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유혹 - 상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25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안정효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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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언컨데! --- 제가 만약 「가장 오래된 교양」, 「사람의 아들 예수」, 「맨 얼굴의 예수」 그리고 「예수복음」을 읽지 않고 이 책 「최후의 유혹」을 읽었더라면 그저 "재미는 별로 없고, 내용은 얄딱꾸리하며 게다가 길기는 졸라 긴", 뭐 그런 소설로만 이해했을 겁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제가 위 네 권의 책을 읽었었다라는 게, 이 작품은 "재미는 별로 없고, 내용은 얄딱꾸리하며 게다가 길기는 졸라 긴" 소설임을 여전히 부인하지는 못하겠지만, 다 읽고나니 분명!!! 그러한 모든 장애물을 넘어설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바티칸이 한때 금서로 지정하였었다지만 오히려 카톨릭·개신교 신자라면 꼭 읽어봐야하지 않을까,라는 생각까지를 가질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연휴를 이용해 진득이 읽어보려는 생각에 이 책을 선택했거늘, 연휴가 아니었으면 하염없이 늘어졌었을 듯한 책이기도 했습니다만, 어떤 면에서 보자면 이 책을 '연휴의 독서'에 어울린다고는 차마 말하지 못하겠는, 에... 또 뭐 암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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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에서 예수는 인간에게 끝없이 다가선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바로 그 복음서를 갖고 예수를 인간으로부터 끝없이 갈라놓는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민중과 한 몸이다. 그런데 목회자와 신학자들은 교리와 신학을 들이대면서 예수를 자꾸만 신격화해서 민중과는 도무지 어울릴 수 없는 초월적인 그리스도로 둔갑시킨다. 그래서 이 땅의 가난한 신자들이 '자기네 자신의 희로애락'과는 무관한 예수를 그들의 구세주로 모시는 서글픈 일이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벌어진다.   

- 김용민 著,「맨 얼굴의 예수」 중 정연복 한국기독교연구소 연구위원의 말​

위의 주장에 (부분적으로나마) 동의할 수 있다면, 이 주장에 주제 사라마구가 「예수복음」에서 보여주었던 "예수가 신의 아들이 아니라 만약 사람의 아들이라면?"이란 의문을 어울어 시킬 수 있다면, 그리하여 칼릴 지브란의 "사람들은 당신이 신(神)이 되기에는 너무나 허약하고 가냘픈 인간이었다고 말하고, 예배와 찬송을 받이게는 너무 인간적인 신(神)이었다고 말합니다" 라는 고백을 한 번쯤 이해해보려는 시도를 해낼 수 있는 정도의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 그런 (특히 카톨릭·개신교의 종교를 가지고 있는) 독자에게 "인간으로서 신에 이르려는, 보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신에게로 돌아가서 인간 자신과 신을 동일시하려는 너무나 인간적이고도 너무나 초인간적인 그리스도의 이원적(二元的)인 본질(p7)"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이 작품 「최후의 유혹」은 상당히 흥미로운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 될 수 있다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내용이 내용이다보니, 「예수복음」에서 작가 (아직까지도 저의 No.1 외국작가인) 주제 사라마구가 보여주었던 설정과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는 상상1의 비교를 하지 않을 수 없네요. 


 「예수복음」에서 작가는 마리아가 처녀로서 예수를 임신한 것이 아니라, 요셉과의 섹스를 통해 갖게 된 것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사실 이 부분은 「가장 오래된 교양」에서 저자 크리스틴 스웬슨 교수도 언급하고 있는, "'처녀'라고 번역된 히브리 단어는 원래 그냥 '젊은 여자'를 지칭하는 말이었다"라는 지적을 받아들인다면 오로지 주제 사라마구만의 작가적 상상력의 결과라고는 볼 수 없기도 하지요. 하지만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상상력은 이 점에서는 성서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결혼할 후보자들을 모아놓았을 때, 그토록 많은 사람들 가운데 오직 요셉의 지팡이에서만 꽃이 피었다. 그랬기 때문에 랍비는 마리아를, 하느님께 봉헌했던 아름다운 마리아를 그에게 주었다. 그리고는 결혼식 날이 되자, 그가 미처 신부에게 손을 대기 전에 벼락이 때려 신랑의 몸을 마비시켰다. 그러더니 나중에, 전해지는 얘기를 들으면, 신부는 하얀 백합의 냄새를 맡았고, 아들을 잉태하게 되었다.(p40)

「예수복음」에서 예수가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된 계기는, 예수의 탄생을 알게된 헤롯왕이 베들레헴의 세살 아래 모든 사내아이들을 살해하도록 한 명령을 엿들은 예수의 아버지 요셉이 그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려주지 않아, 오직 자신 예수만이 그 참화에서 살아남게 되었다라는, 일종의 원죄의식과도 같은 것으로부터였었었지요. 즉, 아담과 하와의 죄로 인해 그 이후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에게 '원죄'가 지어져 있듯, 요셉의 '(불고지의) 죄'가 예수에게 전해지고 있다는 거지요.


하지만, 이 작품 「최후의 유혹」 속 예수는 그렇게 심오한 생각을 하는 인물이 아닙니다. (앞서 <각주 1>에서도 언급한 바대로, 이 작품에서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시점 이전의 예수의 삶에 대해 상당 부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의 작가적 상상력이 빚어낸 허구의 이야기이겠습니다만, 예수가 과연 어릴 적부터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이다!'라는 관념을 명확히 가지고 있었겠느냐라는 단순한 의문은 그 누구나 가져볼 수 있는 것이겠지요. 단! 다음의 인용문에서 그려지고 있는 것같은, 정신적으로 나약한 모습의 예수는 아니었을 것이라 기독교 신자인 저는 생각합니다.) 


나는 말도 제대로 할 줄 모릅니다. 난 회당에 나갈 용기도 없고요. 사람들을 보면 난 당장 도망을 쳐요. 나는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고도 부끄러워할 줄을 모르죠. 나는 안식일에도 일을 하고(p41) …… 저는 이 세상이 좋아요. 전 결혼하고 싶으며, 비록 창녀이기는 해도 막달라의 여인2을 원합니다. 그녀가 창녀가 된 것은 제 탓, 제 탓이고, 저는 그녀를 구해 줘야 합니다. 그 여자를요! 이 대지도 아니고, 세상의 왕국도 아니고, 제가 구원하고 싶은 것은 막달라의 여인입니다. 그만하면 저로서는 충분합니다. …… 저는 당신이 저를 혐오하고, 당신이 다른 곳으로 가서 다른 사람을 찾아내기를 바라고, 전 당신을 떨쳐 버리고 싶습니다.(pp47-48)

이처럼 예수는, 그저 평범함 한 남자로서의 삶을 원했던 그런 사람이었지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이보다 한 술 더 떠 "결혼도 하기 전에 생과부가 되었고, 아이를 가지지도 못하고 어머니가 되었으며 … 남편의 따뜻함을 느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흐뭇하고 자랑스러운 기분도 느껴 본 적이 없(p51)"는 자신의 인생을 한탄하며, 자신의 아들 예수가 이스라엘을 구할 메시아일지도 모른다는 랍비의 말에 다음과 같이 강하게 저항하기도 합니다.


선지자란 말씀인가요? 아니에요, 안 됩니다! 그리고 만일 하느님이 그렇게 뜻을 정하셨더라도, 그 뜻이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저는 제 아들이,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다른 모든 아이들하고 똑같아지기만을 바라요. 다른 모든 사람들하고 똑같이 말입니다. …… 그 애가 점잖은 집안에서 태어난 착하고 젊은 딸이며, 지참금도 가져올 여자하고 결혼하게 해주시고 그 애가 풍족한 살림을 꾸려 나가고, 자식을 여럿 낳아서, 할머니와 아이들과 손자들이 다 함께 토요일마다 춤을 추러 가서 모든 사람의 부러움을 사게 해주세요.(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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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예수와는 달리, 무력까지도 사용하는 저항으로 로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야 한다 주장하는 '열심당원3'의 우두머리를 사람들은 메시아일지도 모른다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우두머리는 로마군에 잡혔고, 십자가에 매달리는 형을 선고받게 되는데, 여기서 작가 카잔차키스의 상상력은 (다른 목수들은 모두 만들기를 거부했던) 그 십자가를 만든 목수가 바로 예수였었다라는 설정을 만들어내지요. 그런 이유로 예수는 비난을 받게 되고, 열심당의 <성자 암살단>이었던 (성경 속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바로 그) 유다의 미행에 놓이게 됩니다.


이후, 예수는 "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하려고 수도원(p223)"엘 찾아갑니다만, 오히려 바로 죽음을 앞둔 수도원장으로부터 당신이 메시아라는 말들 듣고는, 자신의 운명(!)을 결국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생각하게 되었고, 유다는 그가 과연 진짜 메시아인지를 두고 보겠다는 이유로 그런 예수의 길을 끝까지 함께 하게 되지요.4


당신은 냉혹하고, 당신은 냉혹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런 사람들만을 당신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지금까지 저희는 흐느껴 울고, 엎드려 경배하며,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주여, 저희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나이다. 저흰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나이까? 당신은 냉혹하고, 당신은 냉혹한 백성을 사랑하니까, 그렇다면 저희도 냉혹해지겠습니다. 이제는 저희, 저희의 뜻이 이루어져야 합니다!(p161)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수도원장의 위 절규처럼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들을 해방시켜줄 메시아가 임할 것이라는 성서의 약속이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에 점점 절망하며 조급함을 느끼게 되지요. 이에, 예수가 진짜로 메시아일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유다는 어서 빨리 그가 하느님의 능력을 사용해 로마로부터 해방을 이끌어내주기를 바랍니다만, 예수는 현세의 고통을 치유해주기보다는 내세에서의 기쁨만을 설파할 뿐입니다.5


이후 예수는 세례요한으로부터 자신이 진정 메시아임을 듣게됩니다...만 여전히! 그의 마음 속에는 "나를 그냥 내버려 두세요, 내게 허락해 주시고, 분노하지 마세요!(p395)"라는 갈등이 존재하고 있었었지요.


