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번과 마녀 - 여성, 신체 그리고 시초축적 아우또노미아총서 31
실비아 페데리치 지음, 황성원.김민철 옮김 / 갈무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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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맑스는 '시초축적'이 자본주의 이행과정에서 폭압적으로 벌어진 것을 밝혀냈지만 그 시초축적의 과정에서 여성은 없었다.

하지만, 저자는 '노동의 재생산'에 주목했다.  


달라 코스타의 말에 따르면 임금노동자의 착취, 즉 "임금 노예제"는 여성의 가정 내 무임노동이라는 기둥 위에 세워졌고, 이 무임노동이 임금 노예제의 생산성의 비결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의 여성과 남성의 권력 차이는 가사노동이 자본주의적 축적과 무관하기 때문도 아니고, 문화적 기획이 영원히 존속하기 때문도 아니다. 특히 여성의 삶을 지배했던 엄격한 규칙들을 고려하면, 가사노동이 자본주의적 축적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남녀간의 권력차는 특정 사회적 생산체제의 결과로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남녀간의 권력차를 만들어내는 사회적 생산체제란 노동자의 생산 및 재생산에 들어가는 무임노동의 이익을 보면서도 그것을 사회경제적 활동이나 자본축적의 원천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연자원 또는 개인적 봉사로 신비화하는 체제를 말한다.

(p. 21)


자본주의하에서 노동을 착취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 '노동의 재생산'이다. 

지속가능한 노동을 만들기 위해서는 남성 노동자들이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며 노동력을 회복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다시말해 노동자가 집에서 밥을 먹고, 휴식을 취하고, 자식을 낳고 청소, 빨래등의 일을 뜻하는데 이는 '여성'들이 당연히(?) 해준 덕분에 노동의 재생산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 누군가가 하고 있었던 '노동의 재생산'을 맑스는 자본주의 연구에 있어서 간과하고 말았다. 

무노동 가사노동은 자본주의 이행과정의 시초축적과 무관하지 않았다. 이 사회적 생산체제가 있었기 때문에 견고하게 오랫동안 자본주의체제가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럼 자본주의탄생이전의 상황은 어땠을까?

14-15세기는 봉건제의 모순이 드러나면서 농민폭동등이 일어났던 격동기였다.


서유럽 농민과 도시노동자중 다수에게 15세기는 그들이 전례 없는 힘을 가졌던 시대였다. 노동력 부족이 그들에게 유리한 입지를 가져다주었을 뿐아니라, 고용주들이 그들의 노동력을 놓고 서로 경쟁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은 자신의 가치를 더 잘 알게 되었고, 여러 세기에 걸친 수모와 굴종을 잊을 수 있었다.

(p. 90)


14세기의 당시 일어난 흑사병의 여파는 엄청났다. 유럽이 인구의 대략 30~40%가 죽었다. 역병으로 인한 노동력의 부족현상은 일시적으로 권력관계에서 하층민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런 유리한 조건속에서 농민계층의 불만이 가득찼고 봉기가 끊이질 않았다. 


그러나 15세기 말이 되면 반 혁명이 사회적·정치적 삶의 모든 수준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먼저 정치당국들이 가장 젊고 반항적인 남성 노동자들에게 자유로운 성관계를 허용하는 악랄한 성(性) 정책을 통해 그들을 포섭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로 인해 계급적대가 프롤레타리아트 여성에 대한 적대로 바뀌게 되었다. 

(p. 92)


그러나 15세기 말로 오면서 지배계급도 반격을 시작했다. 혈기왕성한 젊은 남성 노동자들을 상대로 성(性)정책을 펼치며 포섭하기 시작했고 먹혀들었다. 국가의 전폭적인 지지하에 강간을 묵인하였고 이러한 움직임은 계급에 상관없이 광범위한 여성혐오의 흐름을 이끌어냈다. 프롤레타리아트 남성의 적대의 시선이 여성에게 옮겨갔다. 계급의 문제를 성의 문제로 전환하는데 성공을 거둔 것이다. 결과적으로 노동자계급층 내를 분열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주인과 하인 모두에게 그토록 무정하게 희생당한 프롤레타리아트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치러야 할 대가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강간을 당한 사람은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를 쉽사리 회복할 수 없었다. 평판이 망가지면 마을을 떠나거나 매춘으로 전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노동자의 저항을 흐트러뜨리고자 불화를 유도하는 제후들과 지방당국의 성 정책의 또 다른 측면은 매춘의 제도화였다.

