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대학생시절 서양정치사상의 고전을 소개한 책을 읽다가 뭔 바람이 불었는지 아리스토텔리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랑 플라톤의 『국가』를 덜컥 구매한 적이 있다. 꽤 오랫동안 책장의 한켠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결국 근 몇년동안 잦았던 이사를 통해. 결국 처분할 수 밖에 없었다. 무겁기도 무겁고... 읽을 것 같지가 않았다.(사놓고 안 읽었다는 얘기다.ㅡㅡ)
이렇듯이 고전은 진짜 스스로는 못 읽겠다고 느꼈었다.
흘러흘러 작년 말부터 우연한 기회에 참가한 여성주의 책 읽기 모임에서 7월 선정도서로 이 책 『여성주의 고전을 읽는다』로 정했다.
어.. 고전?..앞 전에 읽었던 책들도 쉬운건 아니였지만 고전을 다룬 책을 드디어 접하는 것이다.
(사실 이 책을 6월 도서이자 이 책에 다루었던 파이어스톤의 『성의 변증법』과 동시에 읽었긴 하지만 말이다. ^^:;)
그래. 생각해보니 이왕 여성주의 책을 읽기로 했으니 고전을 읽으면서 여성주의의 흐름을 잡을 필요도 있겠군..
이렇게 말했지만 이 책은 고전자체이기 보다 고전에 대한 해설을 하는 책으로 입문자에겐 더 맞는 책이다.
그래도 아무리 고전을 해설하는 책이라도 혼자서 읽는 것 보다 누군가와 같이 읽는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이처럼 여성주의 고전에 대한 지식이 전파된 것은 이미 한 세기가 되었지만 그 내용은 상당히 제한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콜론타이만 하더라도 그녀의 여성해방론 전체가 아니라 자유연애론만 과도한 관심 속에 부각되었을 뿐이다. 한국에서는 여성참정권이 해방 후 선물로 주어졌기 때문에 여성운동가들이 참정권 요구를 내걸 일도 없었지만, 참정권운동을 통해 여자들이 조직화하고 여성운동의 역량을 축적하는 경험도 할 수 없었다. 여자들이 스스로 의제를 설정하고 외부와의 대결 속에서 자기 정체성과 자기인식을 확고히 해가는 체험을 할 계기가 없었던 것이니, 외적 행운이 언제나 내적결실의 강화만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었다.
(p. 6)
생각보다 그동안 한국내에서는 여성주의 고전에 대해 제대로 소개될 기회가 없었던 것 같다.
최근들어 어느때보다 활발해진 페미니즘 이슈로 인해 나같은 사람도 이 책을 접하게 되었으니 앞으론 고전도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질 거라고 믿는다. 이 책에선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에서 주디스 버틀러까지 여러명의 여성주의자들이 언급되는데 나에겐 '엥겔스, 밀도 여기에 포함되는거야?'라던가 그나마 이름이라도 들어본 보부아르 빼곤 다 모르는 사람들 투성이었다.
그래도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명의 여성주의자들중에 주목해서 본 여성주의자는 매리 울스턴크래프트, 알렌산드리아 콜론타이, 베티 프리단이었다.
먼저 이 책에서 가장 먼저 나온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를 통해 근대 페미니즘의 출발이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있었다.
계몽사상의 옹호자였던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의 권리도 이성옹호의 차원에서 옹호했다. 즉 인간은 이성의 담지자이고, 여자도 인긴이기에 이성의 담지자인 만큼, 이성을 가진 존재로서 여성의 권리를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인간의 보편적 속성과 가치를 중시하는 입장이었으므로, 여성적 가치를 중시하지말고 여자를 인간으로 대해달라는 것이 울스턴크래프트의 가장 강력한 요구였다.
(p. 50~51)
그녀는 18세기 후반의 인물로 계몽사상의 옹호자였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라고 믿는 울스턴크래프트는 남성과 여성은 이성의 담지자로서 평등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왜 현실 속 여성은 약할까라고 의문을 가졌던 그녀는 여성억압적인 담론과 교육이 그 원인이라고 지목하며 여자는 여자로 만들어진다고 주장했다. 여자를 똑같이 인간으로 대해달라는 요구였지만 당시로선 저정도의 주장을 목소리 내는 것도 힘들었다고 유추해볼 수 있다.
그래서 울스턴크래프트는 이를 위해 여성을 위한 올바른 교육이 필요하며 여성의 경제적 독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시대적 한계도 분명했다. 여성이 교육을 받아야 되는 이유가 잘 교육 받는 여성이 좋은 어머니, 좋은 시민이 된다고 생각했다.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말하기 보다는 여성과 남성의 평등을 말하는 데 더 방점을 두었다. 그리고 계급적인 면에선 기층여성들의 삶을 대변하지 못한 분명한 한계도 있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이성주의자로서 여성주의사상을 개척해나갔다고 볼 수 있다. 한계가 있음에도 그녀의 주장했던 내용은 근대 페미니즘의 출발로 볼때 의미 있는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두번째는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다.
그녀는 러시아 혁명을 주도한 혁명가, 소련의 정치인이자 여성 외교관이었다. 그리고 맑시스트 여성운동가였다.