나는 이런 짓들은 이제 신물이 난다. 나는 굶주리며 지내기도, 겸허한 체하기도, 다른 쪽 빰을 내밀어 한 대 얻어맞는 짓도 모두 신물이 난다. 나는 사람을 잡아먹은 하느님이 보다 온화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비위를 맞추고 아첨을 떨기도 짜증이 나고, 형제들이 나를 욕하고 어머니가 흐느껴 울고 내가 옆을 지나가면 사람들이 웃는 소리에도 짜증이 나며, 맨발로 돌아다니기에도 신물이 나고, 장터를 지나갈 때 꿀과 술과 여자를 살 용기가 없어서 잠 속에서나 하느님이 그런 것들을 가져다주어 허망한 바람만 맛보고 겨우 껴안는 시늉이나 하는 데도 짜증이 난다! 나는 그 모두가 역겹다!(p400)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갈등구조는 크게 보아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예수 자신의 위와 같은 내적 갈등이고, 또 하나는 유다과 예수 간의 갈등이죠. 유다가 기대했던 메시아는 "칼을 든 메시아를, … 유대인들의 말과 낙타들도 소생시켜서, 보병과 기마병이 다 같이 진격해 로마 놈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p598)"라 명령하는 메시아였지만, 그의 앞에 서 있는 예수는 "(우리의) 적은 내면에 존재하고, … 구원은 내면에서부터 시작됩니다!(p537)"라 말할 뿐입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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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개의 갈등의 해결되어가며 예수의 마지막 순교가 이루어지게 되지요. 「가장 오래된 교양」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였었던 --- <유다복음서>에 따르면 예수가 가장 사랑했던 제자가 바로 유다였었기에, 그에게 자신을 로마에 넘겨주는 혐오스러운 일을 맡겼던 것이며, 유다는 이 일로 인해 자신이 영원토록 비난받고 저주받게 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예수의 명령에 순종했었다고 합니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이 작품에서 바로 이 <유다복음서>의 기록을 따른 듯한 전개를 보여주고 있지요.


유다, 내 형제여. 필요하기 때문에, 내가 죽어야 하고 당신이 나를 배반하는 일이 필요하기 때문에, 당신에게 모자라는 힘은 하느님께서 주셔요. 우리 두 사람은 세상을 구원해야만 합니다. 나를 도와줘요.(pp648-649)

결국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신(神)이 되기에는 너무나 허약하고 가냘픈 인간이었다"라는 칼릴 지브란의 말처럼, 예수 스스로도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에게 부여된 그 임무가 거두어질 수 있다면 거두어지기를 바래었으나 그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죠.6 헌데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의 수호천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장면에서부터 이 소설의 반전이, 그리고 이 작품의 제목이자 하이라이트인 '최후의 유혹'이 시작됩니다.7 (이후의 내용은 적지 않는 것이 독자로서의 예의일듯 싶네요.) 


나는 저 사람이 십자가에 매달리기를 원하지 않아. 다 지긋지긋해! …… 저 사람은 꿈속에서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라. 그로 하여금 현실과 똑같은 두려움, 똑같은 고통을 꿈속에서 느끼게 하라.(p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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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십자가에 매달려야 했어요!(p764)"라는 작품 속 마태의 외침이 어쩌면!!! 바티칸이 이 소설을 금서로 지정했던 이유가 아닐까... 하는, 사뭇 삐딱한 생각을 해보게도 됩니다. --- 「죽음의 중지」에서 작가 주제 사라마구는 '죽음'이 없어진 상황, 즉 세상 사람 그 누구도 죽지않게 된 상황에 대해 가장 심각하게 자신의 존재 의미를 잃게 될까 걱정하는 곳은 장의업계도 아니고, 사설노인복지시설도 아닌, 바로 카톨릭 교단인걸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죽음이 없다면, 부활도 없고, 그렇다면 교회의 존립근거 또한 없어진다라는 이유때문이었지요.

주제 사라마구의 이 시선을 받아들인다면 --- "매달려야 했어요"라는 마태의 말이 가지고 있는 당위의 주장은 예수의 순교 - 결국 그로 인한 우리 영혼의 구원 - 가 하느님이 우리에게 베푼 실제의 은혜, 즉 '사실(fact)'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닌, 그것이 우리가 믿고 싶어하는 믿음의 내용이었었기에 그러했던 것이라는 것이 되어 버리며, 이것이 바로! 자신의 존재 의미에 심각한 도전을 하고 있는 이 작품을 카톨릭 교단이 용인할 수 없었던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만 됩니다. (불가침인 '신성(神性)을 건드렸기 때문이다라 보는 건 너무 단순한 반응이 아닐까 싶네요.) 하지만!!!

   

육체와 영혼의 투쟁, 반발과 저항, 화해와 굴종, 그리고 마지막으로, 투쟁의 가징 숭고한 목적인 신과의 결합 - 이것은 그리스도가 취한 오름길이었고, 그리스도는 그가 남긴 피로 물든 자취를 따라 우리더러 뒤따라오라고 부른다. …… 그의 뒤를 따르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갈등을 깊이 이해하고, 그리스도의 고뇌를 다시 살아야 한다. …… 희생의 절정인 십자가로, 그리고 비실체성(非實體性)의 정상인 신에게로 오르기 위해서 그리스도는 투쟁하는 인간이 거치는 모든 과정들을 거쳤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겪은 고통이 우리에게 그토록 생생하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함께 나누고, 그리스도가 거둔 최후의 승리가 마치 우리 자신이 미래에 거둘 승리처럼 여겨진다. …… 유혹은 그가 길을 잃게 하려고 마지막 한순간까지 애를 썼고, 유혹은 패배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그 순간에 죽음은 영원히 정복되었다. …… 이 책은 전기가 아니라, 투쟁하는 모든 인간의 고백이다.(pp 8-11)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프롤로그8>에 써놓은 위의 구절을 온전히 이해한다면, 이 작품이 결코! 예수의 신성을 건드리고 있지 않다라는, 오히려 "현대 기독교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만 보고 '사람의 아들'로서의 예수를 못 보는 면이 많다"라는 함석헌 선생의 비판을 이겨낼 수 있는 훌륭한 전기를 마련해주고 있음을 알게 될거라 생각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람의 아들 예수」에 나오는 <예수의 희생에 관하여 : 삭개오>중 다음의 인용문이 현대의 카톨릭·기독교가 예수를 잘못 해석하고 있는 점을, 가장 근본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생각해, 그 중 일부를 인용하는 것으로 '연휴니까 읽어낼 수 있었었던, 하지만 또한 연휴의 독서엔 어울리지 않았던' 이 작품 「최후의 유혹」을 읽고 난 감상문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날라리 신자인 저에게도 언젠간... 성경 전체를 한 번... 은 읽는 날이 있겠... 죠? --;;


그분은 얼마든지 자신 앞에 놓인 운명을 피해 살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생명을 구하려 하지 않았고, 한밤의 이리떼들로부터 자신의 양떼들을 지킬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 그분은 마치 농부가 자신이 수확한 곡식을 모아 두었다가 봄에 그것을 뿌려 가을에 수확하기를 바라듯, 또 건축가가 집을 지을 때 가장 큰 돌을 모퉁잇돌로 놓듯이 자신의 죽음을 그렇게 사용하셨습니다.…… 저는 이제 여러분들께 묻고 싶습니다. "진정으로 예수를 죽인 자는 누구입니까? 로마인들입니까, 아니면 유대의 제사장들입니까?" 로마인들도 예루살렘의 제사장들도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온 세상이, 우리의 죄악이 그분을 언덕 위 십자가 고통 위에 매단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온 세상이 그분의 보혈의 은혜 아래에 서 있는 것입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 주제 사라마구 作, 예수복음

- 칼릴 지브란 作, 「사람의 아들 예수

- 크리스틴 스웬슨 著, 「가장 오래된 교양

- 김용민 著, 「맨 얼굴의 예수」 

 

 

※이외 성경에 관한 읽어본 책들

- 나카노 교코 著, 명화의 거짓말 : 성서편

- 나가오 다케시 著, 「유쾌한 성경책

- 공병호 著, 「공병호의 성경 공부 

 

 

 


 

  1. '상상'이란 단어를 선택한 이유는, 성경에는 예수의 '공생'이라 불리우는 삶만 기록되어 있기에 그 이전, 즉 예수의 성장기에 관한 부분들은 온전히 작가의 상상에 의해 창조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정감록 역모사건의 진실게임」의 저자인 백승종 교수는 이러한 역사가의 상상에 대해 <'역사의 경첩'이라 부르기엔 역사를 읽고 쓰는 행위는 일종의 '게임'이다. …… 역사적 상상력이 동원된 게임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상상 게임'이라 불릴 만하다. '상상 게임'을 하는 데는 팩션이 빠질 수 없다. 내가 말하는 팩션은 사실과 허구를 적당히 버무리는 것이 아니다. 허구라 해도 역사적 상상이 빚어낸 허구라 하겠다. …… 역사적 지식을 통해 얻어진 상상이 개입된 허구는 말 그대로의 허구가 절대 아니다. …… 이 경우의 허구란 깨진 청자 조각과 조각 사이를 이어주는 접착제 같은 것, 달아난 부분을 메워 항아리의 원형을 보여주는 보철 같은 것이다.>라 표현했습니다만, 예수의 경우 상상력이 개입될 수 있는 여지가 너무도! 많기에 역사가가 아닌 소설가들에게도 자신들만의 상상력을 발휘해볼 수 있는 장(場)을 마련해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주제 사라마구나 니코스 카잔차키스 모두, 그들의 신앙이나 가치관과는 관계없이 성경적 지식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펼쳐놓은 상상에 대해 '성경적 무지'로부터 기인한 것이라는 평가는 그리 옳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2. 막달라 마리아.
  3. 얼마 전 출간되었던 「젤롯」이란 책의 '젤롯'이 바로 이 '열심당'을 지칭하는 것이더군요.
  4. 여기서 소설은 다른 제자들 - 열두 명 모두가 등장하지는 않으며, 유다는 위의 이유로 제자로 분류되지도 않는 - 에 관한 이야기도 꽤나 많이 싣고 있습니다만, 한 마디로 그들 모두 진정 신앙같은 성스러운 이유로 예수의 제자가 된 건 아니다라 그려지고 있습니다.
  5. "하느님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고통을 위로해 주시고, 모든 상처를 치료해 주십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아무리 고통과 굶주림에 심하게 히달리더라도, 그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우리는 천국에서 만족하고, 우리는 기뻐할 것입니다.(p286)" - 예수의 이 말에 대해 「예수복음」을 읽고 쓴 감상문은 다음과 같지요. :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교를 하게된다면, 자신이 죽고나서도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은 더 행복해질꺼냐 묻는 예수에게 하나님은 또 다음과 같은 대답을 주십니다. "(그들은) 천국에서는 행복을 얻을 거라는 희망을 갖게 될 거야, 나는 천국을 영원히 다스릴 것이고 그들은 천국에서 나와 함께 영원히 살 거라는 희망을 품게 되지." 하나님의 이 대답을 예수는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이것이 주제 사라마구 자신의 해석이기도 할 듯한) "당신은 사람들이 천국이 아니라 지상에서 당신을 위해 살려고 태어난 것임에도 그들이 당신을 위해서 죽는 걸 막을 수 없다는 거로군요, 천국에서는 그들에게 삶의 기쁨을 전혀 주지도 못할 거면서."
  6.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O My Father, if it is possible, let this cup pass from Me : nevertheless, not as I will, but as You will."(마태복음 26:39)
  7. 이와는 달리, 「예수복음」에서 주제 사라마구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그 순간 자신이 당했다는 것을 알았다. 희생 제단에 가는 양처럼 꾐에 빠진 것이다. 그의 생명이 처음부터 죽음을 위해 계획된 것임을 알았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끝맺음을 그려냈었지요.
  8. 이 책의 <프롤로그>는 작품 전체를 다 읽고난 후에 되돌아가 읽어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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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열린책들 세계문학 229
알베르 카뮈 지음, 최윤주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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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설 작품을 읽고, 그 작품을 다 읽은 후 읽으면서 정리해 놓은 부분들을 다시 여러번 읽어보고, 그리고 이제 드디어 그 작품에 대한 감상문을 쓰려 하는 이 순간이 이토록 자신이 없었던 적은 처음이라는 말을 먼저!!!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읽어내기/이해해내기 어려운 작품이라 그런 건 아닙니다만, 이 작품의 핵심은 A다!라 생각하는 바로 다음 순간, 아니야 그게 아니라 B가 맞는 것 같아. 아니지! 다시 생각해보니 이건 C를 말하고자 쓴 작품인거 같아 …… 의 생각이 끊임없이 생겨났기 때문이지요.

