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베스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83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종구 옮김 / 문예출판사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웃 핑키님께서 읽으신 작가의 책』에서 --- 많은 작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 혹은 만나고 싶은 작가'로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꼽았다 하더군요. 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저에게,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단지 '4대 비극은?'류의 퀴즈를 위해서나 필요한 작가로만 간주되어왔거늘, 이제 책 좀 읽는다고, 대체 작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라면 어떤 작품을 썼길래?하는 호기심이 드디어/기어코 저로 하여금!

셰익스피어의 많은 작품들 중 이 작품 『맥베스』​를 선택한 건, 별 이유 없이, 그저 얼마전 영화 <맥베스>가 개봉했다라는 뉴스를 보았었기 때문입니다. (진짜 별 거 없죠? --;;) 암튼!!!

……………………………………………………………………………

​【 정감록 】

'이제 조선왕조가 망할 것이고, 정씨 성을 가진 진인이 나타나 계룡산에 수도를 둔 새 왕조를 창건할 것이다'란 <정감록>의 스코트랜드 판이라 이 작품을 요약한다면, 예의 문학 비전공자의 무식함이란 소리를 듣게될 까요?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귀환하는 맥베스 앞에, 세 마녀가 등장하고, 그녀들은 맥베스를 향해 '글래미스 영주', '코더 영주', '장차 왕이 되실 분'이라는 세 가지의 칭호를 붙여 칭송을 합니다. 맥베스는 현재 '글래미스의 영주'이므로 1번은 맞는 것이었으나 나머지 두 가지의 호칭은 (그 순간까지만 해도) 그에겐 여전히 "남의 옷"(p24)일 뿐이었지요. 헌데 말입니다!

곧이어, 왕의 사자(使者)가 나타나 왕이 맥베스를 '코더의 영주'로 봉했다는 소식을 전하는 겁니다. 이거 이거! --- 곧바로 맥베스에겐 무서운 야망이 생겨나게 되지요.

"두 가지 점괘는 맞아떨어졌구나(Two truths are told). …… 이 신비로운 유혹이 나쁠 리가 없다."(p24)

'괴상한 지식'(p20)으로 들렸던 마녀들의 말을, 그야말로 전광석화같이 '예언 같은 축사'(p20)라 말하며, 이내 그것을 아예 'truths'라 확정지어버리죠.1 이는 ---  정 처사라는 인물이 몇몇 신비한 경험을 겪고는 이를 '하늘의 뜻'이라 여겨 곧 태어난 자신의 아들이 <정감록> 속 '정 진인'이라 믿게 되었고, 그런 아버지의 굳건한 신념으로 길러진 소년이 일생동안 (착각 속에서나마) 황제(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라는 내용의, 이문열 作 『황제를 위하여』와도 상통되어지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황제를 위하여』에서 정 처사가 '황제'의 삶 자체를 설계하고 확정지어준 인물이었었다면2, 맥베스의 어슴프레 피어난 야망에 결정적으로 기름을 퍼부은 이는 바로 그의 아내였었습니다. 그녀는 막상 왕을 살해하고 왕좌에 오르려는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데 주저주저하는 맥베스에게 다음과 같은 독려를 해주지요.


당신의 천품, 지름길을 취하시기에는 너무나 인정의 달콤한 젖이 많으십니다. 당신은 위대해지기를 원하시며, 야심이 없으신 것도 아니지만, 그것을 조종할 사악한 마음이 없으십니다. 몹시 원하시는 것을 정당한 방법으로 이루려 하십니다. 잘못은 범하지 않으려 하면서 부당한 것을 바라십니다. 위대한 글래미스 영주시여, 당신이 원하는 것은, 만약 원한다면 '이렇게 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 일을 두려워하시면서 이대로 물러나지도 않으려 하십니다.(pp32-33)3 …… 발을 적시지 않고 물고기를 얻으려는 고양이처럼 살아가실 작정입니까?(p43)

"나의 여자의 마음을 버리게 하고 머리 꼭대기에서 발톱 끝까지 잔인한 마음으로 가득 차게 하라!"(p34)라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는 맥베스의 부인에게선 흡사 ('모든 여자, 모든 아내'를 대상으로 하는 표현이 아니라) 우리 사극의, 흔히 '왕의 첩'들에게서 보여지는 그런 이미지의 여성상이 보여지기도 합니다. 헌데 말이죠!!!



​【 Self-fufilling prophecy 】

결국 계획을 실행에 옮겼고, 그리하여 원하던 것을 어찌되었든 손에 넣었지만, 맥베스와 그의 부인에게는 뭔가 찜찜한 마음이 가시질 않습니다. 게다가(?) --- 이걸 '가시질 않았다'라 표현하는 것 역시 약간의 어폐가 있다 생각합니다.

맥베스는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는 마녀들의 예언을 듣고, 자신이 뭔가 능동적인 행동을 취하여야 겠다란 생각을 애초부터 가졌었던 건 아니었더랬습니다. '운명이 나를 왕이 되게 해줄 셈이라면 그렇지, 운명이 왕관을 씌워줄 것이다. 내가 서둘지 않더라도. …… 아무리 사나운 날이라도 때와 시간은 흘러간다.'(p26)에서처럼 (역자의 해설처럼 그에게 '왕이 되고싶다'란 야망이 이미 내재해 있었다고 한다해도 당장엔) 걍 흘러가는 운명에 그냥 맡겨볼 심산이었던 거지요. 그러는 와중에 부인의 독려가 곁들여져, 막상 모험이라는 단어까지 써가며 '암살'이라는 능동적 행위를 실행에 옮기려는 순간에 조차 그에겐 뭔가 꺼림직한 마음이 여전히 가시질 않기만 한 겁니다.


만약 암살이 그 성과를 일망타진할 수 있고, 그 종언(終焉)과 더불어 대원(大願)을 성취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이 일격이 영원한 시간의 흐름인 이승에서 전부가 되고 종국이 된다면, 저승은 어떻게 되건 기꺼이 모험을 하리라. 그러나 이런 일은 반드시 현세에서 심판을 받는 법이다. - 누구에게나 피비린내 나는 악행을 교사하면, 인과는 돌아와 원흉을 쓰러뜨린다. 정의의 신은 공평하여 우리가 독살을 준비하면 그 독배를 우리 입술에 들이댄다.(41)

이러한 맥베스의 걱정이 현실이 된 것일까요? 왕위에 올랐지만 맥베스는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리는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4 그런 모습의 남편을 바라보는 부인 역시  자기가 원한 건 이게 아니었는데! 하며 짜증 만땅의 상황에 접어들게 되지요.

"아무 소용이 없다. 모든 것은 헛일이다. 소망을 이루어도 만족을 얻을 수 없다면 차라리 죽음을 당하는 편히 훨씬 편한 것이다."(p90)

·

·

·

'Self-fufilling prophecy'라는 게 있습니다. (아주아주) 쉽게 말해, '(긍정적이건 부정적인 것이든) 그럴 것 같아!라는 예상이 든다면, 결국 그렇게 된다'라는 거지요. (물론 경제학에서의 '그럴 것 같아'라는 예상은 단순한 심정적 예상이 아닌, 충분한 논리적 추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겁니다.) '인과는 돌아와 원흉을 쓰러뜨린다'라는 맥베스의 '그럴 것 같아'나, '차라리 죽음을 당하는 편이 훨씬 편한 것이다'라는 맥베스 부인의 생각은 예의 그 'self-fufilling prophecy'의 범주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 왕이 된 맥베스는 자신이 죽인 덩컨 왕의 아들이 이끄는 편에 최후를 맞이하게 되며, 부인 역시 (아마도 자살인듯한) '죽음을 당하는' 최후를 맞게 되지요.5 헌데 말입니다!

