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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영점 - 가사노동, 재생산, 여성주의 투쟁 ㅣ 아우또노미아총서 44
실비아 페데리치 지음, 황성원 옮김 / 갈무리 / 2013년 12월
평점 :
엄마는 위대하다. 엄마는 강하다.
이런 류의 말은 꽤 예전부터 익히 자주 듣던 말이다.
몇주 전 지상파 예능을 보고 있는데 (남자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이다.) 한 남자 출연자의 부인에게 잠시 휴가(?)를 준 후 자신의 아이를 나머지 남자출연진들과 함께 돌보는 에피소드였다. 뭐 흔히 예상하듯 좌충우돌에 어색하기도 하고 땀 뻘뻘. 겨우 아이를 재우는 듯 했으나 금방 깨고.. 어쨋든 하루는 아니고 반나절? 정도 체험한 뒤에 한 남자 출연자가 한마디 한다. "이야- 역시 엄마는 강해.남자 5명이서도 못하는걸 엄마들은 해내잖아" 그리고 나머지 출연자들도 그래그래. 동조한다.
하지만 뭐. 다음날에 원래대로 엄마한테 일이돌아가며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겠지..
나도 어릴적 부터 듣던거라 의심(?)없이 엄마는 강한 줄 알았다. 그런데 왜 엄마가 되고 부터 난 뒤는 다 칭찬 일색일까?
진짜 칭찬일까?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있을까? 가사의 일은 물론이고 육아도 엄마가 하는 것이요. 요즘엔 일까지 병행해야되니 예능의 제목처럼 아빠가 슈퍼맨이면 이미 그렇게 하고 있었던 엄마는 초초 울트라 슈퍼히어로겠네.
여성운동에 참여하면서 나는 인간의 재생산은 모든 경제 및 정치 시스템의 기초이며, 여성들이 집에서 하고 있는 막대한 양의 유급가사 노동과 부불가사노동이 이 세상을 돌아가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
하지만 어머니가 그 노동을 당연시하고, 절대로 자신만의 돈을 따로 챙기는 일이 없었으며, 한 푼이라도 쓸 일이 있을 때마다 항상 아버지에게 의존해야 했던 역사 속에는 얼마나 큰 희생이 감춰져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p.15 ~ 16)
무임금의 가사노동덕분에 남성노동자들은 집에서 편안히 체력을 충전하고 다음날 일터로 가서 열심히 일을 할 수 있는 패턴이 자본주의가 탄생과 더불어 생겨났다. 이렇게 자본주의가 잘 굴러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야말로 가사 노동을 무임금으로 당연시하고 희생을 감내해야했던 여성들이다.
실비아 페데리치는 전작의 『캘리번과 마녀』에서 자본주의 이행기에 시초축적으로 인한 결과로 여성의 계급적인 하락에 주목했다면 이 책『혁명의 영점』에서는 자본주의 이후 여성이 온전히 짊어지게 된 무임금의 가사노동에 집중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혹자는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예전에는 더 심했어! 요즘에 누가 손빨래 하냐. 세탁기가 해주지.. 청소도 빗자루 쓸 필요없고 청소기가 다하지...
『그림자 노동의 역습』의 저자 크레이그 램버트는 이 부분에 이렇게 말했다.
19세기와 20세기에 생활 수준이 높아지면서 가사 노동 또한 확대되었다. 각 가정은 더 많은 재화와 서비스를 소비했고, 일반적으로 더 많은 소비는 더 많은 그림자 노동을 야기한다. 청결 기준도 높아지고 주택 또한 커졌는데, 이는 더 많은 가구와 물건, 공간을 더욱 철저하게 청소하고 유지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게다가 노동을 덜어준다는 장치가 반드시 노동력을 아껴 준 것은 아니었다.
(…)
그러나 1800년대 여성들에게 가사 노동은 한 세기 내내 "조금도 손쉬워지거나 덜 지루한 일이 되지 않았다. 노동력을 덜어 주는 장비가 그렇게 많은데도 일이 조금도 줄지 않은 듯 보이는 것은 정말로 이상한 모순이었다."