(p. 93)


점증하는 계급갈등으로 인해 궁극적으로 부르주아지와 귀족이 새로이 동맹하게 되었는데, 이 동맹이 아니었다면 프롤레타리아트 반란을 진압할 수 없었을 것이다.

(…)

반란이 실패한 것은 봉건권력의 모든 세력들(귀족, 교회, 부르주아지)이 전통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반란에 대한 공포로 합심하여 공동보조를 취했기 때문이다. 

(p. 95 ~96)


점점 가속화되는 계급갈등에서 이 당시 상업의 발달로 부상한 신흥 부르주아지와 기존의 봉건세력이 서로가 전통적인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동의 적앞에서 손을 잡게되자 자신들을 위협하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성공적으로 진압할 수 있었다. 


이렇게 봉건제의 위기를 유럽의 지배세력들은 사회적·경제적 구조조정을 실시하였고 이는 곧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이 때 대대적으로 벌어진 사회적·경제적 구조조정을 시초축적이라고 한다. 자본주의적 부의 원천은 부자들의 금욕과 절제가 아닌 노동자와 생산수단의 분리라는 점이다. 


노동자가 노동력을 팔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을 상태로 만드는 시초축적의 과정이 필요했다.

이 시초축적의 과정 속엔 노동의 성적 분업도 이루어졌다.


19세기 전업주부가 생겨나면서 정점에 달했던 이 역사적 변화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그리고 남성과 대비되는 것으로서의 지위를 재정의했다. 그로부터 나온 노동의 성적 분업은 여성을 재생산 노동에 가두었을 뿐만 아니라, 남성에 대한 의존을 더욱 심화시켜서, 국가와 고용주들로 하여금 여성의 노동을 좌지우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남성의 임금을 이용할 수 있게끔 했다. 이처럼 상품생산이 노동인구 재생산과 분리되면서 무보수 노동을 착취하기 위해 임금과 시장을 자본주의적으로 이용하는 전략이 발달하게 되었다.

(p. 121) 


자본주의 이행과정에서 벌어진 인클로저등의 시초축적 과정 끝나고 여성은 남성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이후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완전히 가치를 박탈당한 재생산 노동에만 한정되었다.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인구의 재생산은 자연적인 사명이자 "여자의 일'이란 꼬리표가 붙어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 노동에 대한 가치가 더이상 인식되지 않게 되었다. 여성이 임노동을 하는 경우에도 남성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임금을 받았다.


현실에서 출산과 인구변화는 자동적이거나 "자연적"인 것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 그렇기에 자본주의 발전의 모든 단계에서 국가가 노동인구의 확대 또는 축소를 위해 규제와 강압에 의존해야 했던 것이다. 이것은 특히 노동자의 육체노동이 생산의 제1수단이었던 자본주의 출범기에 더 잘 들어맞는다. 그러나 그 후 오늘날까지도 국가는 재생샌에 대한 통제권을 여성의 손에서 빼앗고 어떤 아이가 어디서 언제 얼마나 많이 탄생해야 할 것인지를 결정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고 있다. 결과적으로 여성은 종종 자의에 반해서 출산하도록 강요받았고, 신체로부터, "노동"으로부터, 심지어는 아이로부터의 소외를 경험했다. 이 소외는 다른 어떤 노동자가 겪은 것보다도 더 심각했다.

(p. 149 ~ 150)


여성으로서는 역사적인 패배였다. 동업조합에서 여성들이 쫓겨나고 재생산 노동이 평가절하 되면서 빈곤은 여성의 몫이 되었다. 또한 여성노동에 대한 남성의 "일차적 전유"를 이행하기 위해서 새로운 가부장적 질서가 구축되면서 여성들은 고용주와 남성이라는 이중적 종속관계에 얽매이게 되었다. 자본주의 출현 전에도 남녀 간에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존재했다고 해서 위의 평가가 무색해지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이번 시기 유럽에서는 여성이 공유지를 비롯한 공동체의 자산을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남성에 대한 여성종속이 상당히 완화되었던 반면, 새로운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여성의 노동이 교환의 영역을 벗어난 천연자원으로 정의되면서 여성자체가 공유재산이 되었기 때문이다.

