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는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어찌 견딜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해서, 견딜 수 없다면 또 어떻게 할 것인가."
- 김훈,「개」중 pp182~183, 푸른숲, 2005.
딱히 납득할 수 있는 내용의 소설은 아니었더랬습니다만, 또한 인용해 놓은 위 세 문장이 그 소설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자신할 수는 없습니다만 어쨌든, --- 작가 김훈의 장편소설「개」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지금의 제 삶을, 어쩌면 우리들 대부분의 삶들이 이러하지 않을까하는, 뭔가 짠한 생각을 (읽을 당시에도 그러했으며, 심지어는 지금도 여전히) 지워낼 수 없더군요. 견딜 수 없는 것을 어찌 견딜 수 있단 말인가, 허나 그렇다고 그것을 견딜 수 없다면 또 어찌할 것인가,
아, 이거 참,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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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전공자가 아닌 저이기에) 소설의 대표값이란 결국 줄거리일 수밖에 없지 않느냐라 생각하게 됩니다만, 한 편으로 그 대표값이란, 적어도 겉으로 보여지는 대표값이란 어찌 보면 --- 작가가 해당 소설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감싸고 있는, 일종의 포장지일 수도 있겠다란 생각을 갖게해 준 작품들도 꽤 있었습니다. 얼핏 꼽아지는「톰 아저씨의 오두막」이라든가,「위대한 개츠비」등이 저에겐 그러한 소설들이었지요.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이 작품,「공무도하」의 (예의 포장지에 불과할 뿐인) 줄거리 속에 난무하고 있는 우연한 인간 관계의 얽힘이라든가, 그 폭의 좁음 등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고 싶지도 않으며, 심지어 이의를 제기해서는 안 된다라고도 생각합니다. 그러한 우연과 좁음은 324페이지라는 한정된 지면 속에,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세계관을 펼쳐 놓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제약 조건하 최적의 결과물이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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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비루하고, 인간은 치사하고, 인간은 던적스럽다. 이것이 인간의 당면문제다. 시급한 현안문제다... (p35)
적어도 제가 이해하는 바의, 이 소설을 통해 작가 김훈이 표현하고 있는, 표현하고자 하는, 이 세상에 대한, 또한 인간에 대한 관점은 이러합니다. 비루하고 치사하며 던적스러운 온갖 군상들이 서로 모여,
바다사자의 앞지느러미는 잡을 수 없는 것을 잡으려고 허우적거렸고, 바다사자의 뒷지느러미는 일어설 수 없는 몸을 일으키려고 바닥을 치며 몸을 뒤틀었다. (p230)
이루어 낸다는 것이 실은 가능하지 않은, 어쩌면 심지어 존재하지조차 않는 무언가를 희망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 희망을 여전히 희망으로 갖고 이루어내려 살아가기에 (결과적으로) 그 삶은 비루하고 치사하며 던적스러워질 수 밖에 없다라는, 그런 메시지를 담고 있다 생각됩니다. 너무 비관적인 이해일까요? 다행히도,
"태어나보니, 나는 개였고 수놈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쩔 수 없기는 소나 닭이나 물고기나 사람도 다 마찬가지다. 태어나보니 돼지이고, 태어나보니 사람이고, 태어나보니 암놈이거나 수놈인 것이다. (p10) …… 나는 수컷으로 태어났으므로 수컷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내가 원해서 그렇게 된 일은 아니었다. (p150)
- 김훈, 위의 책 중.