"카뮈도 언급한 바 있듯이, 한 권의 소설 작품에는 다양한 해석을 낳을 수 있는 무수한 많은 가능성들이 동시에 내포돼 있다.(p400)"이라는 역자의 글이 없었다면, 아마도 저의 부족한 이해력에 한숨만 내쉬었을지 모를 이 대단한 소설은 분명!!! 처음의 독서와, 두번 째의 독서, 그리고 그 다음의 독서 모두에서 각각 다른 느낌과 해석을 낳을 것이라 확신하기에, 단 한 번의 독서로 이 작품에 대해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하려는 시도는 아예 꿈도 꾸지 않겠습니다. 그저!!! 딱 한 번 읽어본 이로서의 느낌만을 적어 보도록 해볼 뿐. (하지만 사실... 이렇게 시작하는 지금의 생각이 과연 온전한 모습 그대로 끝맺음지어질 수 있을지, 혹 써내려가는 중간에 다른 내용을 적게되는건 아닐지... 하는 의심을 버리지는 못하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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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x년,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오랑이라는 시에 갑자기 죽은 쥐들이 떼로 발견됩니다. 이후 쥐들의 죽음은 점차 가라앉게 되었지만, 이번에는 쥐가 아닌 사람, 주인공인 의사 리유의 진료실이 있는 건물의 수위가 의문의 병으로 사망하게 되는 일이 발생합니다. --- '수위의 죽음은 불길한 조짐들로 가득했던 시기의 끝이자, 비교적 더 힘들고 초기의 놀라움이 서서히 공포로 뒤바뀐 또 다른 시기의 시작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p36)' 


며칠만에 동일한 증상으로 사망한 사람의 수가 배로 늘었고, 리유는 이것이 전염병 그 중에서도 믿기지 않지만 페스트임에 틀림없다 생각합니다. 그는 현 상태가 멈추지 않는 한, 2개월 이내에 도시의 절반을 잃을 위험이 있다(p68) 주장하지요. 결국 오랑시는 외부와의 통행이 차단되었지만 그럼에도 오랑의 시민들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류의 낙관적 기대로 그 전염병을 맞이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우리 시민들은 자신들에게 닥쳐오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이별이라든가 두려움이라든가 하는 공통의 감정이 있기는 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개인적 관심사를 우선순위에 놓고 있었다. 이 질병을 실제로 받아들인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은 자신들의 습관을 방해했거나 이해관계에 영향을 끼치는 것에 대해서 특히나 민감했다. 그래서 짜증을 내거나 화를 냈는데, 그런 감정들로는 당시 페스트에 맞설 수 없었다. …… 우리 시민들은 불안의 한복판에서도 힘든 상황임에는 틀림없지만 어쨌거나 결국엔 끝날 사건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여전히 거리를 활보했고 카페의 테라스에 나앉아 있었다. …… 당시까지만해도 그들은 아직 실업자가 아니라 휴가 중이었다. (pp10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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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는 <알제리 해안에 위치한 그저 그런 프랑스의 도청 소재지에 불과한> 도시 오랑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점령하에 탄압받았던 프랑스를 상징하며, 등장인물 타루와 리유를 주축으로 하는 보건대는 레지스탕스 운동, 즉 항독 저항 운동을 의미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1 작가의 해설이 없더라도 환자의 가족들이 의무적으로 40일간 머무르도록 마련된 「페스트」의 격리 수용소는 제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유대인 수용소를 연상시키고, 희생자들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궁여지책으로 마련된 화장터, 그리고 그곳까지 연결돼 운행하는 기차 역시 인류의 역사에서 인간이 동적인 인간에게 다른 민족이라는 이유로 가했던 어쩌면 가장 극악한 범죄를 떠올리게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페스트라는 가공할 적은 무지막지한 폭력을 휘두르며 수많은 사람들을 전쟁의 화마로 몰아넣었던 나치 전체주의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p400)

이 작품을 쓴 작가 스스로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러한 한 해석을 내렸다는 것에 대해 독자로서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바로 그 다음에 이어지고 있는 '한 권의 소설 작품에는 다양한 해석을 낳을 수 있는 무수한 많은 가능성들이 동시에 내포돼 있다'라는 말에 다시 한번 기대어 작가의 설명과는 다른, 저만의 느낌을 적어본다면... 전 첫 번째 독서 중 여기의 단계에서는2 일단 '페스트'를 "불가항력적인 그 무엇"이라 해석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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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에는 여섯 명의 주요한 등장인물들이 나옵니다. 의사인 리유, 파늘로 신부, 파견나온 기자 랑베르, 하급 공무원인 그랑, 과거의 범죄를 숨기고 있는 코타르, 사건의 서술자 타루가 바로 그들이지요. --- 페스트라는 불가항력적인 공동의 문제에 대해 대처하는 각자의 대응은 그들의 직업만큼이나 모두 다 다릅니다. 주제 사라마구가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온 도시의 사람들이 점차 눈이 멀게되는 상황에 처했을 때, 눈이 먼 자들과 눈이 멀지 않은 단 한 사람의 양자 대비를 통해 그 '불가항력적'인 사건에 대처하는 모습을 대비시켜주었었다면, 알베르 카뮈는 이 작품에서 그 대응 방식을 여섯 개로 늘려 놓았다고나 할까요?


랑베르 】 

그는 타지에서 오랑 시로, 다른 취재차 파견나왔던 기자입니다. 도시가 폐쇄되자 그는 "저는 이 도시에서 이방인입니다.(p111)3"라 말하며, "따라서 자신의 경우가 특별히 고려되어야 한다(p138)"라 주장하지요. 하지만 그 또한 마지막에 가선 "혼자서 행복하다면 부끄러울 수 있(p266)"다라는 이유로 페스트라는 공동의 재앙에 이방인이 아닌 당사자로 맞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 코타르 

과거에 자신이 저질렀던 범죄가 드러나 처벌을 받게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러던 중, 도시에 페스트가 발생하여 모든 공권력이 페스트에만 집중하게 되자, 자신의 과거가 이대로 묻혀질 수 있다는 희망에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만족감의 살아 있는 형상(p247)"로 지낼 수 있게 되지요. 하지만 페스트가 진정될 기미가 보이자 "적어도 한 사람은 망연자실(p352)"해진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그는 결국 페스트가 종식되었다는 선포 이후 절망감에 빠져 권총을 난사하다 체포되고 맙니다.

 

파늘루 신부 】

페스트 발병 초기엔 오랑 시민들은 "오긴 왔지만 결국엔 떠나가 버릴 불쾌한 손님일 뿐(p121)"이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도시의 폐쇄라는 상황에서 "물질적인 즐거움이나 쾌락에 빠져 감금 상태로 인한 불편함과 어려움들을 어떻게든 보상받으려 애를(p410)"썼지요. 이러한 모습을 보고 파늘루 신부는 이 페스트라는 질병을 하느님이 내린 재앙이라 해석합니다. (하지만 그 방식이, '예수천국, 불신지옥'류의 저급함과는 분명 차원이 다릅니다. 게다가 개인적으로 이 부분은 흡사... 지금의 저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이렇게 들려주시고 계신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더랬습니다. 좀 길지만... 그런 이유로, 또한! 인간에게 주어지는 '불가항력'이란 것을 신(神)만이 행사할 수 있는 것이라 간주한다면 그에 대한 인간의 대처가 어떠해야 할까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만들어준다는 이유로 그 부분을 모두 인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만일 오늘 여러분이 페스트와 무관하지 않다면 그것은 반성할 순간이 도래했기 때문입니다. …… 이 불행은 하느님께서 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이 세상은 악과 타협해 왔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이 세상은 신의 자비에 의지해 왔습니다. 잘못을 회개하는 것으로 충분했고, 모든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회개라면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 그날이 올 때까지 되는대로 살아가는 것은 제일 쉬웠고, 그 나머지는 신의 자비가 알아서 할 일이었습니다. 허나, 이제는 더 이상 계속될 수 없습니다. …… 하느님께서도 기다림에 지치시고 그 영원한 희망에 실망하사 결국에는 외면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빛을 잃은 우리들은 이제 오랫동안 페스트라는 암흑 속에 있게 된 것입니다!(p124)


반성할 시간이 왔습니다. 여러분은 일요일에 하느님을 찾아뵙는 것으로 충분하고 그 나머지 시간들에 대해서는 자유롭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은 그저 몇 번 무릎을 끓는 것으로 여러분이 저지른 안일함의 대가를 충분히 지불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렇게 미적지근하신분이 아닙니다. 이렇듯 뜸한 관계로는 그분의 넘쳐 흐르는 애정을 만족시키지 못했던 겁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더 오랫동안 보고 싶으셨고, 그것이 그분께서 여러분을 아끼시는 방식이자 더 정확히 말하면, 그분의 유일한 사랑의 방식인 겁니다. 자, 따라서 여러분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다 지쳐 버리신 하느님께서는 인류가 역사를 가져온 이래 죄많은 도시들마다 재앙이 찾아들었듯이 여러분에게도 재앙이 찾아들도록 하신 겁니다. (p126) 

​저에게는 뜨끔했던, 그리고 반성을 하게 해주었던 파늘루 신부의 종교적 논리에 물론!!!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많겠지요. 이 소설의 주인공격인 의사 리유가 바로 그러한 인물이었습니다. 