(p. 157 ~ 158)


자본주의에서 노동력은 중요한 요소다. 인구의 변화는 자연적인 것과 거리가 멀었음에도 자본주의하에서는 통제해야 했다. 노동력의 원천인 출산을 통제하기 위해 여성의 자궁은 국가와 남성 소유하에 놓여졌다.


자본주의 사회가 발달하고 근대적인 프롤레타리아트가 형성되긴 시기에 가장 중요한 사건은 '마녀사냥'이 있다. 

예전에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이미지는 '중세시기에 일어난 종교적인 사건이었던거 아닌가? 

저자는 그렇게 간단한 사건이 아니라고 하였다. 자본주의 이행기에 벌어진 여성시초축적의 과정이라고 보았다.


의외로 중세에는 마술에 관대했고 마녀를 우대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중세의 봉건제가 끝나고 근대로 넘어가는 자본주의 이행기에 '마녀사냥'이 시작되었다.

왜 이시기에 벌어졌던 걸까? 

자본주의에서는 잘 훈육된 부지런한 노동자가 필요했다. 하지만 이전부터 마술 혹은 미신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 규칙적인 통제가 불가능한 프롤레타리아트를 손을 봐야만 했다. 타인의 의지를 구속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출산과 재생산을 통제하는 '마녀'들과 자본주의적 노동 규율은 애초부터 양립이 불가능했다. 

이로서 국가로 부터 대대적인 마녀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런 관점(마녀사냥이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미친 영향에 집중하는)에서 보았을 때, 마녀사냥이 여성들이 출산을 통제하는 데 사용해 왔던 수단을 악마적인 방법이라고 몰아붙임으로써 이를 파괴해버렸고, 여성의 신체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제도화함으로 써 여성의 신체를 노동력 재생산에 종속시킬 수 있는 조건을 마련했음은 분명해진다.

(p. 272 ~ 273)


마녀사냥은 여성에게 새로운 성적 능력이나 승화된 쾌락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대신 "깨끗한 이불 속의 깨끗한 성"을 향한 기나긴 행군의 첫 출발로서, 여성의 성적 활동을 노동과 남성에 대한 서비스, 그리고 출산으로 탈바꿈시켰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출산과 무관하고 비생산적인 모든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반사회적이로 사실상 악마적이라는 이유로 금지한 것이다.

(p. 285)


물론 '마녀'뿐만이 희생의 대상은 아니었다. 많은 여성또한 마녀사냥이란 미명 하에 희생되어갔다. 

마녀사냥은 자본주의와 어울리지 않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당시의 여성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자 여성에 대한 전쟁이었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모든 악의 근원이라며 비난했던 마녀사냥은, 새로운 자본주의적 노동규율에 순응하여 가족 내에서의 재산상속과 출산을 위협하거나 노동에 들어갈 시간과 에너지를 다른 곳에 낭비하게 만드는 모든 성적 활동을 범죄화하는 광범위한 성생활의 재구조화를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p. 288)


그러므로 합리주위와 기계론은 세상이 자연의 착취에 열을 올리게 만드는 데 기여하긴 했지만 마녀박해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다. 마녀사냥을 선동할 때 그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중세 말에 이르러 자신들의 정치경제적 권력을 위협하던 존재양식 전반을 뿌리 뽑아야 한다고 느끼게 된 유럽 엘리트들의 필요였다. 이 과업이 완수된 시점에, 다시 말해서 사회적 규율이 복원되고 지배계급이 자신의 헤게모니가 확립되었다고 느끼는 시점에서 마녀사냥이 중단된 것이다. 그때부터는 마법에 대한 믿음이 조롱의 대상이 되어 미신으로 매도당하면서 기억에서 사라져 가게 되었다.