자신의 부인과 자신의 최후를 앞둔 맥베스의 대처는 의외로 쿨합니다. 마치 이러한 결론을 어렴풋하게나마 예상을 하고 있었다는 듯, 그러니까 자신의 심정적 'prophecy'가 예의 'self-fufilling'될 꺼란 걸 이미 알고나 있었다는 듯 말이죠.


"그6언젠가는 죽어야 할 몸이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을 때가 한 번은 오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p166) …… "사람의 생애는 흔들리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자기가 나가는 짦은 시간만은 무대 위에서 장한 듯이 떠들지만, 그것이 지나면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 가련한 배우에 지나지 않는다.(p167)

……………………………………………………………………………

예의, 감상문이라고 뭔가를 주저리주저리 써보긴 했지만 --- 이 작품이 재미있었니? 아님 뭔가 유익한 교훈을 얻기라도 했니?라는 질문에 긍정의 대답을 할 수는 없습니다. 뭐 '나도 셰익스피어의 작품 하나 정도는 읽어 봤다구!'라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정도? 하지만!!!

만약 제가 영문학을 전공했었더라면, 아님 영어를 무지무지하게 잘해 이 작품을 원문으로 읽을 수 있었더라면 지금의 느낌과는 차원이 다른 감상문을 쓰게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확실하게 듭니다. 그게 왜냐하면 말이죠...

마녀 일동 : 예쁜 건 추한 것, 추한 건 예쁜 것. (p9)

맥베스 : 이렇게 음산하고도 좋은 날은 처음 봤어.(p18)

이 두 문장은 이처럼 한글로 번역되어 있으면 별 특별한 것이 보여지지 않는 문장들입니다... 만, 이것의 원문이 각각

"Fair is foul, and foul is fair"

"So foul and fair a day I have not seen"

이라면 확실히 그 감흥과 문학적 묘미는 달라지게 되는 겁니다.7 게다가 --- 이 작품의 희곡의 형태이고, 희곡이란 것은 글로 읽히는 것이 아니라, 소리와 시각으로 들려지고 보여지는 것에 더 중점을 둔 문학이라는 걸 생각해 본다면, 스코트랜드 엑센트로 발음될 이 모든 대사들을, 제 아무리 훌륭하게 한국말로 번역해 놓았다 해도 그 오롯한 감동과 재미가 전달되어질 꺼라고는 아예 기대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작품이 재미있었니? 아님 뭔가 유익한 교훈을 얻기라도 했니?'란 질문에 긍정의 대답을 할 수 없었을 뿐이라 말하게만 된다라는 거지요.

문득! 앞서 읽었던 주제 사라마구 作 『카인』에서 그려지고 있는 여호와와 악마의 모습을 떠올려 주었던, 역자의 글을 마지막으로, '나도 셰익스피어의 작품 하나는 읽어봤다구!'가 (창피하게도) 이 독서가 지닌 유일한 현실적 선물이었던, 『맥베스』의 감상문을 마무리짓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가오에 살고 가오에 죽는다'라 말엔 지극히 잘 들어맞는 선물이기에 나름 뿌듯하긴 하네요. (그래서 만족도가 4!!! ^^;;)


그들(마녀 세 사람)은 … 인간의 시기심 같은 것에서 생겨난 악의 화신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악을 직접 실천하지는 않는다. 사람의 마음에 악한 짓을 하도록 충동하는 일을 할 뿐이다. 그러니까 마녀들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우리의 마음 속에 숨어 있는 죄악의 욕구(sinful desire)를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존재라고도 할 수 있다. 마녀들은 맥베스에게 '원래 있지도 않은 악의'를 심어주기 위해 나타난 것이 아니라, 맥베스의 기고만장한 마음속에 싹트고 있는 '분명한 악의'를 부채질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다.(p180)


▶ 짧은 한두 마디 : 진실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이 '무엇'을 진실이라 믿게 하느냐/믿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  뭔가, 비슷한 느낌을 받게 해주었던 작품 : 이문열 作, 『황제를 위하여

 

 



 

  1. 『맥베스』와 연관되어지는 전작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오로지 이것으로 셰익스피어를 처음 만나 본 저로서는 맥베스에게 그러한 '야망'이 이미! 내재해 있었다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의 역자(譯者)는 '앞서 두 가지가 적중했다 해서 나머지마저 그러하리라고 믿는 수작이 무서운 야망의 반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p182)라 쓰고 있더군요.
  2. '정 처사의 꿈이 곧 황제의 꿈이었으며, 그 의지가 곧 황제의 의지였다. … 황제의 생각 한 갈래, 몸짓 하나가 정 처사가 설정한 삶의 범위를 넘어선 것은 없었다.' - 이문열 作, 『황제를 위하여』중.
  3. '(맥베스는) 섣부른 선심이 매사에 훼방을 놓아서 계획은 제법 세우지만 정작 실행하는 대목에선 충동적이며 맹목적이다.맥베스 부인이 금관을 쓰기 위해 남편을 충동질해 일을 저지르게 했다고 생각하는 건 잘못이다. 다만 맥베스는 성격상 우물쭈물하는 반면, 맥베스 부인은 단호하게 실천을 다그치고 나서는 여인일 뿐이다.'(p184) - <역자 해설> 중.
  4. "마음 편히 하루 세끼 식사마저 들 수 없고, 잠들면 무서운 악몽에 시달려 밤마다 고통받아야 할 정도라면 죽은 그자와 같이 된 편이 훨씬 나을 것이오. 우리가 편안히 잠들기 위해 편안히 잠들게 해준 것인데, 그런데 마음의 고문대(拷問臺)에 올라 이런 미치광이 같은 불안에 떨고 있어야만 하오?"(p91)
  5. 이 작품을 두고 '비극'이라 칭하는 것이 맥베스 부부의 '비극'은 아닐 꺼라는 생각을 하게는 됩니다. (그 내용을 제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역자 역시 "비극 『맥베스』는 이른바 '양심의 비극'이다"(p178)라 말하고 있구요.
  6. 자신의 부인.
  7. 물론 이것이 번역에 문제가 있다라 말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아무리 해도 옮겨낼 수 없는 영문 자체만의 묘미가 있다라는 것일 뿐. :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본다면, 'milk of human kindness'를 '인정의 달콤한 젖'으로 번역한 역자를 무어라 할 수는 절대 없겠는, 단지 발음상의 rhyme과 같은 원작의 무언가는 분명 다른 언어로 옮겨질 수 없다란 한계가 극복될 수 있다란 건 전혀 바랄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을 뿐이라는 거지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인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아담과 하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첫 아들인 카인은, 최초로 잉태에 의해 태어난 인간이지요. 그런 카인이 자신의 동생 아벨을 죽인 살인자가 된다1라는 이야기는 아무래도! --- 기독교 신자인 저에게 뿐 아니라, 비기독교인들에게도 예의 뭔가 하나님의 계획이 불완전한 것이 아니었었나?라거나, 혹은 모든 미래를 알고 계신다는 그 분의 정의(定義)와는 들어맞지 않아 보이기만 합니다. 암튼!!!