작가는 그것이 당신 / 우리의 탓만은 아니라 말해줍니다. 나와 당신으로 이루어지는 '우리'만이 그렇게 비루하고 치사하며 던적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수많은 '우리'들이 모여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의 전체 구성원들 모두가 그렇게 - 이 이유가 원래 이런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는 곳이기에 이런 세상이 된 것인지, 혹은 원래 세상은 이렇기에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이렇게 되어버릴 수 밖에는 없었던 것이든지에 상관 없이 -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창야에서 사람들은 남들과 같은 말을 하고, 말의 흐름에 동참함으로써 안도했고, 그 안도감 속에서 소문은 소문의 탈을 쓴 채 믿음으로 변해갔다. (p161) …… 방조제가 들어서기 전에는 삶이 건강했고 평화롭고 충만했다고 말할 때, 그들은 그 말의 대부분이 거짓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거짓이 아니라고 우겨대는 더 큰 거짓이 작은 거짓을 눌렀다. 그들의 말 속에서 방조제 이전의 삶은 늘 평화롭고 충만했다. (p241)
굳이 무엇이 진실인지를 캐묻지 않고 또한 알고 있지 않다하더라고, ---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면 그렇게 묻지 않고 알고 있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놈의 세상, "신문에 쓸 수 없는 것들, 써지지 않는 것들, 말로서 전할 수 없고, 그물로 건질 수 없고, 육하(六何)의 틀에 가두어지지 않는 세상의 바닥"(p125)에 두 발 딛고 살아가는 데에는 더 도움이 될 수도 있다라는, 더 도움이 된다라는 걸, 서로서로 묵인하고 있으니, 이 세상을 통째로 바꾸어버릴 수 있기 전에는 이런 세상에 속해 살아가고 있다라는 사실에 자책하거나 그리 슬퍼하지 말하는, 위로 아닌 위로... 뭐 그렇게, 이 소설의 의미가 저에겐 받아들여지더군요. 그러하기에,
마치, 일 년치 주간지를 한데 모아 읽고 있는 듯한, 사건과 사고가 쉴 새 없이 이어져 서술되어 있는 이 작품 속에서 작가는 이러한 '고의적/의도된 무지'가 "추적할 수 없고 전할 수 없는 세상"(p218)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의 (비정상적은 아닌) 삶의 방식임을, 그러한 반복의 형식을 빌어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 "죽은 애가 개 주인이야. 그러니 아무 일 없는 거지. 조용한 거야." (p65)
● "쥐를 사살할 때 분대가 일제히 지향사격을 했으므로 탄도가 뒤엉켜 누가 쏜 총알이 어느 부위를 맞혔는지 밝힐 수 없었다. 해안대대 죽은 자들의 침묵에 안도했다. 그들의 침투와 이동경로는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p79)
● "환경전문지 기자가 물었다. 공룡의 시력과 청력은 어느 정도였습니까? 고생물학자가 대답했다. 연구된 범위 안에서 질문해주십시오." (p147)
● "경찰서 수사과장은 정보입수경위는 본래 밝힐 수 없고 또 물어서도 안 된다는 답변을 반복했다." (p161)
● "어류의 생태와 능력을 인간이 모두 다 알 수는 없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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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댐 잇! 페이 노 어텐션!"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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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 그럼에도 불구하고 / 그렇게 ………
노목희는 먼 곳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눈 앞의 문정수를 바라보았다. (p128)
적어도 이 작품 속에서 보여지는 작가 김훈의 시선은 이러하다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시선이 그의 일반적인 시선이지 않을까 싶은, 그러하기에 --- "소통은 끌어안고 뒹굴어야 가능한 것이 아니고, 독립된 이성을 가진 개체들이 적당히 아름다운 거리에 떨어져 있을 때, 소통이 가능하다. 여러분과 다른 생각일지는 몰라도, 군중들이 한자리에 모여 같은 구호를 외치고 뒤엉키는 건 소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라는 작가의 말이 가능하지 않나 싶기도 하지요.
물론, '먼 곳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눈 앞의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 (일반적으로) 옳다라 말하고자 함은 아닙니다. 단지 그러한 시선을 견지하는 것에 동의하느냐의 여부가, 이 작품에 깃든 작가 김훈의 세계관에 동의를 하느냐와 연결될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한 호·불호에까지도 연결이 되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볼 뿐입니다. (다시 한 번 더) 물론, --- 저는 이러한 김훈의 세계관에 전적으로 동의를 하지요. 아주/매우 전적으로!!!