『그림자 노동의 역습』, (p. 75)
아니 그렇게 노동력을 덜어 주는 장비가 많이 생겨났음에도 조금도 줄지 않은 현실은 뭘까..?
집은 더 커졌고, 청결기준도 더 높아지면서 오히려 가사 노동이 확대되는 결과가 나타났다.
우리는 자본이 우리의 노동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데 대단히 성공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자본은 여성을 희생하여 진정한 걸작을 만들어냈다.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지불을 거부하고 가사노동을 사랑의 행위로 바꿔 놓음으로써 일거다득의 성과를 거둔 것이다. 먼저 터무니없이 많은 양의 노동을 거의 공짜로 획득했고, 여성들이 이에 거부하는 투쟁을 일으키는커녕 인생 최고의 일로 가사노동을 추구하게 만든 것이다(마법과도 같은 말: "그래. 여보, 당신은 천생 여자야"). 동시에 자본은 여성이 남성노동자의 노동과 임금에 의존하게 만듦으로써 남성노동자 역시 통제했다.
(p. 40)
가족은 본질적으로 여성부불노동의 제도화이자, 무임금으로 인한 남성에 대한 종속의 제도화이며, 결과적으로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을 규율해 온 불평등한 권력분배의 제도화이다. 남성들이 일을 그만두고 싶어질 때마다 자신의 월급봉투에 의존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떠올리게 된다는 점에서 여성의 무임금상태와 종속은 남성들을 노동에 묶어 놓는 기능을 해 왔다.
(p. 69)
자본은 완벽하게 불평등한 가족의 틀을 정립해버렸다.
무임금 가사노동을 전담하는 여성에 의존해야만 하는 남성노동자와 여성들 또한 남성노동자의 임금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하는 상태말이다. 양쪽을 모두 통제했지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가사노동을 전담하는 여성이기에 피해는 여성이 더 컸다.
가사노동을 교묘히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희생을 강요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의무적인 노동 때문에 남편에게, 아이에게, 친구에게 꾸준히 분개하다가도 자신이 이런 부정적인 감정을 품고 있다는 데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 여성취업의 오랜 역사가 보여주듯, 부업을 한다고 해서 이 역할이 바뀌지는 않는다. 오히려 부업은 우리의 착취를 가중시킬 뿐 아니라 여러 형태로 우리의 역할을 재생산한다. 우리는 곳곳에서 여성에게 주어지는 일자리는 그저 주부라는 조건의 모든 함축이 표현된 단순확장임을 확인할 수 있다.
(p. 47)
분개하다가도 여성 스스로가 죄책감에 사로잡혀 곧 포기하게 된다.
그렇다면 여성이 임금을 벌어 남성에 대한 의존을 줄이면 되지않을까?
하지만 저자는 그렇다고 해서 역할이 바뀌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오히려 여성의 착취를 가중시키고 여러 형태로 역할을 재생산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예전과는 다르게 요즘에는 예전과는 다르게 남성들이 가사일을 하는 편이잖아?
하지만 최근의 조사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가사노동의 탈중성화 경향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가사노동은 아직도 여성들이, 심지어는 부업을 가진 상태에서 하고 있다. 좀 더 평등주의적인 관계를 확립한 부부들마저 아이가 생기면 상황이 뒤바뀐다. 이 같은 변화가 나타나는 이유는 남성들이 아이를 돌보기 위해 직장에서 휴가를 얻을 경우 그 만큼 임금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는 남성의 유급노동시간 단축과 생활수준의 하락이 맞물린 상태에서는, 근무시간자유선택제 같은 혁신만으로 가사노동의 동등한 분담을 충분히 보장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또한 집안에서 가사노동을 재분배하려는 여성의 시도는 가사노동에 대한 남성들의 견고한 태도보다는 여성들이 노동시장에서 받는 저임금 때문에 좌절될 가능성이 더 높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p. 95~96)
예전보다는 남성의 가사노동의 참여는 높아졌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보조적인 형태에 머무를 뿐이고 게다가 아이가 생기면 휴직으로 인한 임금하락이 여성에 비해 남성이 더 크기 때문에 결국은 육아는 여성의 몫으로 가게 된다. 1차적으로 남-여 간의 임금격차가 (줄어들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육아휴직으로 인한 손실이 남성쪽이 더 크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여성이 휴직 또는 퇴직을 하게 된다. 이런 선택은 곧 여성의 '경력 단절'로 이어지고 남-여 간의 생애주기 전체의 격차를 야기시킨다.
