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수는 그런 영재를 한번 마땅치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활터를 가로질러갔다. 곧 그곳에 규모가 작은 누추한 목조 건물 화령전(華寧殿)이 나타났다.
화령전은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순조(純祖)가 그의 덕을 기리고자 세운 건물로 안에 정조의 초상화를 모시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그래서 그런지 지수일행은 정전(正殿)인 운한각(雲漢閣)은 이웃 행궁과는 달리 전혀 단청을 하지 않아 딴 세상의 건물처럼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올라가지 마세요’라는 푯말이 세워져있는 운한각의 짙은 갈색의 마루을 쭉 살펴보니 정면에 황금색 휘장이 양쪽으로 접혀져 있는 공간이 보인다.창호지 문이 양 옆으로 활짝 열려진 가운데에 검은 색 깃털이 달린 망건을 쓰고 노란색과 붉은 색이 화려하게 어울려진 용포위에 검은 색 군복을 차려입은 정조대왕이 부채를 위엄있게 손에 쥐고 지수를 바라보고 앉아있다.마치 살아있는 듯한 강하고도 맑은 왕의 눈빛에 지수는 슬그머니 시선을 내리깔았다.마루의 오른 쪽 구석에는 한때 주인의 영혼을 태워왔던 가마가 또다른 외출을 꿈꾸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조바심이 난 영재가 마루안쪽까지 살펴보겠다는 듯 신발을 신은 채 마루위로 올라섰다. 그 모습을 보고 지수는 눈쌀을 찌푸렸다.
“어딜 들어가!”
“가마뒷쪽을 뒤져보려고.”
“저건 영혼을 실고다니던 가마였다는데 괜찮겠어?”
“뭐 어때!”
영재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얼른 마루 기둥에 붙여진 가마에 대한 안내판을 흝어보고는 주춤한다.
"그만 딴곳으로 가자."
지수가 재촉하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영재는 두 말없이 가마를 포기하고 마당으로 훌쩍 내려섰다.
지수 일행이 화령전에서 빠져나와 화성행궁의 오른쪽 담장을 따라 다시 한 40m 정도 올라가니 득중정(得中亭)이라는 현판이 붙은 웅장하고 수려한 누각이 나타났다.정조대왕이 활쏘기를 했다는 곳이다.그 너머로 수백년 된 향나무가 운치있게 솟아나 있는 것이 보였다.
“자, 이제 행궁 본채다.”
영재는 뭐가 그리 급한지 얼른 행궁의 긴 담장의 중간에 에 나 있는 어느 문으로 겁없이 쏙 들어갔다.곧바로 동서남북으로 연결된 미로와 같은 작은 방들이 수없이 전개되었다.
그 각각의 방에는 환관, 나인, 상궁 등의 조선시대의 생활상을 잘 이해할 수 있겠끔 소소한 생활용품들이 단촐하게 놓여져 있었다.하지만 그 어느 방에도 그 용품들을 썼었을 주인공들의 모습은 통 보이지 않는다. 마치 모두 동네마실이라도 나간 듯 했다.지수는 흔한 마네킹이라도 하나씩 갖다놓았으면 훨씬 더 실감이 났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이윽고 그들이 오밀조밀한 복래당(福來堂), 장낙당(長樂堂)을 거쳐나오니 툭 터진 마당이 드러나고 왼쪽 중앙에 봉수당(奉壽堂)의 전면이 지수 일행을 맞이했다. 그 옛날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정순왕후를 위해 환갑연을 베풀어 주었다는 장소였다.
“여기에도 그자들의 흔적은 없군.”
영재는 약간 불만스러운 듯이 뇌까리더니 봉수당의 정면에 있는 중양문을 통해 다음 건물로 나갔다.그곳도 역시 넓은 마당이었는데 잡초만 무성할 뿐이었다. 그들이 다시 좌익문을 밀치고 앞으로 나아가니 30m 전방에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新豊樓)의 웅장한 자태가 한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화성행궁의 마당중에 제일 넓어보이는 마당에 놀랍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누워 있는 모습이 보였다
“쉿!"
사람들의 무리를 발견한 지수 일행은 그토록 찾아헤매던 무예시범단이 마당에 모여 낮잠을 자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얼른 기둥뒤로 몸을 숨겼다.영재는 K3소총으로 그들을 조준했으나 총구가 부르르 흔들렸다.
“그런데 좀 이상한데.”
마당을 가득 채운 채 누워있는 그들의 동향을 예리하고 긴장된 눈빛으로 살펴보던 지수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보초도 없이 무방비상태로 낮잠을 자는 것도 수상했지만 꿈쩍도 안하는 것이 더욱 이상했다.마침내 지수는 포복을 하고 슬금 슬금 장용영이 모여있는 곳으로 접근해갔다.
“이런,”
혹시 들키지나 않을까 싶을 정도로 너무 바짝 다가갔던 지수는 마침내 고개를 쭉 들고 탄식을 했다.
“모두 마네킹이잖아.”
그의 말에 영재와 돈수는 그제서야 안심을 하고는 황급히 지수곁으로 달려왔다.그리고 두 사람의 눈이 엄청 커졌다.
“정말이네.’
“그런데 우리가 전에 봤던 시범단하고 차림새가 너무 똑같아.”
영재와 돈수는 금방이라도 벌떡 일어날 것 같은 퇴색한 붉은 갑옷을 입은 마네킹들을 이리 저리 굴려보며 유심히 살펴보았다.
“정작 찾으려는 자들은 안보이고 마네킹만 우글거리다니……에잇!”
영재는 화가 나는 듯 곁에 있던 병사 마네킹을 발로 힘껏 차자, 팔 하나가 뚝 떨어져 저만치 날아간다.
“그만해라. 아무리 버려진 마네킹이라도 그러면 안돼지.”
“도대체 그자들은 어디에 숨은 거야?”
영재는 씩씩거리며 마당 주변을 이리 저리 돌아다니며 두리번거린다 지수도 신풍루쪽으로 다가가 문틈사이로 바깥 동정을 살피던 지수가 놀란 얼굴로 돌아본다.
“쉿! 광장에 보안군들이 잔뜩 깔려 있어.”
보안군이라는 말에 신풍루의 좌우에 있는 남군영과 북군영을 기웃거리던 영재는 움찔하여 걸음을 멈추었다.잠시 그들이 숨죽이고 있자 광장너머에서 차소리가 신풍루의 정문 사이로 크게 들려왔다. 그속에 보안군들이 이야기하는 소리도 가깝게 들려왔다.그들이 금방이라도 행궁안으로 들이닥칠까봐 영재는 겁을 잔뜩 집어먹고 뒤로 물러섰다.
“빨리 다른 건물로 가자.”
영재와 돈수는 느티나무 아래에 있는 재빨리 쪽문안으로 도망쳤다.그때 지수는 중양문 사이로 누군가 바람처럼 뛰어가는 것을 발견했다.
“누구야!”
지수는 고함을 치며 그곳으로 뛰어갔다.하지만 무인복장을 한 사내 두 명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을 치다가 행궁담장에 다다르자, 그것을 훌쩍 뛰어넘는데 보통 사람의 행동이 아니었다.
“거기 섯!”
지수도 놓칠세라 행궁담장을 넘으려는데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겨우 그가 담장에 올라서서 보니 정체불명의 사내들은 팔달산 기슭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공노인이 거주하는 부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