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신은 얘기나 좀 하자고 말했다 그리고 신은
한스 라트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스 라트의 이 소설은 출간 전 '7인의 작가전'이라는 이름으로 연재되었다. 그 때도 느낀 거지만 진짜 골 때린다. 순화된 표현을 찾아봤지만 이 표현이 딱 맞는 것이,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범상치 않다. 먼저 주인공 야콥은 심리 치료사인데,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아주 다양한 문제를 안고 있다. 석 달 전 이혼했는데(그는 부부 상담도 한다) 상담소도 잘 안 되어 집세도 못 낼 지경이다. 가족 소개를 해볼까. 유명 심리학자였던, 돌아가신 아버지와 강압적이고 통제적인 사랑을 주는 어머니, 실력있는 투자가이자 바람둥이 남동생까지 제 잘난 맛에 사는 사람들이다. 게다가 어머니와 소름끼치도록 비슷한 전 부인 엘렌은 천 억대 자산가이다. 소개 글만 봐도 갑갑하지 않은가? 이들은 하나같이 야콥 야코비를 압박하는 사람들로, 신랄한 혀를 가질 수 밖에 없었겠구나 수긍하게 만든다. 사건은 어느 밤, 전 부인이 현관문을 두드리면서 시작된다. 사실 이유는 다른 것 같지만, 지금의 결혼생활을 위해 상담이 필요하다는 엘렌이다. 그녀와 투닥거리던 야콥은 전 부인의 현 남편(권투선수, 페더급)의 방문을 맞이하고 인사를 나누기도 전, 총알 주먹에 코를 맞아 기절한다.


구급차에서 깨어난 후, 진료를 위해 응급실에서 대기하는 야콥에게 40대 후반의 남성이 말을 건넨다. 서커스 어릿광대로 일하는 그의 이름은 아벨 바우만. 그는 심장 주변이 따끔거린다며 심리치료의 필요성을 느낀다는데 마침 야콥 야코비가 심리 치료사이지 않은가! 어차피 빈털터리인 야콥은 마지막 환자일지도 모를 그와 상담을 시작한다. 아침식사를 함께 하다 우연히 다시 코를 얻어맞은 야콥은 병실에서 깨어나고, 동생과 어머니가 찾아와 한바탕 난리를 벌인다. 잠들었다 깨어나 보니 다인실이 아니라 독실이다. 갑자기 나타난 아벨은 의사 가운을 입고 있는데 심지어 회진도 돌았다고 한다. 상황 파악이 끝나기도 전, 경찰관이 아벨을 타인 사칭 혐의로 연행하고, 환자에 대한 책임감을 느낀 야콥도 동행한다. 알고 보니 아벨은 상습범이란다. 유치장에서 알아낸 바로는 의사, 건축가, 판사, 검사, 폭파 전문가, 은행 직원, 핵물리학자, 소방대원, 선장, 기장 등의 행세를 했다는데 믿어야할지 말아야할지. 담당 환자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는 야콥은 농담반 진담반으로 「혹시 당신이 신이라도 되나요?」라고 묻고 아벨은 그렇다고 한다. 자기가 신이라는 것이다!


어쩌다보니 아벨의 가족을 만나러 함께 뮌헨으로 향하는 야콥. 아벨에겐 아들도 있단다! 전 부인의 이름은 무려 마리아! 그녀의 남편은 목수 요셉! 심지어 신앙심도 아주 깊다고 한다. 골 때리죠? 다행히도 아들의 이름은 크리스티안, 수도원에 들어간 수사라 한다. 이미 가족들에겐 자신이 신이라고 커밍아웃한 아벨. 그는 정말 ‘신’일까? 아니면 정신 상태에 문제가 있는 ‘사람’일까?


우리는 타인의 주장을 믿기 위해 근거를 제시할 것을 요구한다. 야콥도 그러했고, 요셉과 마리아도 그러했다. 아벨은 적정한 수준에서 증명하려 애쓰나, 설득하기는 쉽지 않다. 어떤 소설의 세계관에서는 신의 힘이 사그러드는 이유가 사람들의 믿음이 줄어서라고 했다. 아벨도 그런 뉘앙스의 이야기를 한다. 신이 있다면 전쟁, 고문과 같은 잔인한 ‘현실’을 모른 체 할 리 없다. 그런 말에 나름의 변명을 펼치기도 한다. 이런 눈속임이 아닌 기적을 불러 보시지? 라는 말에도 신으로서의 고충을 털어 놓는다. 이쯤 되면 독자들마저도 어리둥절하다. 이 사람이 정말 신인지, 아니면 달변의 사기꾼인지.