경력 단절은 개인이 축적한 기술, 지식, 역량에 종합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주류경제학에서도 30대 초반에 경력단절을 겪으면 역량의 투자의 적기를 놓치는 것이라고 했다. 단절로 인한 당장의 임금 손실뿐만 아니라 역량을 쌓아야 할 경력 초기에 단절을 경험함으로써 오히려 역량의 저하로 나타나 미래의 임금수준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복귀나 재취업 과정에서 기존의 임금보다 더 적은 임금수준의 일자리로 복귀를 하게 돼 이는 곧 남-여 임금 격차가 왜 줄어들지 않는 큰 이유가 된다.
한국에서 '저출산' 문제가 최근의 가장 큰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역대 정부 모두가 이 문제를 타파하고자 뻘짓도 하고 어쨋든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여성학자 정희진은 한국의 상황을 아래의 책 『아내 가뭄』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 책과 관련하여 한국 사회의 상황을 간단히 살펴보자. 일과 가정의 양립? 이미 많은 여성들이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가장 먼저 일자리를 잃고 있으며, 더 이상 가정을 구성하지도 않는다. 아이를 낳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남성이 가사 노동을 절대로, 죽어도 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저출산은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아니다.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다(기혼 부부의 출산율은 1.9명으로 두 명을 육박한다). 대한민국에는 결혼한 여성을 위한 인프라와 사회적 존중 문화가 전무하다. 여성들은 더 이상 국가, 사회, 남성 개인의 변화를 기대하지 않는다. 대신 여성들은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아이를 낳지 않음으로써, 사회를 구하고 자신을 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저 출산은 절대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아내 가뭄』, (p. 14)
일시적이고 하나마나한 정책을 통해 출산을 국가적으로 장려하는 시대는 지났다. 당연히 국가가 나서면 따라고 오겠지가 아니다. 국가도 사회도 남자도 과거의 틀로 이 문제를 바라본다면 저출산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인식의 변화도 중요하다 『혁명의 영점』에서도 보여지듯 당연히 가사를 담당해야하는 사람은 없다.
역사적으로 오히려 남성임금노동자 - 여성무임금가사노동자의 틀은 자본주의 이행기에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
애들을 데리고 저녁이나 점심을 먹으러 나가면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미소를 지어. 얼마 전에는 어떤 여자 종업원이 우리 애들한테 "모처럼 아빠랑 점심 먹으니까 신나지?"라고 묻더라고. 나는 모욕을 당한 기분이었어. 왜냐하면 나는 애들을 데리고 나와서 빌어먹을 점심을 먹인 다음, 다시 집으로 데려가서 또 밥을 먹이고 숙제를 같이하고 재워도 줄 예정이었기 때문이지. 그런데 그 여자 종업원은 "와우- 아빠랑 특별 데이트를 하는구나!"라는 거야. 젠장, 아니라고. 이건 그냥 다른 일과 다를 바 없이 아빠랑 보내는 심심해죽을 거 같은 시간일 뿐이라고.
『아내 가뭄』, (p. 359)
우리 사회는 아버지들에게 육아에 젬병이 되도록 허용할 뿐만 아니라 젬병일 거라고 기대한다. 젬병이 되라고 권장한다. 그래서 막상 젬병이 아닌 아버지를 보면 매번 놀란다.
『아내 가뭄』, (p. 259)
이제 젬병인 아빠도, 강한 엄마도 그만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