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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를 찾아서 - 인간의 기억에 대한 모든 것
윌바 외스트뷔.힐데 외스트뷔 지음, 안미란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평점 :
절판
"인간은 DNA의 산물이 아닙니다. 인간은 기억의 총합입니다."
- 박주영,「고요한 밤의 눈」중 p36, 다산책방, 2016.
작가가 부여하는 '인간에 대한 정의(definition)'는 이처럼, '기억의 의미'에 대한 최대치의 강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은 뇌 안의 뉴런들 사이의 회로이다. 무언가가 기억으로 저장된다는 것은 켜지거나 꺼지는, 뇌에서 신호를 점화하거나 안 하는 뉴런들의 새로운 연결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어떤 무늬가 생겨난다. (p46)
생물학적으로, 또한 의학적 의미에서의 '기억'이란 위와 같은 것이라 이 책은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 선의 연결 없이 wifi를 이용해 컴퓨터에서 '인쇄' 버튼을 클릭하면 옆 방에 위치하고 있는 프린터에서 문서가 출력되는 것에 여전히 한없이 신기해하는 저같은 일반 독자들에게,
바다에 사는 생물과 우리 뇌 사이의 거리는 멀지만, 바다의 해마와 뇌의 해마 사이에는 공통점이 몇 가지 있다. 새끼들이 바다에서 헤엄체는 데 위험이 없고 그들이 스스로 헤쳐 나갈 수 있을 때까지 배에 알을 품는 해마 수컷처럼, 뇌의 해마 역시 무언가를 품는다. 그건 바로 우리의 '기억'이다. 해마는 기억이 크고 강해져서 스스로 헤쳐 나갈 수 있을 때까지 지키고 꼭 붙잡아 둔다. 해마는 말하자면 기억을 위한 인큐베이터이다. (pp10~11)
한때 무지하게 유행했었던, 인간의 뇌 속 '이 부분'을 이용한 영재 교육, 뭐 이런 광고에서 처음 보았던 것으로 기억되는 '해마'라는, (뭔가 포장마차에서 볶아져서 또는 마른안주류로 제공될 것 같은) 이름의 신체 기관을 통해, 우리 인간의 기억에 대한 원리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이 책의 의도가 아닐까 (과학 문외한으로서)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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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단순히 '기억'이라 표현하는 것들이 사실은 여러 종류의 기억들의 상호작용의 결과라 이 책은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이같은 의학적/생물학적/심리학적 지식의 습득이, 이 책을 읽는 일 목적이 될 수도 있겠으나 그 역시,
에빙하우스는 기억은 우리 자신에 대해 특별한 의미가 없는 한 점차로 희미해짐을 증명하였다. … 기억 흔적은 시간이 흐르면서 희미해지는 것 같다. 기억을 서로 간의 연결점들의 형태로 붙잡아 두는 뉴런들이 점차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완전히 못이 박힐 때까지 지식을 암기하고 유지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p251)
제 아무리 외워지지 않는 영어 단어라도, 15번을 소리내어 읽으면서 쓰면 인간의 뇌에 못이 박힌 것처럼 외워지게 된다라는 중학교 때 영어 선생님의 암기론에 따르듯 이 책을 공부하지 않는다면 예의 제 머릿 속에서 잊혀지게 될 것이고, 저에겐 이 책을 15번 쯤 읽고 암기할 의지가 또한 없기에 --- 지극히 사적인 관점의 이해를 바탕으로 한 감상문을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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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경험은 지속적인 기억이 되기 전에 단기 기억에 저장된다. 전화번호를 찾아내서 누르는 동안 우리는 그 번호를 잠깐 동안 기억한다. 어떤 메시지를 들을 때나 세로운 단어를 배울 때도 마찬가지이다. 이때는 몇 초 동안, 혹은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만 유지된다. 이런 식으로 우리 머릿속을 스치는 것들 중 일부는 선발되어 지속적으로 장기 기억으로 저장된다. (p15)