아벨이 사기꾼이라는 전제로 이야기해보면, 그의 논리에는 오류가 있다.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하면서도 ‘신’으로서 아벨은 마치 유희를 하듯, 미시적 역사에 한 발 걸치고 있었다. 카지노 등지에서 돈을 따는 것만으로, 혹은 잔에 물을 채우는 등의 눈속임으로는 그가 ‘신’이라는 증거가 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과학이라는 도구가 있지 않은가!) 또 이야기는 야콥의 시선으로 전개되는데 현재 그는 심신이 꽤 미약해진 상태다. 코뼈가 내려앉은 이후 계속 같은 부위를 맞아 쓰러지는 데다, 돈도 없고 집도 없고, 동생은 날랐고, 엄마는 자신을 믿지 않고, 왜인지 기댈 만한 친구도 없다. 전 부인은 묘하게 나를 스토킹하고 있고 상담소도 없는 내게 유일한 환자는 자신이 신이라고 주장하는 중년 남성(직업: 광대, 사는 곳: 외곽 트레일러)이다. 과연 야콥이 제 정신으로 이 모든 일을 겪었다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아벨의 말이 진실이라는 가정 하에서 생각해보면, 그가 자신이 신임을 증명한다고 이른바 ‘기적’을 일으킨다고 생각해보자.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를 믿을까? 독일이나 미국까지 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에서도 재림 예수라 자칭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우리는 그들을 사기꾼이라 부른다. 또 종교적 광신에 대한 예는 역사적으로 이어져 왔으니 부작용이 너무 크다. 과학적으로 그의 존재와 기적을 증명하기 위해 매달리는 사람, 그를 사기꾼이라 고소할 단체들, 이를 취재하는 미디어들. 성경에서는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은 제자 토마스가 이런 말을 듣는다.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행복하다.’ 종교적 믿음과 현실적 회의 사이는 이렇게나 멀다.


하지만 소설을 읽다보면 이런 의심은 떠오르지도 않는다. 재미있어 다음 장을 넘기기에 바쁠 뿐이다. 어쩌면 자신이 신이라고 주장하는 남자를 만나 인생을 다시 살게 된 야콥이야말로 제대로 된 상담을 받은 게 아닐까. 조금은 급하게 마무리되는 것 같긴 하지만, 그 안에서 풀어내는 유머와 휴머니즘, 적절한 종교문제 마무리까지 나무랄 데 없는 소설이다. 그나저나 오늘 밤에는 자기 전에 기도나 한 번 해야겠다. 곧 크리스마스이기도 하니, 신과 다이렉트로 얘기나 좀 나눠야지.


* 야콥의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얼마 전 출간된 『악마도 때론 인간일 뿐이다』에서는 ‘악마’의 방문을 받는다. 본격 신계 전문 심리치료사…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니데이 2015-12-21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웃으면 안되는데;;
하면서 읽었어요,
재미있었어요, 에이바님 좋은하루되세요^^

에이바 2015-12-22 14:40   좋아요 1 | URL
웃으면서 읽었습니다. 서니데이님도 좋은 하루 되시길 바라요^^

서니데이 2015-12-22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이바님, 편안하고 좋은, 화요일 밤 되세요.^^

에이바 2015-12-24 13:53   좋아요 1 | URL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었네요. 서니데이님 2015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좋은 분들과 행복한 한 해 마무리 하시길 바랍니다. ^^

후애(厚愛) 2015-12-23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편안한 오후 되시고, 저녁 맛 있게 드세요.^^

에이바 2015-12-24 13:54   좋아요 0 | URL
후애님도 식사 맛있게 하셨나요? 이렇게 빨리 2016년이 올 줄은... 시간이 참 빨리 가는 것 같아요. 편안하고 행복했던 한 해가 되셨길 바랍니다. ^^

AgalmA 2015-12-24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보고 궁금하던 차 였는데, 표지랑 내용이 너무 잘 어울려욧ㅎㅎ! 아, 골 때려ㅋㅋ

에이바 2015-12-24 20:47   좋아요 1 | URL
읽으면 더 그래요 ㅎㅎ 악마가 찾아온 신간은 한 술 더 뜰 것 같아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