『예수복음』을 통해 기독교의 근본교리에 대해 정면으로 '인간으로서 가져볼 수 있는 의문' - 하나님은 과연 절대 선(善)인가, 절대 선이라는 것이 과연 유일한 존재로 성립가능한 것인가 - 을 던져주었던 작가 주제 사라마구가 이 작품 『카인』을 통해 또 다시 제기하고 있는 '인간으로서 가져볼 수 있는 의문'들은 예의! 기독교 신자인 저에게도 너무나 진지한 흥미를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어쩌면 ---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믿음을 전하고자 하려는 기독교가 반드시 답해내어야만 하는 것들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안겨 주기도 했습니다. (만약 이 작품에 대해 기독교가 '뭐 이딴 책을 읽고 그래?'라 반응한다면 그건 --- 내 믿음과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나의 믿음을 전하고자 하는 기독교의 노력과는 스스로 모순을 일으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금이 '불신지옥, 예수천국'만으로 타인의 믿음을 바꾸어낼 수 있는 세상은 아니지 않습니까.) 


……………………………………………………………………


에덴동산에서의 창조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다들 알고 있듯이,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다는 이유로 에덴동산에서 쫒겨나게되지요. 이때의 장면을 묘사한 "냄새나는 동물 가죽을 입고 휘청거리는 다리로 비틀거리며 걷는 아담과 하와는 처음으로 직립한 오랑우탄 두 마리와 비슷해 보였다"(pp20-21)라는 문장은 어쩌면 작가가 창조론을 부정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쓰여진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갖게도 해줍니다. 물론 성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라 쓰고 있으나, 이때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와 과연 현재 인류의 모습과 동일할 것이라하는 것에는 아무래도 의문부호를 달 수 밖에는 없지요. 더 크게 보자면 --- 어차피 창조하실 꺼라면, 그냥 iphone 6S로 시작되는 세상을 창조하실 것이지 문명 제로의 세상을 창조하셨느냐는 질문에 답하는 기독교는 진화론에 대해서도 충분히 친절한 입장을 가져야하지 않을까 싶다는 겁니다. 암튼!!!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것에 대해 여호와2 "너는 선과 악 사이에서 선택을 할 수 있었지만 악을 택했으니 대가를 치러야 한다"(p40)라 말씀하십니다. 이에 대해 카인은 강하게 저항을 하지요. "망을 봐주려고 자리를 뜨지 않은 사람도 실제로 포도밭에 들어가는 자와 마찬가지로 도둑입니다."(p40) --- 이렇게 카인이 하나님의 전지(全智)함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자 도전을 한다라는 것이 바로 이 작품 전반의 스토리가 전개되는 방식입니다.


카인은 '에덴의 동쪽'인 놋 땅으로 쫒겨나지만 여호와는 카인에게 누구라도 그를 죽이지는 못할 것이라는 보호의 울타리를 쳐줍니다. 왜 그러했을까요? 이에 대한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해석은 예의 도발적입니다.


아벨의 죽음에 대한 우리의 공동 책임에 기초한 약속이라고 하자. 그러니까 이 책임에서 주의 몫을 인정한다는 겁니까. 그래, 인정한다, 하지만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라, 이것은 하나님과 카인 사이의 비밀이 될 것이다.(p41)

·

·

·

 

이후 작가는 카인이 성경 속 여러 사건들의 참가자가 된다3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갑니다. --- ①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는 순간, ②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③시나이 광야에서의 우상숭배, ④욥의 시험, 그리고 마지막으로 ⑤노아의 방주 등이 이 작품에 등장하는 성경 속 사건들입니다. 그 사건들의 마지막에 작가는 카인의 입을 빌어, 이 사건들 속에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아주 강하게 비난하고 있지요.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하셨다라는 것에 대해 카인은 말합니다. --- ​"여호와가 자신을 믿는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는데, 왜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신뢰해야 하는지 나는 정말 모르겠습니다"(p163)4 이러한 믿음의 불평등함은 결국 카인으로 하여금 신이 인간을 대상으로 지니고 있(다고 말해지)는 권리에 대해서까지 의문을 던지게 합니다.

하나님이 단지 하나님이라는 이유로 그의 신자들과 사생활을 지배하고, 규칙, 금지, 금제를 비롯한 다른 터무니없는 것들을 세울 권리가 있다는 이상한 생각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겁니까.(p191) 

작가 주제 사라마구는 하나님의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시험(test)의 극치로 '욥'의 이야기5를 들고 있습니다. --- 『예수복음』에서 주제 사라마구는 하나님의 선함은 절대선이 아닌, 사탄이라는 악의 존재가 있기에 성립된다라 말했었지요. 사탄이 회개하고 악으로서의 역할을 그만두겠다라 했음에도, 하나님은 자신의 선함을 세상에 보여줄 도구로서 악의 존재를 필요로 했기에 그 사탄의 청을 거절한다라는 겁니다. 이러한 인식은 이 작품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지(全智)함에 의해) 욥이 끝내 자신을 향한 믿음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사탄으로 하여금 욥을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을 허락하셨었지요.6 작가는 이것을 '선과 악 사이의 암묵적 공모'(p167)라 명시하며, 사탄, 그러니까 악의 존재는 하나님 스스로를 위한 것이라는 (『예수복음』에서와 같은) 주장을 합니다. (카인은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이 내기에서 희생양이 되어야 하는 욥에게 과연 무슨 죄가 있었던 것일까,라는 의문을 던집니다. 이에 대한 다른 책의 대답은 역시나 애매하게 끝맺음하고 있더군요. --- ​"왜 선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가?" 구약성서 욥기의 주제는 바로 이것이다. 부자이면서도 고결한 품성을 가진 욥은 신의 시험을 받는다. 신이 사탄에게 시켜 욥에게 온갖 종류의 고통을 준 것이다. …… 신은 선한 사람들이 왜 고통을 받는지에 대해 답하지 않는다. …… 신은 선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이유를 일일이 '설명'하지 않고, 다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나를 믿어라"는 식으로 말한다. - 『교양인을 위한 바이블 키워드』,p420.)


 사탄이 여호와의 또 다른 도구에 불과한 것처럼 보여요,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넣고 싶어 하지 않는 더러운 일을 하는 도구 말이에요.(p169) 

카인에게 (즉, 작가 주제 사라마구에게) 이러한 하나님의 독재는 악한 것 보여지게 됩니다. 우선! --- 모세가 40여일 간 시나이 산에 올라가 있던 사이, 사람들은 황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었고, 하나님은 이들을 가혹하게 죽이라 명령하시지요. 결국 삼천 여명의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게 되었는데, 이를 카인은 '그의 사악함을 명백하고 논란의 여지없이 보여주는 증거'(p122)라 말하지요.


단지 황금송아지를 만든 것에, 그런 경쟁자로 여겨지는 존재를 만든 것에 여호와가 분노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삼천 명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형제를 하나 죽였는데 여호와는 나를 벌했다, 정말 알고 싶은데, 이 모든 죽음에 대해 누가 여호와를 벌할 것인가, 카인은 생각했다. 루시퍼가 하나님에게 반역한 것은 정말 옳은 일이었다, 그가 질투 때문에 그리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틀렸다, 그는 단지 하나님의 악한 본성을 인식했을 뿐이다.(p122)

……………………………………………………………………


아담 이후 열 세대 안에 하나님이 만든 세상은 알아볼 수 없게 됐다. 모든 종류의 죄가 넘쳐 온 땅은 "포악함이 가득"했다(창 6:11). 사람들의 마음은 물론 행위도 타락했다. 이것이 비극이었고 하나님은 인간을 만든 일을 비통해했다. 수 세대 동안 인내한 하나님은 대홍수를 일으켜 세상의 모든 인류를 쓸어버리고 새로 시작하기로 했다.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 하리니"(창 6:7).