【 리유

의사라는 직업적 특성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의 생각은 파늘루 신부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페스트가 하느님의 재앙인지 아닌지에 상관없이 그에게는 그것이 엄연한 현실이었었으며, 어쨌든 이겨내야하는 질병이었기에, 그러한 재앙을 내려주신 하느님께 무릎을 끓어야 한다는 파늘루 신부와는 달리 그는 절대로 무릎을 끓어서는 안된다!라 생각하지요. 그는 페스트라는 불가항력 앞에 어쩔 도리가 없다라며 절망하는 것이야말로 "불행이며, 절망에 익숙해진다는 건 그 자체보다도 더 나쁘다고 생각(p232)"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만일 자신이 전지전능한 단 한 분의 신을 믿는다면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 일을 그만두고 신에게 그 일을 맡길 거(p164)"라고,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을 신에게 완전히 내맡기진 않기 때문(p164)""적어도 자신은 신이 만든 세상과 투쟁하며 진리의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한다(p164)"며 그러하기에!!! 신께서도 "그렇게 침묵만 하고 있는 하늘을 올려다볼 일이 아니라 사람들이 온 힘을 다해 죽음에 맞서 투쟁하기를 더 바랄지도 모(p166)"른다라 리유는 말합니다. --- 이 부분은 예의 엔도 슈사쿠의 「침묵」에 등장하는 페레이라 주교의 말, 그리고 김은국의 「순교자」에 등장하는 신 목사의 마지막 말을 떠올려주지요. 이 작품에서도 파늘루 신부는 어린 아이의 죽음을 보고난 후의 설교에서 "전부 다 믿거나 전부 다 부정해야 합니다.(p286)"라고, 한 발 더 나아가 "신을 증오하든가 아니면 사랑하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p291)"한다라 말하게 됩니다.  하지만!!!

현실의 불행에 침묵하고 계신 신 --- 그 신의 침묵에 성직자인 자신들마저 동참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던 페레이라 신부와 신 목사와는 달리, 이 작품의 파늘루 신부는 끝내... 그 신의 침묵에 저항하지 않습니다. 그는 페스트가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기인된 것이기 때문에, 이 참혹한 현실마저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해야 하는지도 모르지요(p278)"라고만 말합니다. 이에 대해 리유는 "인간의 구원이란 제게는 너무나 거창한 말이에요. …… 제가 관심을 갖는 건 인간의 건강입니다. 무엇보다도 우선 건강이죠.(p279)"라 대답하지요.

다시 한번, 이 부분에서 전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이 떠올랐더랬습니다. 주인공 윌리 로먼에게 닥친 현실의 어려움들은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찾아내기에는 너무도 급박했던, 그리하여 결국엔 죽음을 선택할 수 밖에 없게 만든 불가항력이었었지요. 누군가는 그에게 닥친 불행이 무엇때문이었는가를 먼저 알아내야 한다 - 즉, 신께서 내신 이 재앙이 왜! 우리에게 주어졌는가를 생각해봐야 한다는 파늘루 신부 같은 이 - 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로먼에게는 (의사 리유의 생각처럼) 사방에서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수많은 불들을 우선 끄는 것이 더 급선무였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로먼의 그러한 태도에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공감 했었었거늘, 이 작품 「페스트」의 파늘루 신부와 리유의 갈등 구조에서는 선뜻 누구 한 사람의 편에 서게 되지 못하겠더군요. 그저... 마치 "All bleeding stops... eventually.4"라는 장난스런 말을 매우 심각한 버젼으로 표현하고 있는 다음의 구절 속에서 '다른 한편으로는'으로 말해지고 있는/말해질 수밖에 없다 생각하는 아이러니때문일 거라고 저의 우왕좌왕을 변명해낼 수 밖엔 없을 뿐.


도시 전체가 처해 있는 이러한 상황에서 하루하루가 지난다는 것은, 아직 살아 있다는 전제하에서 각자 시련의 끝에 가까워진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었다. 리유는 이 점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임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조금은 지나치다 할 수 있는 막연한 진실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p139)

【 그랑

이 작품 속의 그랑은 매우 우유부단하고 소심하며, 어떤 면에서는 페스트라는 공동의 재앙 속에서도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이기적인 사람이라 해석될 여지도 있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의사 리유의 서술에서 드러나는 작가 알베르 카뮈의 그랑에 대한 평가는 이와는 전혀 다르지요. 이러한 작가의 해석이 처음에는 그저 매우 신선하다! 정도였었습니다만, 이 작품을 다 읽고 나니 비교적 작품의 초반부에 있던, 심지어 그랑이라는 인물과는 전혀 관계 없는 묘사인 다음의 구절이 왜! "영웅이라 하는 본보기와 선례(p178)"로 그랑을 꼽고 있는지, 한 발 더 나아가보자면 2015년 대한민국의 (위기 속) 일상에 한 번쯤 신중하게 고려되어보아야 할 의미인지 상당한 공감을 제게 안겨주더군요.


훌륭한 활동에 중요성을 지나치게 부여하는 것은 결국 악에 대해서 강력하면서도 간접적인 찬사를 표하는 셈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런 훌륭한 행동들이 그렇게도 큰 가치를 갖는다면 그런 행동들 자체가 드문 데다가 사악함과 무관심이 인간들의 행동에 있어 훨씬 더 빈번한 원동력이기 때문이라는 점만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p170)

즉, 작가 알베르 카뮈는 "인간이라면 누구든 자신이 눈으로 볼 수 없는 고통을 진실로 함께 나눌 수 없다는 가혹한 무력감(p179)5"에 빠지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재앙과 무력함 속에서도 자신의 몫을 묵묵히 해내고 있는 이 인물의 평범함이야말로 (어쩌면 현실적으로 혹은 신앙적으로 지극히 헌신적인 의사 리유와 파늘루 신부에게 부여될지도 모를) 영웅주의에 앞서는 합당한 자리를 차지할 권리가 있다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라는 겁니다. 이처럼 '페스트'로 상징되는 극한의 혼란 속에서 평범이라는 것을 끄집어내 부각시키려는 작가의 의도는 다음의 인물인 타루에 이르러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지요. 

【 타루

오랑 시민들이 이 전염병을 다른 병들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던 초기에는 종교가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안 이상, 그들은 쾌락의 기억을 떠올린 것이다. …… 나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뭐 어쩌란 말인가! 죽음이란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나와 같은 사람들이 옳다는 걸 입증하는 하나의 사건에 불과하다.(p157)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 중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이 바로 이 타루였었습니다. pp313-325에 걸쳐 있는 그의 독백이 그를 이해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단서입니다만, 아무리 여러 번 읽어봐도 계속 어렵기만 한데... 왠지 그의 독백6 안에 이 소설의 핵심이 들어있을 것 같다라는 생각이 내내 떨쳐지지가 않았더랬지요.


타루는 말합니다. "나는 이 도시와 이 전염병을 알기 훨씬 전부터 이미 페스트로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건 내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p313) …… 단언하건데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은 각자 자신 안에 페스트를 가지고 있다는 건데, 왜냐하면 실제로 아무도,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그것으로부터 무사하지 않으니까요.(pp323-324)"


그의 이 말은 --- (심각버젼) 파늘루 신부의 생각대로 해석해보자면 "이 난파를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빈손에 비통한 마음뿐, 무기도 없고 대책도 없이 또다시 이렇듯 참담한 패배 앞에서 그저 강 저편에 그대로 있어야(p370)"일 수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이 될 수도, 혹은 (일상버젼)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을 하고, 아직은 조금 더 사랑하고, 돈을 버느라 일하고, 너무 열심히 일하다 보니 사랑하는 것도 그만 잊어버리고 만(pp107-108)" 그랑의 과거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


페스트가 대체 무엇이냐? 그건 "인생인 거다(p393)"라 말하는 한 노인의 말처럼, 타루는 결국 페스트에 걸려 죽음을 맞이하였고 그 마지막 순간에 그의 입에서 기어이 "그게 … 지는 싸움이네요(p363)"라는 하도록 만든, 그리하여 "도대체 리유가 이긴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p372)"라는 끝맺음을 하고 있는 --- 이 소설의 '페스트'가 작가의 설명대로 '나치 전체주의'라는 특정의 재앙일 수도 있겠지만 크게 보면 결국!!! 우리의 인생 그 자체를 의미하는, 그렇게 우리의 인생이 결국엔 불합리한 것이라는 작가의 생각으로 이해하는 게 맞지 않을까하는, 그랑과 타루라는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 두 인물을 이 작품의 핵심으로 이해한 제 첫 번째 독서의 결론7이었습니다. (여기엔 "「페스트」는 '반항' 또는 '긍정'의 주제에 해당하는 작품이다(p400)"라는 역자의 해설이 큰 도움이 되어주기도 했지요.)  


이런 의미에서 아래에 인용해 놓은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을 곱씹어 보면, 정말로... 이 작품은 대단한 소설이구나!, 「이방인」만으로는 작가 알베르 카뮈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온전한 의미를 결코 이해할 수 없겠구나... 라는 걸 느끼게 됩니다. 읽으면서도 찌릿했었고, 다 읽고나니 더 찌릿해졌으며, 이렇게 정리해가며 감상문을 쓰고 나니 더더욱이 찌릿해지게 되는 이 작품을 다시 한 번 더, 두 번 더 읽고나면 --- ①「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주제 사라마구가 그려냈던 일상을 벗어났을 때 나타나는 인간의 본성과 이 작품에서 보여지는 인간 본성8을 비교해 본다든가, ②「이방인」에서 뫼르소의 살인 동기였던 '태양9'이 이 작품에서도 반복되어 나오는 것에 대한 의미, 또는 ③작가 알베르 카뮈가 재앙와 신을 연결시키는 방식10을 생각해 본다든가, 아니면 ④이 작품 속에 적잖이 등장하고 있는 '이별11'이라든가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는 '애정12'이라는 단어들에 대해서, ⑤종국적으로는 (사형제도를 포함한) 인간의 죽음이라는 문제 등등, 전체적으로 읽어내기보다는 어느 하나에 집중해 읽어본다면 끝없이 카드가 튀어나오는 마술사의 주머니같을 듯 싶습니다. 정말!로... 몇 번은 더 읽어보야겠다는 욕심이 불끈불끈 솟는 이 작품을 진짜로 몇 번 더 읽고나면 그때엔 과연 어떠한 생각과 이해를 하게될지 벌써부터 궁금해지네요.   