새들은 지상의 그 어느 곳에서도 신호를 보내오지 않았다. 기자들이 방조제 도로 위에 설치된 조류 탐지 안테나 주변에 몰려와 돌아오지 않는 도요새의 행방을 취재했다. 새들이 신호를 보내오지 않았으므로 취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자들은 취재가 불가능한 사정을 취재해서 송고했다. … 기사는 아무 것도 전하지 않았고, 새들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신호는 접수되지 않았다. (pp227~228)
접수되지 않는 신호에, 소설 속 미군처럼 "댐 잇! 페이 노 어텐션!"의 무대응으로 대응할 것이 아닌, 그 어떠한 방식으로라도 일종의 '반응'을 보내야 한다는 (뭐랄까) 이런 시대를 독자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작가로서의 의무 같은 것이, 혹은 그러한 '반응'을 보내고 싶다는 작가의 바람(願)이, 작가 김훈으로 하여금 이 소설을 쓰게 하지 않았을까, 감히 추측해 봅니다. 딱히 '행복한'이란 형용사로 표현할 수 있는 등장 인물이 존재하지 않는,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기에 행복하지 않은 사회가 아닌, 행복하지 않은 사회이기에 그 속에서 살아가고/내고 있는 모두가 행복하지 않은 것일 뿐이라고, 일종의 (자기 최면스러운) 위안이나마 해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이건 마치,
"나는 세상의 개들을 대신해서 짖기로 했다. 짖고 또 짖어서, 세상은 여전히 고통 속에서 눈부시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었다. … 인간이 인간의 아름다움을 알 때까지 나는 짖고 또 짖을 것이다."
- 김훈, 위의 책 중 p6.
한 마리의 '개'로 분신했던 작가가 인간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바로 그 메시지와 동일한 바로 그것이 아닐까... 뭐 그런 추측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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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아 강을 건너지 말랬어도 / 기어이 건너려다 빠져 죽으니 / 어찌하랴 님을 어찌하랴"
- 여옥의 노래
우리 역사상 최초의 문학작품이라 배웠었던 기억이 나는, 이름 모를 백수광부(白首狂夫)의 아내 혹은 여옥이란 여인이 지었다는 고대 가요를 이 작품의 제목으로 쓴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이 소설을 다 읽고나니 더 궁금해졌습니다. 연애소설이 아님이 틀림없는 이 작품에 도대체 왜... 그러다 문득,
노래의 화자인 여옥은 님을 죽게한 '강'과, 굳이 그 강에 들어간 '님' 중 누구를 원망했었을까, 혹 그런 선택을 한 님을 사랑한 '자신 스스로'를 원망한 것은 아니었을까란 의문이 들더군요. 이에 대한,
제멋대로의 이해/해답을 적어보자면, 이 작품의 제목을 '공무도하'로 삼은 작가 김훈은 아마도 --- 제 3자적 관점에서 '님'과 '여옥'의 관계를 원망했던 것이 아닐까란 생각을 가져 봅니다. '님'과 여옥이 연인 관계가 아니었다면 최소한, (측은지심의 인류애적 뭐시기는 애초에 차지하고) 한 (치기어린?) 백수광부의 익사에 대한 여옥의 슬픔은 아예 존재하지/생겨나지 않았었을테니까요. 그렇지 않고서는,
나는 나와 이 세계 사이에 얽힌 모든 관계를 혐오한다. 나는 그 관계의 윤리성과 필연성을 불신한다. (p325)
뭔가 섬뜩한 느낌마저 선사하는, 책의 마지막에 실려 있는 <작가의 말>에 등장하는 위 혐오와 불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 읽어본, 작가 김훈의 작품들 :「개」·「남한산성」·「칼의 노래」
'내가 아는' 모든 이들에게 반드시 읽어보라 권하고 싶은, 지금 이 블로그에 와있는 당신에게마저 여하한 구실로라도 '나를 아는' 이란 형용사를 붙여 --- 꼭 한번 읽어보시라 말하고 싶은 책들의 제목 앞에 ★표시를 붙입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표시이겠지만 가끔은, 타인의 주관을 한번쯤 믿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