- 『The illustated BIBLE』, p42 

하나님께서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신 것일까요? 쉽게 말하자면, 다시 새 판을 짜겠노라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카인은 "정말로 지금 인류를 멸하고 나면, 그 다음에 나오는 인류는 똑같은 오류, 똑같은 유혹, 똑같은 어리석음과 범죄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p189)라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리하여 결국!

그는 하나님의 계획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위를 실행에 옮김으로써, 저항을 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 하나님의 악함에 대한 그의 투쟁은 완전한 승리를 거두게 되었으며, 다음과 같은 승리의 변(辯)을 하나님께 통고하는 것으로 이 소설은 끝맺음되고 있지요.

한 인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인류는 없을 것이고, 아무도 아쉬워하지 않을 겁니다. 

·

·

·

  

   
 

인류의 역사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오해의 역사이니,

하나님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p106)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기독교에 대한 인식은 이처럼 의외로 단순합니다. 하지만! --- 이해하지 못함의 표현을 신께서 분노로 표출하신다 할 때, 우리 인간도 역시 똑같은 방식으로 신을 이해하지 못함(혹은 이해할 수 없음)을 표출해낼 수 있다라는 매우 과격하고 도발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지요.

성서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다면, 사뭇 이해하기 쉽지 않은 혹은 오해로 귀결될 수 있는 여지가 다분한 작품이라 생각됩니다.7 주제 사라마구 특유의 마침표와 쉼표만이 사용된 문장들 역시 처음으로 그의 작품을 접하는 독자에게는 낯설 것이겠구요. 물론! 저처럼 주제 사라마구의 믄장들을 사랑하는 독자들에겐, 다시 한 번 여지없이 짜릿한 재미를 선사해준다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그의 새로운 작품을 만날 수 없게 된 지금, 과연 작가 주제 사라마구는 신(神)을 만났을까요? 


※ 읽어본 성서에 관한 책들 

- 크리스틴 스웬슨 著. 『가장 오래된 교양

- 나가오 다케시 著, 『유쾌한 성경책

- 공병호 著, 『공병호의 성경 공부

- 칼릴 지브란 作, 『사람의 아들 예수

 

※ 읽어본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의 작품 (수상연도 순)

- 크누트 함순(1920) : 「굶주림

- 펄 벅(1938) : 「대지

- 헤밍 웨이(1954) : 노인과 바다

- 알베르 카뮈 (1957) : 이방인」 · 「페스트

- 존 스타인벡 (1962) : 분노의 포도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1970) :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윌리엄 골딩 (1983) : 파리대왕

- 주제 사라마구 (1998) : 눈 먼 자들의 도시· 죽음의 중지」 · 도플갱어」 · 예수복음

-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2010) :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 모옌 (2012) :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

 

 

 

 



 

  1. 하나님께서 동생 아벨이 바친 동물의 제사는 받으시고, 농작물을 바쳤던 자신 카인의 제사는 받으시지 않았다는 분노에 그가 아벨을 죽였다라 성경은 쓰고 있습니다. 이에 관해, 그러니까 왜 카인의 제사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벨의 제사보다 못했다라는 것인지, 왜 하나님이 카인의 제사는 받으시지 않았던 것인가에 관해선, 성경을 한 번도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저이기에 잘 알 수 없습니다. 『가장 오래된 교양』은 이에 대해 '아벨은 가장 기름진 최상품을 하나님께 드린 데 반해 카인은 그냥 갖고 있던 것을 드렸'(p503)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소개하고 있으며, 『교양인을 위한 바이블 키워드』에서는 '이슬람 전설에 따르면 카인과 아벨은 각각 쌍둥이 누이가 있었는데 신이 카인에게 아벨의 쌍둥이 누이와 결혼하라고 명하자 카인이 이를 거부하고 자신의 쌍둥이 누이와 결혼했다고 전한다. 그 때문에 신이 카인의 제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p496)라는 이설(異說)을 소개하고 있더군요.
  2. 하나님.
  3. '어느 날, 현재에서 현재로,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갔다가 하는 식으로 또다시 그 갑작스러운 시간 여행을 하다가'(p107)
  4. 하나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헌신은 궁극적인 시험을 통과했다. 그는 하나님이 명령하시면 하나님을 신뢰하여 하나님이 약속한 바로 그 자녀도 아끼지 아니하고 기꺼이 제물로 바치려고 했다.(『The Illustrated BIBLE』, p59)
  5.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부자였고 흠 없는 삶을 살았으며 행복한 대가족을 이루었다. 어느 날 사탄이 다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의 회의에 참석해서 '고소인'역할을 맡았다. 그는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유는 단지 이익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욥 1:9)라고 묻는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을 시험해보라고 허락해주는데, 욥의 목숨만은 남겨둔 채 인생의 모든 좋은 것을 빼앗아보라는 것이었다. …… 사탄이 계속 조르자 욥의 신실함을 믿은 하나님은 사탄에게 그의 건장도 시험해보라고 허락했다. 그래서 욥은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욥 2:7) 종기가 나서 괴루움을 겪게 됐다.(『The Illustrated BIBLE』, pp188-189)
  6. "왜 선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가?" 구약성서 욥기의 주제는 바로 이것이다. 부자이면서도 고결한 품성을 가진 욥은 신의 시험을 받는다. 신이 사탄에게 시켜 욥에게 온갖 종류의 고통을 준 것이다. …… 신은 선한 사람들이 왜 고통을 받는지에 대해 답하지 않는다. …… 신은 선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이유를 일일이 '설명'하지 않고, 다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나를 믿어라"는 식으로 말한다.(『교양인을 위한 바이블 키워드』,p420)
  7. 그러하기에 이 작품에 ★을 붙이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나, 그럴 수가 없었다라는.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라바 1 - 제152회 나오키상 수상작 오늘의 일본문학 14
니시 카나코 지음, 송태욱 옮김 / 은행나무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상실의 시대』, 『인간실격』, 그리고 무엇보다 『도련님』에의 soft version의 오마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라바 1 - 제152회 나오키상 수상작 오늘의 일본문학 14
니시 카나코 지음, 송태욱 옮김 / 은행나무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만만찮은 분량관 달리, 매우 말랑말랑한 소설입니다. (특히나 1권의 초반부에선) 작가 김훈의 『남한산성』에서 느꼈었던 (툭툭 끊어내었음에도 불구하고) '운율이 깃든 산문'을 읽는 즐거움을 맛볼 수도 있었으며1, 작품 내내 적잖이 등장하고 있는 ( )안의 구절들은 예의 작가 천명관의 『고래』를 읽었을 때와 같은, 작지만 매우 강력한, 게다가 의미까지를 지닌 빵터짐을 선사해주기도 했었었지요2. 그러나 아무래도 이 작품은 --- 언뜻 보자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하지만 결국엔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그리고 (무엇보다)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과의 어쩔 수 없는 비교(?)를 하게 해줍니다. 어쨌든, 이 세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바들을 적절히 혼합시킨 soft version이라고나 할까요?


…………………………………………………………………………………


【 상실의 시대


​요컨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시대>가 일본 버블 경제의 산물이라면 니시 가나코의 <사라바>는 버블이 붕괴하고 도래한 신자유주의 시대가 낳은 새로운 '상실의 시대'를 이야기한다.(p425)

- <옮긴이의 말> 중.