도시로부터 들려오는 환희의 함성에 귀를 기울이면서 리유는 이 기쁨이 언제든 위협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 페스트균은 결코 죽지도 않고 사라져 버리지도 않으며 …… 인내심을 가지고 때를 기다리다가, 인간들에게 불행도 주고 교훈도 주려고 저 쥐들을 잠에서 깨워 어느 행복한 도시 안에다 내몰고 죽게 하는 날이 언젠가 다시 오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p396)

 


※ 읽어본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의 작품 (수상연도 순)

- 헤밍 웨이(1954) : 노인과 바다

- 알베르 카뮈 (1957) : 이방인

- 존 스타인벡 (1962) : 분노의 포도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1970) :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윌리엄 골딩 (1983) : 파리대왕

- 주제 사라마구 (1998) : 눈 먼 자들의 도시· 죽음의 중지」 · 도플갱어」 · 예수복음

-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2010) :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 모옌 (2012) :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

 

 

 

 

※ 본문에 등장하는 작품들의 감상문 : 눈먼 자들의 도시」 · 「침묵」 · 「순교자」 · 「세일즈맨의 죽음」 · 「이방인


 


 



 

  1. 실제로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레지스탕스 조직 'combat'에 참여하는 등 나치에 저항하여 활동하였다고 합니다. - <네이버 캐스트 : 알베르 카뮈> 중
  2. 사실 여기까지 썼을 때와 마지막에 끝맺음을 했을 때 '페스트'를 이해하는 저의 생각이 조금 바뀌었기 때문이 이 표현을 추가해 넣었습니다. '조금 바뀌었'지만 넓게 보면 같은 것이라 우겨볼 수도 있다,라 생각하며 말이죠. ^^;;
  3. 이 부분은 작가의 전작 「이방인」에서 보여졌던 '이방인'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떠올려주게 했습니다. 이 밖에도 pp74-75에는,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 2권」에서 「돈키호테 1권」을 인용했었듯, 작가 스스로 자신의 전작인 「이방인」에 등장했던 살인 사건을 인용해놓고 있기도 하지요.
  4. Murphy's EMT Law.
  5. "감금 상태와 유사한 것을 다른 무언가로 재현함은 무엇이 되었든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빌어 표현하는 것만큼이나 이치에 맞는다"라는, 이 책의 첫 페이지에 쓰여있는 다니엘 디포의 말이 이 문장에 녹아들어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6. 이 독백 속에서 타루는 왜 자신이 사형제도에 혐오감을 느끼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는데, 실제 알베르 카뮈는 사형제도에 반대하였고, 훗날 사형반대협회의 설립자인 아서 쾨슬러와 공저하여 쓴 에세이 「단두대에 관한 성찰」을 썼고, 이 에세이로 195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 <네이버 캐스트 : 알베르 카뮈> 중
  7. 페스트를 '불가항력적인 그 무엇'으로 해석했었던 감상문 초반부의 제 이해와 '(불합리한) 우리의 인생 그 자체'로 이해하고 있는 이 후반부의 해석이 결국엔 일맥상통하는 것이라 우겨보려합니다. 뭐 어쨌든 우리의 의지로 태어나진 것이 아니며, 우리의 인생이 펼쳐지고 있는 이 세상이 불합리한 면을 가지고 있다라는 점 또한 모두 '불가항력적'인 것들이니까요.
  8. 저녁에는 마지막일 수도 있는 오늘 하루를 가능한 한 더 길게 연장해 보려는 마음에 무리를 지어 모여 있기보다는 각자 집으로 돌아가거나 또는 카페로 들어가느라 서두르는 몇몇 사람들만이 겨우 눈에 띄었을 뿐이었다.(p216) // 리유와 친구들은 당시 자신들이 얼마나 지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 리유가 그 점을 눈치챈 것은 자신은 물론 동료들에게서 뭔지 모를 야릇한 무관심이 자라나고 있음을 발견하면서부터였다. … 그런 모습은 치열한 격전지의 병사들, 그러니까 고역에 지칠 대로 지치고 매일매일 수행해야 하는 일에서 그저 지쳐 떨어져 나가지만 않으려고 애를 쓰다 보니, 이제는 최후의 군사 작전도 휴전의 날도 더 이상 바라지 않게 되어 버린 병사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무관심한 태도였다.(pp241-242)
  9. 대문이란 대문은 모조리 굳게 잠기고 덧문들마저 닫혀 사람들이 이렇게 스스로를 보호하려 드는 것이 태양으로부터인지 아니면 페스트로부터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p144) // 페스트가 만든 태양은 모든 빛을 퇴색시키고, 그것이 무엇이건 기쁨이라는 것 자체를 쫒아버렸다.(p147)
  10. 사람들은 흔히 재앙이란 비현실적인 것, 잠에서 깨면 사라지고 마는 악몽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재앙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으며, 악몽이 점점 진행됨에 따라 사라지는 것은 사람들, 그것도 제일 첫 번째는 휴머니스트들인데, 왜냐하면 그들은 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p54)
  11. 그는 자신과 아내를 갈라놓는 장벽에서 탈출구를 찾느라 온 힘을 다한 나머지 여태껏 아내에 대한 생각이라고는 조금도 하지 않고 지내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바로 그와 동시에, 모든 통로가 또다시 막혀 버리자 자신의 욕망의 한 가운데에서 다시 한 번 그녀의 모습을 찾았고... (p202)
  12. 그들(오랑의 시민들)은 서로를 가깝게 하는 따뜻한 인간애를 절실히 원하면서도 동시에 서로를 멀어지게 하는 경계심 때문이 선뜻 나아가지 못한다. 누구든 자기 이웃을 믿을 수 없고,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람이 페스트균을 옮겨서 자신을 감염시킬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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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반양장) - 지금 우리를 위한 새로운 경제학 교과서
장하준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경제학이 과연 그렇게 어려운 분야일까? 사실은 그럴 이유가 없다. 쉬운 말로 잘 설명하기만 하면 말이다.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양한 경제학적 논쟁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특정 경제 상황과 특정 도덕적 가치 및 정치적 목표하에서 어떤 경제학적 시각이 가장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비판적 시각을 갖출 수 있도록 경제학을 배우는 일이다. …… 나는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라고 믿는다.

 - <프롤로그> 중

 

③경제학은 정치적 논쟁이다. 과학이 아니고, 앞으로도 과학이 될 수 없다. 경제학에는 정치적, 도덕적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확립될 수 있는 객관적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

- <에필로그> 중


저자인 장하준 교수(이하 '장하준'으로 지칭할 때도 있음) 스스로가 '나의 책은 이런 책이다'라 밝힌 내용만큼 이 책에 대해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는 글은 없을겁니다. 그렇다면! (그의 견해에 동의하느냐의 여부를 떠나) 독자로서는 그가 제시한 기준(?)을 따라 이 책을 읽어내는 것이 가장 충실한/합리적인 독서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런 관점하에... 이 책을 다 읽고나니 말이죠!


…………………………………………

 

① 경제학은 쉬운 말로 잘 설명하기만 하면 어려운 분야가 아니다.

 

이 말처럼 허망한 표현은 또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 '쉬운 말로 잘 설명하기만 하면'이라는 전제는 비단 경제학 뿐 아니라 세상 모든 것에 다 적용되어질 수 있는, 너무도 당연해서 이런 말을 한다라는 것 자체가 '허망'할 수 밖엔 없기 때문이지요. 진짜 문제는... '쉬운 말로 잘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혹은 그런 사람의 글)을 만날 수 있느냐인데, 그런 점에서 보자면 분명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는, 읽어내기/이해하기 쉬운 말로 - 이것이 소위 말하는 가독성이 좋은 소설을 읽을 때의 경우와는 분명히 다른 경우이지만 -  경제학(의 일부분)을 설명해주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꽤 훌륭한 텍스트라 생각합니다.

​대학에서 쓰는 경제학 교재와 강의는 학생들을 주눅들게 만든다. 수학적 논증방법도 그러려니와 경제학의 토대를 이루는 철학과 사회적 배경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고 곧바로 미시적인 연습문제 풀이 기술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 경제학이 어떤 철학적 토대 위에 서 있으며, 그것이 실제 경제현상을 어디까지 얼마나 설명할 수 있는지. 그 장점과 한계를 알면서 공부하면,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수학적 개념과 모형에서도 사람 냄새를 맡을 수가 있다. 

- 유시민 著,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 중.

유시민은 경제학에서 수학의 역할을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수학적 모형 뒤에 자리하고 있는 철학적 토대를 가르치고 있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었지요. 하지만, 장하준은 아예 '자신은 수학(으로된 경제학)을 싫어한다'라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못한다'는 절대로 아니겠습니다만!) 이러한 인식의 차이로 인해, 이 책을 통해 접하게 되는 (장하준의) 경제학은, 그러하기에! .최소한 경제학이 그다지 어려운 분야는 아니네,라는 인식을 독자에게 전해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그가 해주고 있는 경제학이란 것이...

 

저자는 현재 대학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연구 대상보다는 분석 도구(최적화와 균형에 초점을 맞춘 수학적 모델)에 의해 정의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는 결국 「괴짜 경제학」과 같은, 소위 '경제뿐 아니라 다른 거의 모든 것들도 경제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라는 학문적 풍토를 낳았다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류적 풍토와는 달리, 그는 '다루는 대상'으로 경제학의 영역을 규정하고 성격을 정의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경제학이 다루어야 할 대상도 '인생, 우주 그리고 모든 것'이 아니라 경제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독자마다 다르겠습니다만, 저 개인적으로 경제학은 '분석의 도구'일 때 가장 날개를 활짝 편 모습이 된다라 생각하기에 책의 이 첫 부분 - 어쩌면 저자의 주장 거의 전부가 될지도 모를 - 은 뭔가 찜찜한 마음으로 읽어갈 수 밖엔 없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이 책이 '경제학'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말하는 것보다는 '장하준의 경제학'을 이야기하고 있다라 말하는 것이 이 책에 대한 더 정확한 설명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물론 책의 마케팅을 위해 이렇게 한국어판 제목을 붙인 것이겠지만, 출판사가 의도하지 않았던 면이 훨씬 더 훌륭해진 것이지요. 한국어판의 제목을 '경제학 강의'가 아닌 '장하준의 경제학'으로 읽어낼 수 있다면 말이죠.)

 

결국 우리가 경제학에 바라는 것은 특정 경제학 이론이 경제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만을 끊임없이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경제 현상을 최대한 잘 설명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② 다양한 경제학적 논쟁이 존재한다.

경제학과 학부 과정에도 <경제학설사>란 과목이 있습니다. 학교마다 좀 다르겠지만, 제가 다녔던 학교는 <경제학설사> 과목이 전공필수 과목이었었지요. 그러하기에 경제학과 학부생들도 '다양한 경제학적 논쟁이 존재한다'라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만! '어떻게 알고 있느냐'의 문제로 넘어가면 이 책에서 보여지는 저자의 지적은 매우 옳은 방향을 향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 대부분 중상주의로 시작되는 경제학설사 책들은 한 학파/학설을 설명하고 마지막에 그 한계점들을 지적하고 있지요. 그리고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장은 'OOO학파의 이러한 한계점들을 극복하기 위해'라는 뉘앙스로 시작되곤 합니다. 즉, 각 학파를 독립적인 것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마치 '정-반-합'스러운 논리 전개로 배우게 되는 거지요. 그리고 그 마지막은 현재의 주류 경제학인 신고전학파 경제학으로 마무리 지어지기에 당연히!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가장 단점이 적은, 가장 완성된 단계의 경제학으로 무의식중에 인식되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경제 이론이 아무리 위대해도 그것은 특정 시간과 공간에서만 유효하다. 따라서 경제 이론을 효과적으로 적용하기 위해서는 그 이론을 사용해서 분석하려는 특정 시장, 산업, 국가의 성격을 규정하는 기술적, 제도적 요인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여러 가지 경제학 이론을 그 이론이 적절하게 적용되는 맥락에 맞게 이해하려면 어떻게 진화했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아홉 개의 경제학 학파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경제학설사>나 <거시경제학> 교과서에 소개되고 있기도 한 내용들입니다만, 이를 한 문장으로 요약해놓은 저자의 표현은 그야말로 '대상에 대해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람'으로부터만 나올 수 있는 '쉬운 말'로 되어 있다라는 점에서 정말!로 매력적이더군요. 거기다가 그저 이렇게 아홉 개의 학파를 각기 설명해 놓은 것에 그친 게 아니라...