고등학교 시절, 제 마음을 송두리째 앗아갔던 '그녀'의 집 주소가 도대체 왜, 지난 33년 간 제 머릿 속에 '선발되어 지속적으로 저장'되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 33년 간, 제가 그녀를 지속적으로 생각했었던 것도 아니었음에도 말이죠. 이처럼, --- 이 책이 저 개인의 차원에서 가지고 있는 '기억'에 대한 궁금증을 모두 다 해소해준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인간의 뇌에도 해마 가까운 곳에 후신경구라는 게 있어서, 후각이 기억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p61) … 후각은 실제로 기억의 실마리로서 아주 중요하다. (p89)
홀로 탄 엘리베이터에 남아 있는 향수의 향에서, 예전의 여친을 떠올려 보게 되는 제가 뭐 그리 대단히 유별난 건 아니라는 일종의 위안 같은 걸 주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 기억의 재구성 】
여전히, 1998년 초여름 어느 날에 했던 '지금 이 순간이 내 인생의 하이라이트'란 말, 그것이 내포하고 있었던 '하지만 그 하이라이트는 내 생의 앞날에 반드시 더 높아질 것'이란 기대를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는 제가 간직하고 있는, 저의 지난 20여 년간에 대한 아쉬움과 회한이라는 게,
"기억이 현재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라는 명제는 구체적으로 있었던 일, 즉 사건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생각했던 바, 즉 의식에 대해서도 성립한다. 과거의 의식을 재현하는 데는 이미 현재의 의식이 개입한다. … 일종의 '아름다운 시절'의 이미지는 자기모순적인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 과거를 아름다운 시절로 생각하는 태도와 짝을 이루는 것은 현재는 구질구질한 그 무엇이라는 태도이다."
- 류동민,「기억의 몽타주」중 pp148~152, 한겨레출판, 2013.
만족하지 못하는 '현재'에 대한 반발의 결과물임을 류동민 교수의 위 책에서 배웠었다면, 이 책「해마를 찾아서」로부터는
기억은 우리가 했던 경험, 다시 불려오고 다시 조합되었던 경험들의 작고 수많은 조각으로 구성됩니다. 기억이 아주 새로울 때에는 접근이 아주 쉽지요. 하나하나의 사건이 그대로 눈앞에 보이고, 아직도 해마에 존재하지요. 기억이 점점 낡아 가면서, 즉 옛일이 되면서,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뇌의 다른 곳에 저장됩니다. 그것들을 다시 꺼내 오려면 재구성이 더 많이 필요해지지요. (p54)
2019년 6월 15일 현재, 제게 남아 있는 지난 20여 년간에 대한 기억이란 것이 어쩌면 --- 제가 원했던 방향이 아닌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한 불만으로 인해, 실제 이상으로 '현재는 구질구질한 그 무엇이라는 태도'를 점점 더 견고하게 하였고, 그 결과로 저의 현재를 더더욱 구질구질한 것으로 만들어 내는 '기억의 재구성'을 만들어 냈던 것이 아니었을까란, 그것이 의식적이었건 무의식에서였건에 관계 없이 여하한 '의도'에 의해 안좋은 방향으로 재구성되었을 수도 있다라는 점이, 이 책이 제게 준, 위안으로서의 가르침입니다.
【 기억의 오류 】
"모든 기록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아닌 타인을 위해서 한다. … 하지만 기록은 기억을 완전히 대신하진 못한다."
- 박주영, 위의 책 pp62~64.