작품을 읽어가는 내내 예의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어쩔 수 없이 떠올랐었건만, 이건 비단 저에게만 느껴진 건 아니었었더군요. 하지만 제가 이 작품에서 신자유주의 어쩌구를 떠올렸던 건 아닙니다.3 단순하게는 '회상의 구조'라는 방식이, 남자 주인공의 방황이, 그리고 적지않은 문학작품들4과 음악들이 등장한다라는 점들이 그러하였었거늘, 진짜 이 소설로부터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떠올릴 수 밖에 없는 건 바로!


나는 고개를 들어 북해(北海)의 하늘에 떠 있는 어두운 구름을 바라보면서, 내가 이제까지 살아오는 여러 길목에서 잃어버린 많은 것들을 생각했다. 잃어버린 시간, 죽었거나 또는 사라져 간 사람들,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지난 추억들, 그리고 그 모든 상실의 아픔들을.(p145)

'상실'이라는 단어는 반드시! --- '상실'이라는 단계 이전에 '소유'가 있었었음을 전제로 하고 있어야만 성립될 수 있습니다.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상실' 역시 생겨나지 않을테니까요. 『젊은 날의 초상』에서 작가 이문열이 '꽃다운 시절'이라 표현했었던, 그리하여 "꽃답다는 것은 한번 그늘지고 시들기 시작하면 그만큼 더 처참하고 황폐하기 마련"(p96)이라 표현했었던 바로 그! '상실의 과정'을,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겪게만 되는 ('상실의 결과'로서의) 혼란과 낭패를 작가 니시 가나코는 주인공 아유무를 통해 적나라하게, 무엇보다 ('유난히'라는 부사를 꼭 붙이고 싶도록) 제 마음에 와닿게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스구와 고가미와 있으면 나는 간단히 자신의 황금시대를 떠올릴 수 있었다. …… 나는 현재의 자신을 무시하고 돌이켜볼 수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천박한 행위인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나는 현실의 자신에게 실컷 혼나고 있었다. 현실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내게는 빛나는 추억 안에서만 자신의 모습을 인정할 용기가 있었던 것이다.(2권,p239)

간단히 말해 --- '나에게도 한때는!'이란 과거에 여전히 사로잡혀, 이미 '그늘지고 시들어버린' 현재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라는 거지요. 누구와 함께 걸었다라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수많은 여학생들을 설레이게 했었던 주인공이, '서른세 살의 머리숱 적은'(2권,p239)가 되어 아름답지도 않은 연상의 여인에게조차 배신을 당하게 된 현실을 주인공은 '전락했다'(2권,p239) '구슬픈 말로(末路)'(2권,p276)라는 단어로 표현하며, '빛나는 나의 세월은 어디로 가버렸을까?'(2권,p401)라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작품 속에서 '계속해서 빠지는 머리카락'으로 대변되는 주인공의 상실이 얼핏 보아선, 이 소설의 주요한 주제일 듯도 보이나 기실 그리 중요한 주제는 결코! 아니라 생각합니다. 왜? --- 주인공에게 '상실'되어진 것은 그저 '꽃다운 시절'이었었을 뿐, 그리고 그건 누구나 그의 일생에서 가지고 있는 (비록 그 길고 짧음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을 수 있는) 순간이기 때문이지요. 만약 이 소설이 그처럼 누구나 (혹은 99%쯤 되는 거의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삶의 영락(零落)'을 주제로 삼았다라면 역설적으로 별 공감을 줄 수 없는, 그렇고 그렇게 흔해빠진 소설에 그쳤을 거라 생각합니다. (혹은 1%의 '고전'이 되었거나) '공감'이라는 감정의 작용은 아주 작은 한 끝 차이로 절절하게 또는 시시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니까요. 무엇보다!!!

주인공 아유무가 소설의 마지막에 가서야 찾게 되는 무언가는 애초부터! 그가 소유하고 있지 않았었던, 즉 '상실'이라는 단어를 적용시킬 수 없는 것이었기에, '상실'이라는 단어가 이 작품의 주제가 될 수는 없다라 생각될 수 밖에 겁니다.



【 인간실격 / 도련님

    

"삼각형의 세 내각의 합은 얼마인가?"

 

이런 질문을 받으면 상당수의 사람들은 "180도"라고 대답할 것이다. 19세기 초반까지 대다수 수학자들도 그렇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지금 어떤 수학자도 위의 질문에 "180도"라고 답하지 않는다.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 장우석 著, 「수학, 철학에 미치다」

"나는 이 세상에 왼발부터 등장했다"(p7)라는 소설의 첫 문장. 그리고 그것을 "아주 나다운 등장방법이라고 생각한다"(p7)라 말하는 도입부는 말 그대로 주인공의 성격을 더함도 덜함도 없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7 1권과 2권을 통해 일어나는 여러가지 사건들의 전개와 결말은 어김없이 주인공의 성격으로 인해 그러하도록 흘러만 갑니다.


전혀 모르는 세계에 희희낙락 뛰어드는 쾌활함은 내게 없다. 먼저 공포가 있다. 그 세계에 친숙해질 수 있을까, 살아갈 수 있을까. 공포는 잠시 내 몸을 정지시킨다. 그리고 그 정지를 간신히 풀고, 등을 밀어주는 것은 체념이다. 내게는 이 세계밖에 없다, 여기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하는 체념은 태어난 순간의 '이미 태어나버렸다'는 사실과 느슨하게, 하지만 확실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8(1권,p8)

이유는 없습니다. 그냥! 이런 성격으로 주인공은 태어나졌던 거지요9. 그렇게 태어나진 주인공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10은, 그렇게 태어나진 주인공에게 더더욱 혼란과 갈등을 자라나게 해줍니다. 마치!!! --- "삼각형의 세 내각의 합은 얼마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질문이 잘못되었다'라 말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배운 삼각형의 세 내각의 합은 당연히! 180도이지만, 그건 오로지 유클리드 공간에서만 성립되는 것이라고, 비유클리드 공간에선 삼각형의 세 내각의 합이 특정지어 말해질 수 없다라 말해져야 하는 것처럼, (간단하게 표현해보자면) '주인공이 옳다라 믿고 있는 것들의 공간'과 '주인공을 둘러싸고 있었던/주인공이 속해 있었던 공간이 옳다라 믿고 있는 것들'의 상이함이 지닌 간극이, 태어나서부터 서른 네살이 될 때까지 내내 주인공을 괴롭혔던 겁니다. 그러다 끝내! 자신이 속해 있던 공간(예를 들어 '비유클리드 공간')이, 그리고 그 공간 속에서 자신이 옳다라 믿어왔던 것들이 사실은 잘못된 공간이었고 잘못된 믿음이었었다라는 걸 깨닫게 되는 것이 바로!!! --- 이 소설의 결론11이 되지요. 


『인간실격』의 주인공은 그의 일생 내내 '인간의 난해함'에 괴로워 했었었지요. 물론 그 역시 그런 '인간의 난해함'을 이해하고 극복해보려 했었으나, 끝내 "지옥은 믿어져도 천국의 존재는 믿어지지 않았다"라는 말을 내뱉었고 결국 정신병원으로 보내어졌으나 --- 이 소설의 주인공 역시 "나는 가능한 한 활발한 아이를 연기했다. …… 온 힘을 기울여 '험악함'에서 계속 눈을 돌렸다. 물론 '험악함'은 나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1권,p253)에서 볼 수 있듯, 소설의 결론에 이르기 전까지는 자신이 속해 있는 공간을 극복/공간에 적응하지는 못했었지만, 결국엔 그 공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즉, 『인간실격』과 전개는 비슷하나 결말은 완전히 다른거지요. 바로 이 점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이 소설은... 체념과 도피의 이야기가 아닌, '삼각형 세 내각의 합은 180도이어야한다!' 라는 믿음을 버리고, (자신이) 속해있는 공간에 따라서는 '삼각형 세 내각의 합은 180도 아닐 수도 있다!'라는 사실을 스스로 진심으로 깨달아야 한다라는 메세지의 여운을 품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 남겨진 여운 속에는 어쩌면... 훗날 주인공이 '삼각형의 세 내각의 합은 얼마인가?'라는, 젊었던 시절의 자신에게 그토록 고민을 안겨주었던 그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다라는 걸 깨닫게 된다,라는 (사뭇 허망하다라 느껴질 수도 있는)히든카드가 남아 있을지도 모르고 말이죠.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을 읽고 썼던 감상문 속 위의 제 글이, 이 작품 『사라바』에도 정확하게 들어맞는다라는, 여기에 더해!