이력에도 알 수 있듯 마르크스주의자 여성운동가로서 그녀도 역시 당시 자신이 발 딯고 있는 영역에서 여성주의자로서 받았을 많은 어려움과 한계를 가진 인물이었다.
콜론타이의 여성주의적 면모는 오히려 소련 학계에는 곤혹스러운 요소였다. 소련 시대에는 공식 학계나 여성운동계에서도 '여성주의'라는 말은 기피의 대상이었다. 소련 체제는 콜론타이와 같은 걸출한 여성운동 지도자가 현장에서 사라진 이후에는 여성운동을 왜소화시키고 관제화시켰으며, 그렇게 축소된 테두리에 포섭되지 않는 여성해방 관련 논의들을 폄훼의 대상으로 삼아버렸다.
(p. 229)
그녀는 마르크스주의자중에서 여성해방을 위해 힘쓴 인물로 이후 마르크스주의와 여성주의를 결합시켰다고 평가받고 있다. 왜 소련에서는 콜론타이를 곤혹스러워했을까?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농민문제나 여성문제등 개별분야에서 해결되어야할 문제들을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하면서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자연스레 해결될 문제이지 독자적인 움직임이나 해결방식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속에서도 콜론타이는 여성의 억압을 느끼고 여성주의적 입장을 내었었다.
시대적 한계라고 봐야할까? 여성주의자이기 이전에 마르크스주의자였다. 전통적인 마크르스주의자로서는 독자적인 활동을 하는 '페미니즘' 운동을 여성참정권운동과 동일시하는 '부르주아 여성주의'의 의미로 해석하였기에 함께 할 수 없었다. 여성문제를 중시하되 부르주아 여성주의자들이 이를 주도해서는 안된다고 보아서 그 자유주의적 여성운동가들에게 '페미니스트'라고 부르며 비판을 하며 억압하기까지 하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마르크스주의자로서 필연적으로 맞닥드릴 수 밖에 없는 문제인 생산수단의 사회화가 이루어진다면 '자동'적으로 여성문제가 해결될까 라는 의문에 대해서 복잡한 심경이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처음에는 그렇게 된다고 믿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1920년대를 거쳐가며 사회주의가 '자동'으로 여성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면서 여성문제에 관한 콜론타이의 견해는 점점 진화했고 여성문제의 상대적 독자성을 점차 인정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이렇듯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여성주의적 견해를 낸 인물로 그녀가 혁명 후 맞닥뜨린 현실에 수긍하지 않고 독자성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는 베티 프리단인데 이 인물은 냉전기 미국의 자유주의 여성주의자로 저서 『여성성 신화』를 통해 당시 페미니즘 제2의 물결을 이끈 사람이기도 했다.
그녀는 여성을 숭배할 필요가 없다고 보고, 있는 그대로의 여성, 인간으로서의 여성을 보아줄 것을 요구했다. 성별 차이론이 생물학적 차이론으로 나아가고 또다시 여성억압으로 귀결되는 데 대한 비판이 여성성의 신화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p. 365)
프리단은 남녀의 근본적이고 생물학적인 차이를 강조하는 담론이 여성성의 우상숭배를 낳았고 겉으로는 여성을 높여준다는 이 체계가 여성의 다양한 활동기회나 가능성을 박탈하고 여성억압으로 귀결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대로의 여성으로 보아 줄 것을 요구했다. 전통적인 여성담론에서는 여성혐오나 여성비하로 여성은 열등하고 사악한 존재라는 인식의 한가지와 오히려 여성숭배로서의 농경시대 초기의 여신숭배이거나 아테네 여신숭배따위의 여성은 우상적 존재로 인식하는 한가지로 말 할 수 있다. 이러한 여성담론이 요구하는 여성상은 결국 현모양처로서 가사부담자로서의 여성으로 귀결되었다. 프리단은 그녀가 교외에 거주하는 중산층 주부로서 살면서 느낀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이러한 여성문제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녀는 여성의 독립성, 인격적 성숙, 지적, 사회적 활동을 여성도 당연하게 가능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현 시대에서는 여성을 오로지 가정에 속박하고 성에 집착함으로서 나쁜 어머니가 된다고 보았다. 여성이 가정이라는 선택지만이 있는것이 아니라 독립적 활동만 보장된다면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개인적 의무를 수행할 수 있고 세계에서 중요한 역할과 책임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보부아르의 영향을 받았지만 이 책과 같이 읽었었던 『성의 변증법』의 파이어스톤과는 다르게 자유주의적 관점으로 개인적인 윤리의 차원에서 사고했으며 상대적으로 온건한 여성주의자라고 평가받고 있다.
이 책에 나오는 고전의 저자들이 기본적으론 여성주의자로 인식될 수 있지만 그 속에는 주장하는 바가 미묘하게 나뉘고 서로간에 부딪치는 면도 볼 수 있었다. 각각의 주장에는 시대적 한계 혹은 자신이 위치하고 있는 곳의 한계로 지금에 와서 볼 때 아쉽거나 비판되어야할 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왜 이 고전을 읽어야할까라는 질문에는 이 책에 나온 인물들이 당대에 주장한 목소리들을 현재에 읽음으로써 당시의 상황을 이해해볼 수도 있을 것이고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해나아가할지 어떤것들을 고민해야할지를 생각할 수 있다는 점에선 '고전'을 읽어볼 가치는 충분히 차고도 넘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