「알베르트 슈페어의 기억」이야말로, '기록이 기억을 완전히 대신할 수 없음'에의 전형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 "자서전적인 문학에서는 기억이 자료들보다 더 유효성을 가지며, 개인적인 경험이 객관적인 사실보다 더 진실로서의 가치를 누린다. 창조적인 곡해를 모두 포함하는 기억이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p95)란 이 책 속 구절 또한 의도적 오류가 우리의 기억 속에 내재하고 있을 수 있음을 알려주고 있지요. 허나 더 놀라운 것은,
기억은 … 계속해서 같은 작품이 매번 새로 무대에 올려지는 극장과 비교할 수 있다. 어느 공연에서는 여주인공이 붉은 곳을 입고, 다른 공연에서는 푸른 옷을 입는다. 때로 배우도 일부 교체되고, 심지어는 중요한 부분에서 줄거리가 바뀌기도 한다. 때로는 우리가 실제로 경험한 일이 상연되고, 때로는 우리가 어디서 찾았거나 상상한 일이 상연된다. 기억의 극장에는 이상한 혼동이 자주 생긴다. (p148)
일종의 편집본인 우리의 기억이란 것이, 그 편집의 과정에서 의도적인, 때로는 의도하지 않은 오류가 개입됨으로 인해 실제와는 다른 모습으로 재현되게 되고, 그것이 훗날 또 재편집되어감에 따라 --- "우리가 경험했다고 믿는 게 언제나 사실인 건 아니다. 티끌만치도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p147)라는 결과를 낳게 된다라는 점이었습니다. 이처럼 실제와 다른 모습으로 남게 되는 기억을 '허위 기억'이라 하는데,
허위 기억은 … 환상에서 시작하여 기억을 거쳐 어느 순간 현실로 인식된다. '사실'이라고 쓰인 딱지를 자신에게 갖다 붙이고, 박새 새끼를 둥지에서 밀어내고는 크고 뚱뚱한 뻐꾸기로 자라난다. (pp151~152)
소개팅 해줄 테니, 좋아하는 스타일을 말해달라는 말에, 그저 특정 향수를 사용하는 여자면 좋아~란 대답을 했었었던 건 확실하나, --- 홀로 탄 엘리베이터에 남아 있는 그 향수의 향으로부터 특정의 한 사람만이 떠오른다는 건 어쩌면, 그 사람을 너무도 좋아했었었기에 그녀가 사용했던 향수의 향마저도 제가 좋아하게 되었던 것일 수도 있다는, 이제까지의 제 기억이 앞뒤가 바뀐 채 존재해왔었을 수도 있다라는, 뭐 그리 중요하지는 않은 '허위 기억'의 일례가 있는 반면,
범인에 대한 기억은 점차 혐의자에 대한 기억으로 대치되었다. … 기억이 원래 그렇게 작동할 뿐이다. 기억은 생물이고 유기적이며, 이미지를 살아나게 한다. 새로운 요소들이 들어오면 원래의 기억과 하나로 엮여 들어가는데,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우리의 상상력 뿐이리라. (p188)
일반인을 배심원으로 참여시키는 미국의 사법 체계의 경우와 같이, 그들의 '허위 기억'이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수도 있다는, 매우 중요한 실례와 같이, 전혀 생각지 못했던 현실적 위험을 배울 수 있었다는 점에서, 생물학/의학/심리학에 관심이 없는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쓰여진 이 책은 나름 적잖은 의의를 지닐 수 있다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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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웠다. 기억을 잃어버리는 것이. 기억의 죽음은 육체의 죽음보다 구체적인 공포였다. … 기억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것을 잃어가고 있는 나는 뼈저리게 실감한다. 기억은 결코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고 확인하는 것이며,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소중한 약속이 되기도 한다. … 기억이 사라져도 나의 지난날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내가 잃은 기억은 나와 같은 나날을 보낸 사람들 속에 남아 있으니..."
- 오기와라 히로시,「내일의 기억」중 p256, 예담, 2006.
"기억은 대뇌피질의 어려 곳에 저장되어 있지만, 서로 다른 경험들을 조정하고 온전한 기억으로 종합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건 바로 해마이다"(p209)라고, 그리고 또한 우리의 모든 기억에는 의도한/의도되지 않은 오류가 있음을, 이 책「해마를 찾아서」속 생물학과 의학은 말해줍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삶이 의미 있는 까닭은 그것이 한 편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 아툴 가완디,「어떻게 죽을 것인가」중 p364, 부키, 2015.
단순히 자서전 기술에 사용될 자료로서의 역할이 아닌, 그 모두의 총합이 삶 자체를 규정지어 낼 수 있는 '우리의 기억'이라는 것은, 생물학이나 의학이 설명해주지 않/못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라, 저는 여전히 믿습니다.
저의 지난 20여 년에 대한 기억이 속상하고 아쉽기만 하다 하여도, 속상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내내 편집해가는 것이 아닌, 그저 그러한 과거 모두가 현재의 저를 있게 해주었다라는 점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한 권의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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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뻐서가 아니다, 잘나서가 아니다,
다만 너이기 때문에, 네가 너이기 때문에
보고싶은 것이고, 사랑스런 것이고,
또 안쓰러운 것이고 끝내 가슴에 못이 되어 박히는 것이다.