주변의 수많은 좋은 충고들보다, 실제 내 인생을 바꾸는 것은 자신 스스로가 느끼게 되는 깨달음이라는 걸 이 소설이 말해주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것이 과연 별개의 작품을 읽고 쓴 구절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사뭇 약간의 닭살이 돋기도 했었을 만큼, 이 소설 속에서도 보았던 문장12이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 그렇다면 그 '스스로 자신이 믿을 것'이란 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작가가 안겨주고 있는 다음의 해답은, 작가 니시 가나코의 가벼운 (그러나 저와 코드가 딱 맞았떨어졌던) 유머와, 결코 가볍지 않은 그녀의 작가로서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생각됩니다. 뭔가 주저리주저리 저의 생각을 써내었긴 합니다만 무엇보다 이 소설! 어쨌든 상당히 재미있게 읽혔었네요.



 

   
 

"자신이 믿은 것, 진심으로 믿고 바싹 다가간 것은 대단함 힘이 아니었다. 위대한 뭔가가 아니었다. … 지금까지 실컷 봐온, 어디에나 있는 하잘것없는 것이었던 거이다."

(2권,p146)

 

 

 

 

 

 


▶ 짧은 한두 마디 : 『상실의 시대』, 『인간실격』, 그리고 무엇보다 『도련님』에의 유쾌한 오마쥬?:  


※ 당연히! 함께 읽어보면 좋은 작품들 :  

- 무라카미 하루키 作, 『상실의 시대

- 다자이 오사무 作, 『인간실격

- 나쓰메 소세키 作, 『도련님



 

  1. 예를 들어 --- "내게도 누나의 태도는 수수께끼였다. 밥을 먹고 싶지 않으면 처음부터 식탁에 앉지 않으면 된다. 그래도 누나는 매번 우직하게 자리에 앉았고, 우직하게 먹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 누나는 아마 진짜 먹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먹고 싶지 않은 자신'을 어머니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왜 안 먹는 거야?'라 말해주기를 바랐을 것이고, 대답 없이 침묵을 지키기로 작정하고 있는 자신을 언제까지라도 추궁해주기를 바랐던 것이다."(1권,p100) --- 이는, 일본어 원작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아마도 이 작품을 한국어로 옮긴이의 능력 덕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2. 예를 들어 --- ① 매일 아버지의 귀가는 늦었다. 당시의 샐러리맨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아버지의 일은 '일을 하는 것'이었다.(1권,p103) ②'고용되어 왔다'기보다는 '고용되어 와주었다'는 느낌이었다.(1권,p188) ③ 아버지에게서 모든 걸 포기한 남자의 기색이 떠돌았다.('모든 걸 포기한 남자'를 만나본 적이 없었지만 처음으로 만난 그런 남자가 아버지였다)(1권,p407) 등. 암튼! 누군가에게는 안그럴 수 있겠지만, 작가 니시 가나코의 (유머)코드는 저에게 딱! 들어맞더군요.
  3. "제가 여기서 그려 내고 싶었던 것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그것이 이 소설의 간명한 테마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와 동시에 한 시대를 감싸고 있는 분위기라는 것도 그려 보고 싶었습니다. 사람을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은 자아(自我)의 무게에 맞서는 것인 동시에, 외부 사회의 무게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참 가슴 아픈 일이지만, 누구나 그 싸움에서 살아 남게 되는 건 아닙니다.(pp8-9)" --- 하루키는 이처럼 『상실의 시대』를 통해 '시대의 분위기'를 표현하고 싶었다라 스스로 대놓고 말했었지요. 이 작품 『사라바』 역시 일본 뿐만 아니라 이집트 등의 사회 분위기를 담아내고는 있지만, 그 역할이 이 작품의 정서나 주제에까지 간여하는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단순히 스토리의 전개를 위한 도구로 쓰이는 정도였다랄까요? 즉, 이 소설은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 국한된 범위를 가지고 있을 뿐이라 저는 읽어냈다라는 거지요.
  4. 『상실의 시대』가 저에게, 그리고 아마 거의 모든 이 책의 독자들에게 『위대한 개츠비』를 반드시 읽어보고싶다란 욕구를 가지게 해주었다라면, 이 소설에선 『호텔 뉴햄프셔』라는 작품이 그러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지요.
  5. 무라카미 하루키 作, 『상실의 시대』, 문학사상사 刊, 2000.(3판 1쇄)
  6. 이문열 作, 『젊은날의 초상』, 민음사 刊, 2005.11.25.(3판 1쇄)
  7. 이것이 '나다운 등장방법'인 이유는 뭘까?라 가져보았던 의문에 대한 해답을, 주인공의 성장과정을 통해 알아가는 것이 결국 이 소설의 핵심적 스토리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8. 개인적으로 이 문장을 읽고는 깜짝! 놀랐었어요. 반복해서 읽어볼 수록, 소리내어 읽어보면 더더욱 이 평범하게 보이는 문장은 정말로 평범하지 않은, 그야말로 대단한 문장이 아닐까 싶습니다.
  9. 이를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많고 많은 문장들 중) 또 하나의 문장으로는 --- "내 특기? 그렇다, 단념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껏 초연함에 달라붙음으로써 살아올 수 있었다.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1권,p291)
  10. 주인공의 어머니, 그리고 그 누구보다 주인공의 누나!
  11. 작가는, 이 작품의 제목으로도 쓰인 '사라바'라는 단어를 통해 이 결론에 이르는 과정에서 뭔가 감동적인 코드를 이끌어내고자 했던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저에겐 차라리 없었더라면!하는 부분일 뿐이었더랬습니다. 딱! 그 부분만이 유난히 작위적인 느낌이 물씬 들었기 때문이지요.
  12. "스스로 자신이 믿을 것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돼."(2권,p18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굶주림 - 개정판
크누트 함순 지음, 우종길 옮김 / 창 / 201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굶주림』은 배가 고픈 한 젊은이에 대한 소설이다. 그저 그 뿐이다. …… 이 책에는 배고픔 외에는 다른 어떤 비극도, 다른 어떤 행위도 없다.(p9)

​첫째 아이를 낳게 되면 (일반적으로) 부부의 모든 사랑과 관심은 그 첫째 아이를 향하게 됩니다. 첫째가 좀 자라나, 그러다 둘째 아이가 태어나게 되면 (최소한 얼마간은) 둘째를 향한 관심과 사랑이 더 커지게 되겠죠. 하지만 그렇다 하여, 첫째를 향한 부부의 사랑과 관심이 아주 사라졌다라거나, 미미한 수준으로 작아졌다거나 하는 일은 (또한 일반적으로 보아) 생겨나지 않을 겁니다. 단지 그 순간, (한정된 시간 내에) 더 많은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 누구이냐 하는 점에서의 차이가 있는 것 뿐이겠지요. 마찬가지로!!!


