔달산에들어왔는지 전혀 기억을 할 수 없었다. 심지어는자신의가족관계도전혀떠오르지않아 정말 괴로왔다. 팔달산의으슥한동굴에서 만난 공노인만이 유일하게 떠오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공노인과 자신이 과거에 무슨 인연을 맺고있었는지는 전혀 종잡을 수 없었다. 때문에 지수는 마치 자신의 뇌의 일부가 통째로 잘려나간 듯한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에 깊게 빠지곤 했었다.
“……!”
그때문득밤하늘의별들이어두운숲속으로우르르쏟아졌다. 지수는 웬 별똥별인가 싶어 눈을 크게 뜨고 숲속을 유심히살펴보았다.그런데땅으로마구쏟아지던별들은떼를지어출렁출렁움직이며위로상승하더니 신나게춤추며 자신이 있는 곳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저건......)
한밤중에 지수를 놀라게한 별똥별은 다름아닌초록빛의반딧불이었다. 그러고보니 곤히 잠든 팔달산 주변이 어느새 온통반딧불이천지로 변했다.그는갑갑하고 우울했던기분을떨쳐버리기위해서환호성을지르며초록빛의 반딧불이의 바다로 첨벙 첨벙 뛰어들었다. 그리고 어린 아이처럼 팔짝 뛰면서 두손으로반딧불이를잡으려했다. 그러나반딧불이들은슬쩍슬쩍그의손길을잘도빠져나간다.
“......!”
그런데지수가정신없이반딧불이의 바다를 헤치고 뛰어다니다가문득앞을바라보니누군가도자기처럼반딧불이를잡기위해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거기누구야?”
그사람도지수의목소리를들었는지흠칫놀라며동작을멈추었다. 그리고잠자코지수를바라만본다. 지수가그쪽으로서서히걸음을옮기자문득 바람결에 여자특유의알싸한 향기가실려온다.
“ 정화 ?”
대뜸 그녀의이름을부르는지수의가슴이 갑자기 마구뛰기시작했다.
“지수?”
반색을하며지수의앞으로튀어나온사람은예상대로정화였다. 머리를 뒤로 묶은 정화의웃는얼굴이밤이슬에청초롬하게젖어있었다.
“이시각에웬일이야?”
모두가잠든깊은시각에뜬금없이정화를만나게되자 지수의목소리가 괜시리 떨렸다.
“응. 잠이 안와서 나와보니 사방이온통푸른불빛이잖아. 난처음엔별이떨어지는 줄 알고 소원이나 빌려고 했는데 알고보니 반딧불이들이잖아. 그래서 요녀석들을 혼내주고 있는 거야. 호호, ”
정화는자신이 생각해도 말같지 않은 변명을 하고 있다고 느꼈는지 멋적은 웃음을 살짝 날린다.그런 정화의 웃음과 수수한외모는언제나 지수의 공허하고 외로운 마음을 달래주곤 했었다.
“그래 나도 혼좀 내줄까?”
지수도 한 마디 던지고 마침 눈앞으로 날아가는 반딧불이를 오른손으로 날세게 훔친다.그러나 이번에도 반딧불이는 그의 손길을 교묘하게 빠져나간다. 둘 사이의 어색함을 숨기려는 듯 정화가 반딧불이를 얼른 따라간다. 지수는 또다른 반딧불이를 잡으려고 달음질쳤다.한참동안 애꿎은 반딧불이를 잡으려고 이리 저리 따라다니던 두 사람은 다리가 아파오자 결국 금잔디광장의누각난간에나란히걸터앉고 말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반딧불이가펼치는밤의무도회만즐겼다. 이윽고지수가먼저말문을열었다.
“정화야, 나는왜엄마에대한기억이없을까?”
“엄마기억?”
비록 느닷없는 질문이었지만 이미 정화는 그의 고뇌를 안다는 듯 그녀의 예쁜 눈에 걱정이 가득 찼다.
“다들엄마아빠를구하겠다고 난리인데 나만 혼자야.”
“……”
“마치머리가뻥뚫린것같이아무것도생각이안나. 왜그러지?”
두려움과걱정이가득찬지수의 맑은 시선이정화의 까만 눈동자에머물었다.한순간정화는괴로와하는지수가안돼보여서그의과거를모두밝혀버릴까하는생각이 불쑥 들었다.그러나이후벌어질혼란과두려움을 감당해낼 자신이 없어 정화는 그냥입을다물고말았다.
“시간이 지나면 좋아지겠지.”
“아니, 절망적이야.”
“지수야,”
안타깝게 지수의 이름만 부르는 정화의 눈빛이 어두운 밤의 색깔보다 더 어두워지는 것을 본 지수는 얼른 화제를 바꾸기로 했다. 정화라고 뭐 특별한 대답을 해주겠는가 싶고 지금 이 순간에는 그저 정화가 자신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고 행복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너에대한내감정이싹틀수있는자리는남아있어서그나마다행이야.”
정화는 지수의말이무슨뜻인지 짐짓 모르겠다는 듯 지수를 짓굿게 빤히쳐다본다.
“그게……”
지수는무심코 내뱉은 말이었지만 말한 자신도 조금쑥스운지 말을 얼버버리고는 여전히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는 반딧불이로얼른시선을돌린다.그러다가는 문득 생각난 듯 걱정스런 시선으로 정화를다시 돌아본다.
“정화야, 내일 부모님들을 구해내겠지?”
“최선을 다하면 성공할 거야.”
정화의 말은 진심이었다.지수는미소를띠우며고개를힘있게끄떡이었다.
“그래. ”
“너도 몸조심하고……”
정화가미소를지으며말하자 지수는정화의손을 가만히 잡았다. 그녀는깜짝 놀란 듯 한 표정을 지었으나 손을 굳이 빼지는 않았다.
정말사람의마음이란참묘했다. 정화는 겨우사흘만에 자신이 그토록 싫어하던지수가 정화의마음에애뜻하게 자리잡을 줄 꿈에도몰랐다.냉혹함이 사라진 지수는 정말 다정다감한훈남이었다. 그의따뜻한미소에정화는자신도모르게 차츰 마음을빼앗겨 갔다.
그때정화의마음속에 일어난 미묘한 변화를 축하라도 하듯 수많은반딧불이들이초롱불처럼그녀의머리위로몰려왔다. 파란색띠에에워싸여더청초하게보이는정화는전혀딴사람처럼보였다.
“오늘밤은손님들이유난히많네!”
“내일의승리를축하해주는 것 같네.”
정화의감탄사에지수는정화의손을꼭잡은채반딧불을바라보며즐거워했다.정화도 지수의 따뜻한손이 미세하게 떨리고차츰촉촉히젖어오는것을확실히느낄수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