 

저자는 '칵테일'이라는 표현으로, 이 책에서 소개되어지고 있는 아홉 개의 학파들의 적절한 조합을 소개하며, 이러한 복수의 이론들간의 조합이야말로 현 시점에서 경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경제 정책 입안자나 경제학자가 아닌 (이 책의 주요 독자일) 일반인들도 '다른 사람이 내린 결정의 수동적이 피해자가 되지 않으려면' 이러한 여러 학파들의 주장에 대해, 비록 개략적이나마 반드시 알고 있어야한다라 말하고 있기도 하지요. --- 아니 잠깐만!!! 쉽게 말해 '모두가 다 지금보다 더 잘 살게되자고' 혹은 '최소한 다수가 지금보다는 더 잘 살게해주겠다고' 하는 경제학이 나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다는 말은 또 뭘까요?

 

 


③ 경제학은 정치적 논쟁이다.

 

이 책을 통해 저자가 하고 싶었던 단 한마디를 꼽으라면 아마도 위의 문장이 아닐까 싶습니다. --- 학교에서 배웠던 경제학 - 특히 미시경제학의 경우 - 은, 최소한 '상상력'의 범주에서만 보자면 학생들로 하여금 그 어떤 자신만의 개성적 상상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었지요. 모형이 지니고 있는 모든 게임의 룰 - 참가자, 효용함수, 생산함수, 제약조건 등등등 - 전부는 모두 주어지기만 할 뿐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그저 이 주어진 것들 중에서 최적의 조합을 찾아내는 것이 경제학이 해야할 임무라고 배웠었습니다...만!!! 장하준 교수는 이러한 기본 전제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개인주의적 전통을 따르는 경제학자들은 개인의 선호가 어디에서 생겨나는지를 묻지 않고, '독립 의지를 가진' 개인의 내부에서 생겨난 궁극적인 자료로 취급할 뿐이다. …… 그러나 우리가 가진 선호는 가족, 이웃, 교육, 사회적 계급 등등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 환경에 크게 영향받아 만들어진다. …… 개인은 개인주의 경제 이론에서 묘사하듯 '독립 의지를 가진' 존재가 아닌 것이다.

주류 경제학(= 신고전학파 경제학 = 개인주의 경제 이론)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모형의 배경에 숨겨져 있는 철학적 사고 체계는 현실 속에서 매우 심각한 결과를 낳게 된다/낳을 수도 있다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개인'이 처해 있는 (경제) 환경의 거의 모든 것이 외부로부터 주어진다라는 가정의 이면에는 재산권, 노동권 등 기존의 사회 구조 또한 '이미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고 현재의 (불합리한) 상황에 의문을 제기하지 말라는 암묵적 요구가 깔려 있다라는 것이지요1. 이러한 사고 방식을 따라가다보면 결국! (물론 극단적 예일 수도 있겠으나) 경제적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정치적 자유는 희생되어지는 것이 더 낫다라는 주장까지도 나오게 된다2고 저자는 말합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사고가 사회의 주류로 자리 잡게 되면 - 이미 자리 잡은 듯 하지만 - 사람들의 생각 자체가 바뀐다는 것에 있다고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적응된 선호3 adaptive prefernece'라 불리우는, 예를 들어 억압을 받거나 착취나 차별을 당하는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자신이 행복하다라 생각하고, 또 그렇게 말하는 상황이 생겨난다는 거지요. 물론 이러한 '허위의식4 false consciouness' 자체도 문제가 되지만, 더 큰 문제는 이들에게 '진실'을 말해줌으로써, 그들에게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 당신들 스스로를) 행복해하면 안 된다고 말할 권리를, 그럼으로 하여 (비록 착각이나마 자신을 행복하다라 생각하고 있는) 그들을 비참하게 만들 권리를 가진 사람 또한 있을 수 없다라는 점이라고 저자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 발 더 나아가 ---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피하는 직종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해 신고전학파 경제학은 '그들이 그 직업을 자유 의지로 선택했다면 그들이 다른 것보다 그것을 선호했기 때문'이라 간단히 정리해내고 있습니다. 제가 배웠던 경제학 또한 바로 여기!까지였었습니다만...  이에 대한 '장하준의 (정치)경제학'은 저에게 사뭇 창피함까지를 안겨주더군요. (주류경제학자들은 어쩌면 다음의 인용은 '경제학'의 범주가 아니다라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과연 그 선택을 하게 된 상황이 바뀌어야 하는지, 그리고 바뀔 수 있는지이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조건이 '좋지 않은' 일이라도 차선책이 굶는 것이라면 기꺼이 그 일을 선택할 것이다. …… 이런 상황에서 한 선택을 '자유 의지'로 했다고 할 수 있을까? (먹어야 한다는 생리적 조건 때문에) 그 일자리를 선택하도록 강요당한 게 아닌가? …… 가난한 사람들이 조건이 '좋지 않은' 일을 자발적으로 선택할 만큼 절박하게 만든 환경을 용인할 것인가를 물어야하는지도 모른다.

경제로부터 정치를 분리해내려는, 그리하여 경제학 또한 물리학이나 화학같은 '객관적 과학'이라 믿고 싶어하는 (주류) 경제학은 시장의 실패에 대해서도, 이를 보정하려는 정부의 개입은 더 커다란 정부의 실패를 가져온다며 반대를 합니다. 이에 대한 장하준 교수는, 시장은 '1원 1표'이므로 결국, 돈을 가진 만큼 영향력을 가지는 사회가 되어 - 즉, 기득권층의 '기득권'은 정당하게 보호받게 되지만 - 시장을 통해서는 돈이 없는 일반 국민들은 중요한 결정들에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결과를 낳게 된다라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를 지적한 다음의 표현은 너무도 직설적이고, 또한 (생각해보면 볼수록) 너무도 현실적/정확한 것이 아닐까도 싶더군요. : "신고전학파 경제학은 …… 자기들 이론은 과학적인 거라고 얘기하면서 실제로는 누구5 편을 드니까 더 문제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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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하준의 경제학!!!

 

'경제 원론'스러운 경제학 책6을 찾으신다면, 이 책이 좋은 선택이 될 거라는 말은 할 수 없을 듯 합니다. '조직의 중요성, 생산 활동의 비중' 등 여타의 일반적인 경제학 관련 책들이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는 부분들에 대해 적잖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는 점 등이 뭔가 낯설음을 안겨줄지도 모르겠다라는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 경제학이 답해야 하는 수많은/어쩌면 거의 모든 질문들은 정치적·윤리적 판단을 요구하기에, 경제학은 '가치 판단을 배제한 과학'이 될 수도 없으며, 되어서도 안 된다라 주장하는 저자이기에, 그 스스로도 또한 자신의 주관적 가치 판단을 이 책에 적잖이 담아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찮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만, 저자가 각종 통계 수치들 앞에 붙여놓은 '그다지, 듬뿍' 등의 단어들이 단적인 예가 아닐까 싶네요.) --- 그러하기에! 저는 이 책이 경제학을 전혀/거의 모르는 분에게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저자의 저작들 중 제가 읽어보았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도 똑같이 받았었는데, 그 책이 한창 유행(?)했었을 당시 고등학생들에게도 필독 도서로 추천되고, 독후감이 숙제로 나갔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상당히 놀랐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그들이 말하지 않는 것들'을 먼저 읽으라 하는 건 분명 문제가 있는 교육 방법이 아닐까 싶기 때문이었죠. 이 책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또한... 그런 점에서 경제학을 전혀/거의 모르는 분들에게 적절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늘어나지는 않는, 게다가 상당부분 잊혀지기까지한 저의 경제학 지식들로는, 저자의 견해들에 대해 동의보다는 갸웃거림을 더 많이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만... '경제학은 정치적일 수 밖에 없으며, 우리가 맞닥뜨리게 되는 경제의 문제들은 그러하기에 한 가지의 이론만으로는 결코 풀어낼 수 없는 복잡한 것들'이라는 저자의 주장(='장하준의 경제학')은 정말로... ('지금 우리를 위한 새로운 경제학 교과서'라는 띠지의 표현대로) 참 많이 '새롭게' 다가왔네요. 다만 저에게는 '신선하다'는 의미가 아닌, '낯설다'와 '의아하다'의 중간쯤 되는 뭐 그런 의미로 '새롭다'였었을 뿐. --;;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와 이 책을 통해 접해본 이 분의 주장과, 심지어는 글쓰는 스타일마저도 저 개인적으로 좋아하지는 않습니다만, 최소한! 다음의 충고만큼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듯/기억하고 있어야 할 듯 싶네요.

 

"망치를 쥔 사람은 모든 것을 못으로 본다"라는 말이 있다. 어떤 문제를 특정 이론의 관점에서만 보면 특정 질문만 하게 되고, 특정한 각도에서만 답을 찾게 된다. 운이 좋아서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가 '못'이라면 손에 쥔 '망치'가 안성맞춤의 도구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면 다양한 도구가 필요하다. …… 부디 '망치만 쥔 사람', 더욱이 다른 연장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은 되지 말자.