(p. 304)


이 '마녀사냥'이 단순히 어떤 여성집단의 박해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노동규율하에 철저하게 성역할의 재구조화해 버렸고 이는 여성들을 배제한 새로운 가부장적 질서가 구축되었다. 그것보다 더 끔찍한 것은 마녀사냥이 일어난 이후 재구성된 질서에 대해 마치 원래 그랬던 것처럼 의문을 제기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마녀사냥은 아프리카에서도 위세를 떨쳤고 오늘날에도 많은 나라, 특히 나이지리아와 남아프리카처럼 노예무역에 한때 연루되었던 나라에서 분열의 핵심수단으로 지속되고 있다. 여기서도 마녀사냥은 자본주의의 성장과 자원을 둘러싼 강력한 투쟁으로 인한 여성의 지위 하락과 동시에 진행되었다.

(p. 341)


마녀사냥은 불행히도 17세기 이후에도 벌어졌다. 유럽인의 아메리카 정복 사업에서도 마녀사냥이 벌어졌다. 원주민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고 집단적인 저항을 와해시키기 위해 중세의 마녀사냥과 닮아있는 새로운 마녀사냥이 이루어졌다.  


맑스는 자본주의 이행기에 일어난 시초축적 과정이 잔인하고 폭압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밝혀냈었다. 

저자인 페데리치는 더 나아가 현대 자본주의에서도 여전히 보여지는 여성의 지위하락의 결과물 또한 시초축적의 과정에 있음을 이 책을 통해 밝혀냈다. 당시 맑스가 외면하고 있던 '여성'을 맑스주의식의 자본주의 이행 서사에 포함시켰으며 '여성' 역시 자본주의 이행의 희생자였으며 오히려 프롤레타리아트 남성보다 더 큰 피해를 당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2019년 현재도 이 질서를 벗어났다고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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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2-28 01: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무리를 지어버리셨군요.... 다들 대단하시네요.
나만 쓰레기야.....-_ㅜ

블랙겟타 2019-02-28 10:02   좋아요 1 | URL
너무 자책하실 피..필요는..
syo님은 저보다 더 많은 책을 읽고 계시잖아요.
저는 한권씩 읽어서.. 하하..;;

다락방 2019-02-28 09: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시 다른 사람의 글을 읽는 것은 도움이 되네요. 이 글 읽으면서 어제 막 읽기를 마친 혁명의 영점 생각이 나요. 이건 또 이렇게 연결되겠구나, 하는 머릿속의 흐름 같은 게 생기면서, 이렇게 읽기를 반복하면, 좀 어려웠던 혁명의 영점 정리도 가능하겠구나 싶고요. 그리고 우리 같이 읽기 도서이긴 하고 또 힘겹게 여기까지 오시긴 했지만, 블랙겟타님, 이렇게 정리하셨으니 혁명의 영점도 같이 읽으시라 꼭 권해드리고 싶네요. 지금 정리하신 내용이 혁명의 영점에서 다시 한번씩 언급되거든요. 같이 읽으면 좋을 책이에요. 아, 강요하는 거 아니에요. 그냥.. (시무룩)

잘 읽었어요, 블랙겟타님.
같이 읽어서 너무 즐거웠고요!! 같이 읽기 너무 좋고, 저랑은 또 다른 글을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너무 좋아요.
게다가 다른 사람 글 읽으니 더 정리가 되는 것 같고요.

읽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그리고 3월에도 우리 꼭 만나요. 자주 만나요!

블랙겟타 2019-02-28 11:45   좋아요 1 | URL
네. 저도 다락방님을 포함해 여러분들의 글을 읽으면서 도움이 되었어요. ^^
혁명의 영점도 사실 2월 안에 읽으려고 했던건데.. 오늘 시간이 좀 있어서 최대한 읽어보려구요.
저도 관심있는 분야라서 잘 읽어질 것 같아요. 잘하면 하루 이틀내로 읽을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러는 의미로 혁명의 영점도 곧 글로.. ㅎㅎㅎ

같이 읽는 덕분에 한권 한권 이렇게 읽어갈 수 있는 것 같네요.
저도 같이 읽어서 좋고 같은 책으로 이렇게 이야기 나눈다는 즐거움도 만끽 하고 있네요. :))
책 읽고나서 글을 쓰면서 머리 속에서 정리가 되더라구요.
글을 쓰는 과정에서 다시 책을 들춰보고 밑줄 긋기한 부분 앞뒤로 다시 읽어보고 모르는 단어는 인터넷으로 찾아보고 하면서 그냥 책만 읽었을 때 보다 정리가 한번 더 되었어요.

네. 3월에도 같이 해요!
글로도 자주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