이유는 없다, 있다면 오직 한 가지
네가 너라는 사실, 네가 너이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고, 사랑스런 것이고 가득한 것이다.
꽃이여, 오래 그렇게 있거라.
- 정밀아, <꽃>
이 가수의 목소리를 참 좋아합니다. 멜로디마저 참 좋은 이 노래의 가사가... 어쩌면 이렇게, 저의 과거에 대한 이제까지의 제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는 걸까요. 저의 과거가 저를 만들어 주었다라는 점, 그건 사실 너무나 '소중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고, 사랑스런 것이고 가득한 것'이라는 것까지도...
이 책을 읽고 난 후, 이렇게나 절묘하게 깨닫게 되네요.
※ 함께, 읽어보길 권하여 보는 책들
- 류동민 : 「기억의 몽타주」
- 아툴 가완디 : 「어떻게 죽을 것인가」
- 오기와라 히로시 : 「내일의 기억」
- 리사 제노바 : 「스틸 앨리스」
- "술을 마시다가 어느 순간부터 술이 깰 때까지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필름이 끊겼다’고 한다. 이는 알코올의 독소가 뇌에서 기억의 입력을 담당하는 해마의 작용을 방해하여 기억정보가 입력되지 못해 일어나는 현상이다. 알코올은 해마의 글루탐산성 신경세포의 활성을 억제해 기억을 방해한다. 그러나 뇌의 다른 기능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으므로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다. 단지 그 순간의 기억만 사라지는 것이다.한 해에 두 차례 이상 필름이 끊기면 의학적으로는 넓은 의미의 알코올 중독에 해당한다." - <기억을 만드는 해마> 중, 브레인 Vol 30, 2011.11.
- "의미 기억은 우리 자신과 세계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고 아는 것들, 이야기들이다. 사건 기억은 우리가 과거로 여행을 할 때 경험하는 것, 일어났던 일이다." (p108)
- "사실 이것은 현명한 일이다. 그럼으로써 뇌에는 공간이 생기고 새로운 기억들을 저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p251)
- "알베르트 슈페어가 메모광(狂)이었다라는 사실이 곧! 그가 기록해놓은 엄청난 양의 메모들이 객관적이다라는 것과는 동치될 수는 없다라는 거죠. 위의 인용문에서처럼, 슈페어가 표현한 '어린아이 특유의 동정심'이라는 것 역시 특정 시대의 특정 국가에서 태어난 특정 연령의 특정 성별의 한 개인이 지닌 (다시 말해, 객관적 확인이 불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나는 경험한 일들을 서술하며 지금 이 순간 과거의 경험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나의 입장도 밝혔다. 작업 내내 과거를 왜곡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p11)란 슈페어의 고백은 외려, 자신의 주관적 판단을 이 기록 속에 개입시켜 놓았다란 일종의 선언으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그의 일방적 기록을 읽어내고 해석해냄에 있어, 우리는 '왜곡'과 '주관의 개입'을 가려낼만한 장치를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죠. 결론적으로, 이 책 속의 기록들은 기본적으로 일 개인의 편향된/되어있다라 의심되는 기억에 의존한 기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 생각합니다." ---「알베르트 슈페어의 기억」을 읽고 썼던 감상문 중.
- "기억은 구성적이어서, 우리 경험의 단편들을 꺼내고, 일어난 사건에 대한 이야기라는 그림 틀을 꺼낸다." (p96)
- "미국 대법원은 허위 기억이 무엇인지, 그리고 미국에서 배심원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일반 시민들이 얼마나 왜곡에 약하고 쉽게 변하는지를 모른다는 점을 인정했다."(p178)
- "우리의 기억이 우리에게 진실을 제공한다고 신뢰할 수 있을까? 기억은 언제나 구성적이며, 우리 기억 안에는 오류와 결함이 있을 것이다. 기억과 허위 기억의 차이는 허위 기억은 오류를 포함하고 있다는 게 아니라, 얼마나 틀리냐는 것이다. 모든 기억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p1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