 

 

※ 함께 읽어보면 좋을 듯한 책들


- 장하준 著,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 데이비드 보일, 앤드류 심스 著, 「이기적 경제학 이타적 경제학

- 조나단 B. 화이트 著, 「애덤 스미스 구하기

- 와타나베 이타루 著,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 유시민 著,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

 

 

 

 


 

  1. 이에 대해 장하준 교수는 뒤에 나오듯, "신고전학파 경제학은 …… 자기들 이론은 과학적인 거라고 얘기하면서 실제로는 누구 편을 드니까 더 문제인 거죠."라 비판하고 있습니다.
  2. 저자는 이의 일례로 하이에크가 칠레의 피토체트 정권을 찬양한 것을 들고 있습니다만, 제가 읽었던 한 우리나라 경제학 교수의 책에는 심지어!!! 독도 영유권 분쟁에 대해서까지도 100% 비용-편익 분석을 대입시켜, 도출 가능한 결과를 보여주는 글도 있더군요. 이런 '깡패 경제학'적 관점은... 경제학 스스로가 욕을 자청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3. 비슷한 것으로 'anchor effect'라는 것이 있습니다. 일단 어느 특정 한 상황에 처해지게 되면 그 특정 상황이 새로운 기준점이 된다라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담배값이 인상되면 초기에는 담배 수요가 줄어들지만 (기준점이 옛 가격이므로) 시간이 지나면 다시 원래의 수준으로 회복되곤 하는, 다시 말해 새로운 기준점에 어느덧 흡연자들이 적응해버리게 되어 새로운 담배값이 '비싸다'라는 걸 인식하지 못하게 되어버리는 상황이 있지요. 이 책에 나와있는 내용 또한, 불행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라도 약간의 소득상승이 발생되면 곧바로 자신이 '더 행복해졌다'라 생각하게 되는 것 또한 이 'anchor effect'로 설명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네요.
  4.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접해보았던 용어입니다만, 내용을 이해하고 보면... 번역상 뭔가 심히 어색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네요.
  5. 기득권층.
  6. 이런 류의, 경제학 비전공자를 위한 책으로는 조영달,홍기현 저 <경제학 산책>을 추천해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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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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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창정이라는, '가수'가 아닌 '배우 임창정'을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그가 맡은 역할들을 보면, 그 이외의 어느 배우가 과연 그 역할을 해낼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매번 하게 되죠. 하지만 '배우 임창정'의 가장 큰 매력은 단연코! '웃긴데... 근데 엄청나게 슬픈' 배우라는 겁니다.

 

<스카우트>라는 영화, 흥행이 어땠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 IP TV로 두 번이나 보았던 영화이지요. --- 고교 3학년생이었던 선동열 선수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대학 체육부 직원이었던 임창정이 광주로 파견됩니다. 선동열 선수의 부모님을 만나 식사도 대접하고, 야구 감독님을 찾아가 아부도 하고 하는, 그런 역할을 '배우 임창정'은 정말 잘해냈지요. 선동열 선수의 부모님으로부터 OK! 싸인만 받아가면 되는데, 그러면 신세도 좀 필 것 같은데, 그래서 정말 존나리 노력했고 결국! 광주 시내 어느 고깃집에서 드디어 선동열 선수와 아버님을 만나 최종 승낙을 받기로 약속 다 잡아놨는데1 --- 그해가, 그때가, 그리고 그곳이 하필!이면, '그해, 그때, 그곳'이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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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가 문제냐? 맷값을 주면서 사람을 패라는데, 안 팰 이유가 없지 않아?" (p134)​

지극히 상투적인 '작용과 반작용'을 지니고 있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 총장실을 점거한 학생들을 야구빳다를 들고 가 내쫒으라는 선배의 지시를 받았던 야구부 선수들은 하늘보다 더 무서운 선배의 그 지시를 무작정 이행합니다. 당시 후보 선수였던 임창정 또한 '아무 생각없이', 하라니까 그냥 그 짓을 하러 갔지요. 영화는 이 장면에서 이런, 인간의 단순함/단순해짐을 적나라하게, 얼핏 '덤덤하게'라 표현하고도 싶은 화면으로 보여줍니다.

나가라! 못나간다! 나가라니까!!! 못나간다니까!!! --- 야구빳다를 들고 총장실로 갔던 야구부 선수들에게는 아무런 의도란 것이 없었습니다. 그냥 선배들이 시키는 일이니까 갔었던거고, 거기 있었던, 같은 학교의 학우들인 그들을 해산시키라니까 그렇게 하려 했던거지요. 이제 총장실을 점거하고 있는 학생들과, 그들을 내쫒으려는 야구부원들 사이에는 애초에, 왜 그들이 총장실을 점거했던 것이며, 왜 또 다른 그들은 해산을 시키기 위해 야구빳다를 들고 있는 것인지는 그 어느 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단지!!! 서로간의 감정만이 대립하고 있는 거죠. 애초부터 선배들의 그런 지시를 탐탁해 하지 않았었던 임창정마저도 '어느덧 돌변'하게 되어, 그 누구보다 더 열심히! 학생들을 향해 야구빳다를 휘두릅니다. "씨발놈들! 나가라면 그냥 네,하고 나갈 것이지 왜 안나가고 지랄들이야!!!"

 

'거부할 수 없는 명령에 의해, 자신의 이성이 작동됨 없이, 그 모든 심적 부담감을 '거부할 수 없는 명령때문에'라는 이유에게 전가해 버린 채, 인간의 보편적 이성에 반하는 행동을 어쨌든 해낼 수 있다' 라는 명제를 그 장면은 (차라리)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애초 서로가 왜 그 위치에 서 있었는지는 모두 잊혀진 채 대드니까 때리게 되고, 때리니까 나도 같이 맞서 때리게 되는 거였죠. --- 마찬가지였을 꺼라 생각합니다. 야구부 선배들마냥 '특별하게 잔인한 군인들(p206)'이 내린 명령을 '특별하게 소극적인 군인들(p212)'이 거부하기는 불가능했었던 거라고, 그렇게 막상 그 일의 한가운데에 서있다 보니 그들 중 누군가로부터 (위에서와 같은) '뭐가 문제냐?'라는 식으로 '어느덧 돌변'해버린 군인들이 나왔었을 지도 모른다라고 말이죠. 어쨌!든... 우리가 '그해, 그때, 그곳'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가장 커다랗고 가장 맹렬하며 주용한 비난의 화살을 꽂아야하는 곳이 그들은 아니어야 한다라는 겁니다2. 그렇게 문제의 핵심을 흐려서는 안되는 거겠죠.

'소년이 다'인 줄 알았었습니다. 이웃분의 포스트를 잠깐 읽어보니 '그해, 그때, 그곳'의 이야기라는군요. 작가의 이름이 '한강'이랍니다. 당연!히 실명이 아닌 필명일 꺼라고, 아마 (제가 결코 좋아하지 않는) '개량 한복을 입은, 턱수염을 지긋이 기른, 얼굴엔 항상 선해보이려는 의도를 품은 듯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전직 운동권 출신의 누군가'가 쓴 소설이겠거니... 라 왠지 생각되었었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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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그 과정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 (p17)

② 그것이 뭔 소리다냐, ... 나라에서 죽인 동생 원수를 무슨 수로 갚는다냐. (p182)

이 작품 속 이야기에서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사뭇 사치스럽기만 합니다. '그해, 그때, 그곳'에서 자신의 젊은 날의 한 때를 보냈던 사람들과, 젊은 날이었던 자식을 잃었던 사람들이 등장하는 이 이야기에선 말이죠. --- 한때! 매년 '그때'가 되어오면 대학가의 분위기가 살벌해지고, TV에서는 매일 '이러면 안되는데...'류의 뉴스들을 내보냈었을 때, 결코 적지 않은 나이였었던 저 또한 '이러면 안되는데, 이제 그만 좀 하지'라 생각했었더랬습니다. '벌써 몇 년이나 흘렀는데 아직도!'라는 것이 제가 만들어낼 수 있었던 그 '이제 그만!'의 유일한 이유였었었지요. --- 그때까지 살아왔었던 시간만큼의 시간이 흐른 지금, 그때 '그해, 그때 그곳'에 대해 가졌었던 저의 생각이 '창피하기 그지없는 것'이었음을 깨닫게 해 준 소설이었습니다. 심지어! 저와 같은 '1989년, 같은 교정'에 입학을 했던 (넓은 의미의) 여자 동창생이 쓴... 이 소설 말입니다.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고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p134)

우리반의 반장이 나를 때렸습니다. 내 얼굴엔 그때의 멍자국이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나를 때렸던 그가, 학년이 바뀌었다고 나에게 말합니다. '아직도 그때 일 같고 그러냐?' --- 네. 학년이 바뀌었고, 반장도 다른 친구가 하고 있습니다. 근데 이 새로운 반장이 자꾸만 나에게 그때 나를 때렸던 반장을 이제 그만 용서해주라고 말합니다. 반장으로서 그럴 수 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을 수도 있다면서 말이죠. 그래서 대답해줬습니다.

'때린 놈이 먼저 사과를 해야 용서를 해주지. 어떻게 사과도 안하는데 씨발, 맞은 놈이 용서부터 해주냐?'

그랬더니 말입니다...  그때 그 일과는 전혀 관계없는, 그저 그때 그 반장녀석과 좀 친할 뿐인 지금의 반장 녀석이 자기가 '학급의 반장 자격'으로 나에게 사과를 하겠다 합니다. 그러니 '이젠 좀 그만!'하자고. 여전히... 그때 나를 때렸던 그 전직 반장녀석은 저 멀리서 날 모른 척 하고 앉아있는데도 말이죠.

 

그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 잠든 그들의 눈꺼풀 위로 어른거리고 싶다, 꿈속으로 불쑥 들어가고 싶다, 그 이마, 그 눈꺼풀들을 밤새 건너다니며 어른거리고 싶다. 그들이 악몽 속에서 피 흐르는 내 눈을 볼 때까지. 내 목소리를 들을 때까지. 왜 나를 쐈지, 왜 나를 죽였지. (pp5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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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줄거리를 요약해낸다라는 건 정말!로... 아무 의미가 없을 듯 보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줄거리가 있기는 한 건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구요. 그저, '그해, 그때, 그곳'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어떻게 살아왔었는지, 왜 그들은 '이미 충분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그해, 그때, 그곳'을 이야기하는지를, 그들에게 남아있는 '그해, 그때, 그곳'의 기억이 얼마나 아픈 것인지를 어렴풋하게나마 느껴볼 수 있었다라는 거, 그것만으로도 이 소설을 알게 되었고, 이 소설을 읽었다라는 것의 부족함 없는 배움을 얻은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형이 뭘 안다고 … 서울에 있었음스로 … 형이 뭘 안다고 … 그때 상황을 뭘 안다고오." (p183) …… "그저 겨울이 지나간게 봄이 오드마는, 봄이 오면 늘 그랬드키 나는 다시 미치고, 여름이면 지쳐서 시름시름 앓다가 가을에 겨우 숨을 쉬었다이. 그러다 겨울에는 삭신이 얼었다이. 아무리 무더운 여름이 다시 와도 땀이 안 나도록, 뼛속까지 심장까지 차가와졌다이."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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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들고 계산대에 섰는데, 계산을 하려 이 책을 저로부터 건네어 받은 서점 여직원분이 그러더군요. "이 책, 되게 우울해요." --- 위 ①번과 ②번의 물음에 대한 한 등장인물의 다음 대답은, 읽기 이전보다 읽는 도중에, 또 그보다는 읽고 난 후인 지금에 점점 더 커져만가는, 이 책 정말! 우울하네란 생각을 갖게 해줍니다. 흡사 '초를 태우면 냄새가 없어지겠구나(p19)' 기대했었었거늘, '초를 태워도 아무 소용 없네(p11)'란 걸 알게 되는 순간 같았다고나 할까요?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거잖아. 권력을 잡으려고. …… 한낮에 사람들을 때리고 찌르고, 그래도 안되니까 총을 쐈잖아. 그렇게 하라고 그들이 명령한 거야. 그 사람들을 어떻게 나라라고 부를 수 있어.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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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분의 걱정(?)대로... 바로 직전에 읽었었던 「돈키호테」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서인지, 초반부에는 집중하는 데 좀 애를 먹긴 했었습니다만... 다음의 질문을 읽는 순간 --- 이 질문에 관한 책을 검색해 보았고 주문했는데... 하필, 마침! <12·12 사태>가 있었던 날인 오늘 도착한 두 권의 책에서 부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조금이나마 얻게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그 대답이 '아니오'이길 바래어 보면서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고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p134)