'배고픔의 경제학'보다 이젠 '배아픔의 경제학'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라는 주장이 결코 '배고픔의 경제학'을 끝내도 된다/더 이상 필요치 않다라는 말은 아닐 겁니다. 단지, 지금 현재 더 많은 사회적 관심을 필요로 하는 것이 어떤 것이냐에 관한 선택의 결과일 뿐인 것이겠지요. 최소한 '사회적'으로는 말입니다. 그런데!!!

……………………………………………………………………………………

'빈곤'이라는 단어는 신문지상에서 심심치 않게 접하게 됩니다만, '굶주림'이란 단어는, 적어도 2016년의 대한민국에는 뭔가 낯설게 다가오기만 합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저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는 빈곤 계층이 분명 존재한다라 인정함에도, '굶주림'에 허덕이는 개인이 있을 것이란 생각은 선뜻 떠오르지 않기도 합니다. '사회'란 것이 '개인의 총합'으로 정의될 진데, 이러한 인식의 간극은 대체 무엇에 기인되는 것일까요?

·

·

·

어떠한 현상에 관해서건 대체적으로 사회적으로만 보려는 우리의 관습화된 시선으로부터 기인한다라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좀 건방을 떨어보자면) 이건 단적으로 말해 --- 비가 안와도, 혹은 비가 너무 많이 와도 그것이 군주의 덕(德)이 부족해서라는 식의, 그러니까 그냥 모든 걸 ('나'라는) '개인'의 차원이 아닌 ('나'를 제외한) '누군가'로 인해 발생되는 (그리하여 개인인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견 책임의 전가에 우리가 너무도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것이죠. 이러한 사고방식이 나름 체계적인 논리를 갖추게 되면!

'개인의 빈곤' 역시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탈바꿈되어버리는 것이고, 이 단계에선 이제 '개인의 잘잘못'은 부지불식간이 이 개인적 상황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 일종의 외부적 요인식으로 간주되어버리고 맙니다.2 이러한 인식은 예의 이 책의 <역자 후기>에서도 보여지고 있지요.


주인공은 …… 비정상적이라고 할 만큼 순수한 선량함을 간직한 사람이다. 정상적인 사회에서는 버림을 받은 고독한 이방인이다. 반사회적이며 도시 문명을 혐오하는 극단적인 자기 중심자이다. (p296)

"선량함 → 버림받은 고독한 이방인 → 반사회적 → 자기 중심자"라는 논리의 전개를 못박아, 주인공이 처절하게 겪어내는 '굶주림'이 결국은 '사회의 탓'이라는 식으로 결말을 맺고 있습니다. 이는 감상문의 맨 처음에 인용해 놓은 옥타브 미르보가 쓴 <소개의 글>과는 완전히 다른 인식이죠. 저 개인적으로는 옥타브 미르보의 소개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여기에 덧붙여 본다면 이 책은 --- '굶주림'으로 대변되는 육체적/현실적 고통에, 한 개인이 어떻게 자신을 ('극복'이 아닌) 정신적으로 지켜나가고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라 생각합니다. 한 마디로 (일 개인이 경제적 곤란함으로부터 기인되는 육체적 고통 속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유지해갈 수 있는 정신적 힘의 원천'이 과연 무엇인가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이죠.


………………………


​하도 헐벗어서 결국은 빗 한 개도 남아 있지 않았고, 사는 것이 너무 슬퍼졌을 때 읽을 만한 책 한 권도 남아 있지 않았다.(p18)

이야기 내내, 주인공의 굶주림은 해결되질 않습니다. 종종 신문사에 기사를 써넘겨 받은, 혹은 이래저래 약간의 돈이 생겨나기도 했지만 그 돈들이 주인공의 굶주림을 완전하게 해결해주지는 못했지요. 여기서!!! --- 이러한 굶주림의 상황 하에서 주인공의 심리가 어떻게 변화되는가를 살펴보는 것이야 말로 독자가 사뭇 지리하기만 한 이 작품을 읽어가는 (다른 것을 찾아낼 수 없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유일한 이유라 생각됩니다. 잠깐, 이 작품이 지리하다고요?


네! 이 소설엔 특별한 사건도 없으며, 뭐라 써낼 만한 줄거리조차 없습니다. 그저 주인공의 심리 변화와 그로 인해 보여지는 기이한 행동들의 서술 밖에는 없지요. 흡사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 혹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읽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랄까요? --- '읽어가는 것' 역시 일종의 노동이기에, 이 작품은 일견 그 노동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있지 않다라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하기에, 이 작품에 대한 호불호는 극명하게 갈릴 수 밖에 없을 것 같으며, 대체적으로 '불호(不好)'가 압도적이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럼 저는 어땠을까요?


·

·

·


【 완벽한 굶주림

훈련소 시절, PT 체조를 열라 시킨 후 목말라 죽겠는 훈병들에게 드럼통에 있는 물을 손으러 떠먹으라는 지시가 떨어지더군요. 물론! 깨끗한 물은 절대 아니었지요. (뭐 그렇다고 똥물까지는 아니었지만, 암튼 나뭇잎도 둥둥 떠있고 했던 기억은 납니다.) 하지만 --- 목이 마르지, 그걸 두 손을 고이 떠 먹게 되더군요. 제 인생에 앞으로 다시금 그처럼 목이 마른데 마실 수 있는 물이 그런 물 밖에 없다라는 상황이 다시 생겨날 것 같지는 않지만, 암튼! 그땐 그걸 마시면서 스스로 비참하다거나 군대의 무식한 불합리성 등에 대해 생각할 겨를은 전혀 없었더랬습니다. 오히려, 물을 마실 수 있게 해주었다라는 게 감사했었었지요. 마찬가지로!!!


배고픔이 내 신경계를 물어뜯기 시작했다.(p90)

● 잔인하도록 배가 고팠다. 죽어서 없어져 버렸으면 싶었다. …… 내 가난은 언제까지나 끝나지 않을 것인가!(p96)

● 굶주림이 용서 없이 나를 물어뜯으며 내게 쉴 틈을 주지 않았다. 포만감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희망에서 자꾸자꾸 침을 삼켜댔다. 그렇게 해보니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pp96-97)

지독하게도 배가 고팠다. 땅바닥에서 대팻밥을 주워 씹어 보았다. 괜찮았다. 왜 진작 이 생각을 못했을까?(p112)

스스로 '완벽한 굶주림'이라 표현하고 있는 이러한 상황들에 묘사는, 문득 훈련병 시절 떠먹었던 그 물을 생각나게 해주었고, 그러하기에 --- "나는 굶주림으로 인하여 완전히 광기에 이르렀다"(p105)라는 주인공의 고백은 그의 여러 가지 기이한 행동들을 충분히 변명해주고 있다라 생각됩니다. 지금의 저 역시, 그때의 그 드럼통 속 물을 떠먹으라는 지시하는 사람에게, 그리고 그 물을 떠먹는 사람들을 '미쳤다'라 표현할 수 밖에 없으니까요.

 


 

 

 

 

【 심리적 변화

이러한 '굶주림'은 단지 주인공의 육체에만 고통을 주고 신체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광기'라 표현되고 있는 주인공의 심리 이외에도, 정신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지요. 그것은 바로!