 

 


 

  1. 영화 줄거리에 대한 세세한 장면들은 제가 잘못 기억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2. 이는 <스카우트>에서 임창정이 '똑같은 상황'에서 처음에는 가해자로, 나중에는 피해자로 보여지는 것과 마찬가지인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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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서울을 걷다
권기봉 지음 / 알마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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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과 보다 밀접한 관련이 있는 근현대사의 현장을 찾아 다시 서울로 나섰다. 권력자의 시각이 아닌 이 사회를 구성하는 수많은 '우리들'의 입장에서 다시 서울을 걸었다. …… 익숙한 듯하지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낯설기만 한 곳을 걸으며 우리가 서울이라는 공간과 역사에 얼마나 무심한지 살펴보았다. …… 그렇게 다시 서울을 걸으며 깨친 한 가지 명확한 사실은 모든 과거가 한결같이 '현재적'이었다는 점이다.(pp6-7)

'서울'이라는 공간, 그 공간 속에 위치하고 있는 역사와 역사적 장소들... 에 관한, 딱히 무어라 규정짓기 힘든 내용과 스타일의 책입니다. 잡문이라 하기엔 나름 가볍지 않은 역사성을 지니고도 있는, 그렇다고 학문적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개인적 주관이 많이 개입되어 있는 암튼 뭐 그런 애매한 성격의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더군요. 그 중 논리의 전개가 신선!하다라 느껴졌던 두 섹션을 뽑아본다면...


【지하철 1호선】

1955년 최초의 국산 자동차 '시발始發'이 탄생한 이후, 급격히 늘어난 자동차로 인해 평균 시속 10킬로미터 안팎의 노면전차들이 오히려 교통의 장애물로 전락하게 되었고, 결국 1968년 11월 30일 자정을 기해 69년 9개월을 달렸던 서울의 노면전차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대중교통의 혼잡성이 문제로 대두되자, 그 대안으로 '지하철'이 등장하지요.


지상의 교통 혼잡을 위해 건설한 것이 비단 지하철만은 아니었으며, 당시 청계천이나 삼각지 등에는 차량이 허공으로도 달릴 수 있게 하겠다는 목표로 고가도로도 건설되었습니다. 얼핏! '경제의 발전'이라 느끼는 것에 그칠 수 있는 이 모든 걸 저자는 다음과 같이 해석해줍니다. --- "원활한 차량 소통이 먼저라는 '속도의 신화'에 정작 사람들은 도로 옆이나 땅속으로 밀려났고, 지상과 하늘은 온통 자동차들의 독차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 지하도나 육교라는 것이 언뜻 보면 보행자의 편의를 위해 놓인 것 같지만, 실은 차량 통행이 먼저니 보행자는 '그곳으로만' 길을 건너라는 무언의 명령에 다름없다.(pp23-24)"



【소공동 차이나타운】

박정희 정권 당시, 유독 화교들에 대해 가혹한 탄압이 있었었던 것을 저자는 중국인을 멸시하는 일본식 교육을 받아서(p43)일지도 모른다 추측하고 있습니다. 오래가진 않았지만 잠시나마 '양곡 절약'을 핑계로 중국음식점에서는 일절 쌀밥을 팔 수 없게 법으로 규정했던 적도 있었다더군요. 저자는 일반 짜장, 간짜장, 삼선짜장, 유니짜장, 유슬짜장, 쟁반짜장, 사천짜장 등 그 어떤 음식보다 다양하게 분화되어 발전해 온 수많은 짜장면들에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화교들의 고난과 눈물이 어려있을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러한 차별의 집행자라는 과거를 가지고 있는 우리가 과연 재일한국인에 대한 각종 차별을 규정짓고 있다라며 일본을 비난할 자격이 있느냐를 거쳐, 과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다문화 다민족'이라는 것이 사실은 사회적 소수자의 체념과 동화를 유도하는 용어(p49)로 통용되고 있는 현재의 대한민국마저도 비판하고 있지요. --- 이 부분은 진중권 교수가 「호모 코레아니쿠스」 지적했던 '한국인의 천민성' 혹은 「세상물정의 사회학」에서 노명우 교수가 언급했던 '대한민국의 성숙률'이 훨씬 더 체계적으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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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 이 책에 나오는, 술자리 같은 데서 '너 그거 아냐?'식으로 말할 만한 혹은 잡학적 상식(?)에 도움될 만한 것들을 정리해 본다면.


● 잠수교는 북한 폭격기의 눈에 잘 띄지 않도록 수면에 바로 붙어있는 한강 교량의 필요성에 의해 건설된 것.(p31)

● 도쿄에 있는 주일미국대사관 건물에 매혹된 교보생명 창업주가 설계자 미국인 시저 펠리에게 똑같은 모양의 건물을 지어달라 의뢰. 사실 펠리는 주일미국대사관을 설계하면서 일본 특유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마치 목조건축물인 양 건물 외벽에 갈색 타일을 붙였던 것인데, 그런 원래의 의도를 교보생명 창업주가 알았었는지의 여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1980년 크기만 다를 뿐 주일미국대사관과 거의 똑같은 모양의 광화문 교보빌딩이 완공되었고, 지방 주요 도시들에 들어선 교보빌딩들도 모두 그의 일란성쌍둥이 동생들 모습을 하고 있다고.(pp58-59) 

● 우리가 금을 '노다지'라고 부르게 된 건, 조선에 왔던 외국인 금광 개발업자들이 금맥이 드러날 때마다 "No Touch!(노 터치)"라 외친 데에서 유래했다고.(p128)

● 을사년에 벌어진 '을사늑약', 이 치욕스러운 사건이 얼마나 큰 충격과 아픔을 주었던지 이후, 스산하고 소름 끼치는 분위기를 "을씨년스럽다"고 표현하게 되었다라고.(p227)

● 한때 알려졌던 것처럼 장충체육관은 필리핀이 지어준 것이 아니라, 서울시가 육군체육관을 사들여 대대적으로 개보수하여 1963년에 한국 최초이자 최대의 실내 체육관으로 만들어 개관한 것.(p313)

● 1905년 러일전쟁 때 물갈이하는 장병들의 배를 확실히 지켜주었던 신약神藥이 있었는데, 러시아(露)를 정벌(征)하는 데 큰 도움을 준 알약(丸)이라 해서 그 이름을 '정로환征露丸'이라 지었고, 포장지에 인쇄되어 있는 인물은 일본 육군의 초대 군의총감인 마츠모토 준의 초상이라고. 다만 한국으로 들어오면서는 정征이 아닌 정正으로 바뀌어졌다고.(pp33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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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라는 것은 그 자체로 정치적이며 사회경제적인 산물이다. 무엇을 문화재로 지정해 보호할 것이며 무엇을 철거해도 좋은지 결정하는 것 자체가 그 시대의 권력과 가치관을 반영하는 일이기 때문이다.(p6)

이 책의 저자가 박정희 대통령을 극도로 싫어한다라는 게 책 곳곳에 아주 널려 있습니다. 헌데 그 표현방식이 저의 생각과는 많이 다르더군요. 일례로...


장하준 교수는 「쾌도난마 한국경제」라는 책에서 "박정희는 자본가의 소비도 규제했습니다. 왜 그 시바스 리갈이라는 술 있잖아요? 박정희가 암살당할 때 마셨다고 해서 유명해진. 전 그 술이 엄청나게 좋은 술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영국에 가보니까 가장 싼 술입니다. 도대체 세계 어느나라에서 종신 독재자가 시바스 리갈을 마십니까?"라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이 책의 저자는 "종신 집권을 가능케 한 '유신'이후 그가 실제 즐겨 마신 술은 막걸리가 아니라 서민들은 구경하기도 힘든 양주 '시바스 리갈'이었다(p191)"라 적고 있지요.


'서민들은 구경하기도 힘든'이란 표현을 틀렸다라고는 말할 수 없겠습니다만, (최소한 이 문제에 한해서만큼은) 장하준 교수의 스탠스에 서 있는 저로서는 이 서술이 의도적으로 사용된 '선동적'인 표현이며, 저자의 지극히 꼬인 감정의 표현이라고밖에는 생각되지는 않았습니다. --- 김형민의 책들, 「그들이 살았던 오늘」 · 「썸데이 서울」 · 「삶을 만나다」 등에서는, 애초엔 저와 다른 그의 정치적 성향에 당황스러웠더랬습니다만 자신이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를 풀어놓은 글을 읽어보고는 그의 주장, 심지언 정치적 시각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적극적으로 동의할 수 있었었지요. 물론!


그러한 경험이 지극히 특이한 경우라는 걸, 김형민이라는 사람의 생각과 글 또한 지극히 특별하다라는 걸 알고 있기에, 그러한 경험이 자주 일어날 수는 없겠습니다만... <지하철 1호선>에 관한 역사와 그에 얽힌 자신의 생각을 풀어나가는 이 책의 첫 장을 읽고는, 어쩌면! 오랫만에 그런 특별한 경험을 다시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라 기대했더랬거늘!!!


이 책을 다 읽고난 지금 제게 드는 건 오로지 --- 이 책의 저자 또한 이 책에서 너무도 정치적이었으며, 몇몇 잡학적 상식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역사에 자신의 가치관을 대입시켜놓았다라는, 헌데 그 가치관이라는 게 제 고개가 언뜻 끄덕여지지 않는, 오히려 고개를 가로로 젓게만 되는 것들 뿐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네요. 다행히... 연필로 밑줄 친 부분이 거의 없기에, 알라딘 중고서점의 품에 넘겨도 아쉽지 않을/괜찮을 듯. --;;



※ 이 책을 읽느니...

- 진중권 著, 호모 코레아니쿠스

- 김찬호 著, 사회를 보는 논리

- 노명우 著, 세상물정의 사회학

- 김형민 著, 그들이 살았던 오늘

- EBS 著,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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