주인공의 유일한 수입원은 기사를 써 신문사에 넘기고 받는 원고료 뿐이었더랬습니다만, 그가 쓰는 기사는 대중적인 신문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 날, 예의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던 주인공에게 '사령관'이라 불리우는 편집장이 선뜻 10크로네를 건네 주지요. 그저 '그를 굶어 죽게 내버려 둔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라는 이유로 말입니다. '사령관'이 건네 준 10크로네를 받아든 주인공은 그에게 "문득 살려줘서 고맙다고 '사령관'에게 인사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났다."(p210)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큰 의미 없는 도움이 주인공에게는 '살려줘서 고마운' 행동이었던 거지요. 이처럼!!!


경제적인 어려움은 주인공의 심리마저 쪼그라들게 만들었었으며, 이는 사랑하는 한 여성을 대하는 장면에서 가장 가슴 아프게 보여지고 있지요.


사람이 이렇게 삶에 부서지고 나면 어떻게 용기를 잃지 않겠는가? 나는 더럽고 굶주림에 찢기고 얼굴도 일그러지고 씻지도 않고 옷도 절반쯤 입은 둥 만 둥 이런 모습으로, 젊은 아가씨 앞에 있었다.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어야 할 몰골이었다. 나는 몸을 움츠리고 나도 모르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또 만날 수 없겠지요?"(pp182-183)

​차마!!! '또 만날 수 있을까요?'라 물어보지 못하고, 그저 '또 만날 수 없겠지요?'라고 밖에는 물을 수 없었던 겁니다. 훗날, 그녀의 집에서 그녀와 단 둘이 있었을 때에도 주인공은 안타까워 합니다. : "내가 아직 잘살며 정상적인 남자의 모습을 띠고 있었을 때, 생활 수단을 좀 갖출 수 있었을 때 그녀를 만났더라면, 사정이 달랐을 것이다."(p220)


이처럼 쪼그라든 주인공의 자존감(自尊感)은, 그녀의 블라우스 단추를 하나씩 풀어가는 장면에서 극적으로 보여지게 됩니다. 아주 짧은 단 하나의 문장으로 말이죠.


"봐도 될까요?3"(p221)

……………………………………………………………………………………


【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그저 신(神)을 원망할 뿐입니다4. 딱 그 뿐이죠. 자신을 이렇게 만든 것이 사회라 탓하지도 않으며, 자신에게 베풀기를 거절하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도 절대 원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라도 그랬을 꺼야'식의 변명을 해주기도 하지요. 주인공에게 주어진 유일한 위안은 오로지! --- "그때는 산다는 것이 멋있었는데"(p182)라는 것 뿐입니다. 태어나서 계속 지금과 같은 굶주림의 상황에서만 살아왔던 것이 아닌, '나도 왕년엔!'이라 스스로를 위안해줄 수 있는 (지나간) 과거가 있었다라는 것이 그가 자신의 삶을 (예를 들어,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의무같은 것조차 없는 상황에서도) 스스로 끝내지는 않고 버텨나가는 단 하나의 이유였다라 저는 이해했습니다. 그게 말이 될까?라 묻는 분도 있을 수 있겠으나, 저 개인적으로는 100% 공감되는 이유였습니다. 왜냐...

·

·

·

  

   
 

"모든 독자는 자신의 일상적인 경험과 상상력에 기초해 문학작품을 읽는다. …… (또한) 모든 독자는 문학작품에서 자기가 일상에서 느껴온 것들을 찾고 싶어 한다.  …… 만약 이 작품이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였다면, 분명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어떤 생각과 감정을 일깨웠기 때문일 것이다."

 

 

 

 - 『허삼관 매혈기』한국어판 개정판 서문 중 작가 위화의 글

 

 


모든 문학작품을 읽을 때면 항상 머리 속에 떠올려 놓고 있는 작가 위화의 위 문장이 예의 이번에도!!! 저의 마음을 흔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했기에 ---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 듯한, 그리고 '불호'의 비율이 월등히 높을 것만 같은 이 작품 『굶주림』에 터져나오는 한숨을 경험할 수 있었었던, 비록 그 많은 한숨들 모두가 다 '좋아도 터지는 한숨'만이 아니었었음에도 이 작품에 흠뻑 젖어들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죠. 그 뿐 아니라!!!

외국으로 나가는 배를 타는 것으로 끝맺음 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예의 이것은 주인공이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선택한 것이 아닌, 물론 '그때는 산다는 것이 멋있었는데'의 시절로 돌아가려는 꿈을 가져서도 아닌, 그저 --- '살아있으려 한다는 것에, 더 살고 싶어한다라는 것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가?'라는, 적잖은 '빈곤'이 현실인 이 사회에서, 그리하여 겉으로 보여지고 싶어하지 않는 수많은 '굶주림'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이 사회에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자들보다) 훨씬 더 많을 수 밖에 없는 것에의 가장 현실적이고 정확한 이유를 알려주고 있다라고도 생각합니다. 그러하기에 당연히!

이 작품은 슬프게 읽혀질 수 밖에 없는 소설이며, 누군가의 실제 이야기였다라는 점5이 이 작품을 읽는 또 다른 누군가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있던 어떤 생각과 감정을 일깨'우기라도 한다라면, 그리고 그 또 다른 누군가가 바로 당신이라면 --- 남게 되는 여운을 쉽게 감당해내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란 생각을 해보게도 됩니다. 지금의 저에게 그러한 것처럼 말이죠. 


▶ 짧은 한두 마디 :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코걸이일 뿐인 무언가가 뜻하지 않게도!!! --- 나에게만큼은 귀걸이가 되어준 느낌?

 

※ 읽어본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의 작품 (수상연도 순)

​- 펄 벅(1938) : 「대지

- 헤밍 웨이(1954) : 노인과 바다

- 알베르 카뮈 (1957) : 이방인」 · 「페스트

- 존 스타인벡 (1962) : 분노의 포도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1970) :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윌리엄 골딩 (1983) : 파리대왕

- 주제 사라마구 (1998) : 눈 먼 자들의 도시· 죽음의 중지」 · 도플갱어」 · 예수복음

-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2010) :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 모옌 (2012) :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

 


 

  1. 2판부터는 수정되어 발간되긴 했지만, "Sult"란 원제를 "Slut"로 표기해 발간한 건 그저 실수로 넘겨서는 안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심지어 책의 안쪽 첫 페이지에도 "Slut"으로 표기되어 있더군요. (게다가 '알라딘'에는 여전히 <SLUT>라 쓰여있는 표지 사진이 떡! --;;) 이런 건 정말 --- 담당자가 가루가 되도록 까여야 할 일!!!
  2. 쉽게 말해, 걍 모든 것이 '신자유주의' 때문이야!라고 말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해진다라는 거지요.
  3. 아사다 지로의 『고로지 할아버지의 뒷마무리』를 번역한 홍은주C는 <옮긴이의 말>에서 "이 작품들을 번역하면서 한숨이 터졌고, 좋아도 한숨이 터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p254)라 적고 있었었지요. 저 개인적으론 "봐도 될까요?"란 이 한 문장에서 그 '좋아도 터지는 한숨'이 저도 모르게 터지더군요.
  4. 이때 주인공이 원망하는 신(神)은 단지 --- 인간이 만들어 놓은, 즉 존재하지는 않는, 하지만 절대적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가정되는 '가상의 존재'로서의 '신(神)'이라고 저는 이해했습니다.
  5. "이제는 더 이상 시도해볼 일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다 해보았다. 하루 온종일 다녀 보았지만 한 가지도 되는 일이 없었다! 누구한테 이 이야기를 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글로 쓰면 내가 지어낸 이야기라고 사람들은 말하겠지."(p14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