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바 1 - 제152회 나오키상 수상작 오늘의 일본문학 14
니시 카나코 지음, 송태욱 옮김 / 은행나무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만만찮은 분량관 달리, 매우 말랑말랑한 소설입니다. (특히나 1권의 초반부에선) 작가 김훈의 『남한산성』에서 느꼈었던 (툭툭 끊어내었음에도 불구하고) '운율이 깃든 산문'을 읽는 즐거움을 맛볼 수도 있었으며1, 작품 내내 적잖이 등장하고 있는 ( )안의 구절들은 예의 작가 천명관의 『고래』를 읽었을 때와 같은, 작지만 매우 강력한, 게다가 의미까지를 지닌 빵터짐을 선사해주기도 했었었지요2. 그러나 아무래도 이 작품은 --- 언뜻 보자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하지만 결국엔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그리고 (무엇보다)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과의 어쩔 수 없는 비교(?)를 하게 해줍니다. 어쨌든, 이 세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바들을 적절히 혼합시킨 soft version이라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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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실의 시대


​요컨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시대>가 일본 버블 경제의 산물이라면 니시 가나코의 <사라바>는 버블이 붕괴하고 도래한 신자유주의 시대가 낳은 새로운 '상실의 시대'를 이야기한다.(p425)

- <옮긴이의 말> 중.

작품을 읽어가는 내내 예의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어쩔 수 없이 떠올랐었건만, 이건 비단 저에게만 느껴진 건 아니었었더군요. 하지만 제가 이 작품에서 신자유주의 어쩌구를 떠올렸던 건 아닙니다.3 단순하게는 '회상의 구조'라는 방식이, 남자 주인공의 방황이, 그리고 적지않은 문학작품들4과 음악들이 등장한다라는 점들이 그러하였었거늘, 진짜 이 소설로부터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떠올릴 수 밖에 없는 건 바로!


나는 고개를 들어 북해(北海)의 하늘에 떠 있는 어두운 구름을 바라보면서, 내가 이제까지 살아오는 여러 길목에서 잃어버린 많은 것들을 생각했다. 잃어버린 시간, 죽었거나 또는 사라져 간 사람들,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지난 추억들, 그리고 그 모든 상실의 아픔들을.(p145)

'상실'이라는 단어는 반드시! --- '상실'이라는 단계 이전에 '소유'가 있었었음을 전제로 하고 있어야만 성립될 수 있습니다.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상실' 역시 생겨나지 않을테니까요. 『젊은 날의 초상』에서 작가 이문열이 '꽃다운 시절'이라 표현했었던, 그리하여 "꽃답다는 것은 한번 그늘지고 시들기 시작하면 그만큼 더 처참하고 황폐하기 마련"(p96)이라 표현했었던 바로 그! '상실의 과정'을,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겪게만 되는 ('상실의 결과'로서의) 혼란과 낭패를 작가 니시 가나코는 주인공 아유무를 통해 적나라하게, 무엇보다 ('유난히'라는 부사를 꼭 붙이고 싶도록) 제 마음에 와닿게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스구와 고가미와 있으면 나는 간단히 자신의 황금시대를 떠올릴 수 있었다. …… 나는 현재의 자신을 무시하고 돌이켜볼 수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천박한 행위인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나는 현실의 자신에게 실컷 혼나고 있었다. 현실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내게는 빛나는 추억 안에서만 자신의 모습을 인정할 용기가 있었던 것이다.(2권,p239)

간단히 말해 --- '나에게도 한때는!'이란 과거에 여전히 사로잡혀, 이미 '그늘지고 시들어버린' 현재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라는 거지요. 누구와 함께 걸었다라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수많은 여학생들을 설레이게 했었던 주인공이, '서른세 살의 머리숱 적은'(2권,p239)가 되어 아름답지도 않은 연상의 여인에게조차 배신을 당하게 된 현실을 주인공은 '전락했다'(2권,p239) '구슬픈 말로(末路)'(2권,p276)라는 단어로 표현하며, '빛나는 나의 세월은 어디로 가버렸을까?'(2권,p401)라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작품 속에서 '계속해서 빠지는 머리카락'으로 대변되는 주인공의 상실이 얼핏 보아선, 이 소설의 주요한 주제일 듯도 보이나 기실 그리 중요한 주제는 결코! 아니라 생각합니다. 왜? --- 주인공에게 '상실'되어진 것은 그저 '꽃다운 시절'이었었을 뿐, 그리고 그건 누구나 그의 일생에서 가지고 있는 (비록 그 길고 짧음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을 수 있는) 순간이기 때문이지요. 만약 이 소설이 그처럼 누구나 (혹은 99%쯤 되는 거의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삶의 영락(零落)'을 주제로 삼았다라면 역설적으로 별 공감을 줄 수 없는, 그렇고 그렇게 흔해빠진 소설에 그쳤을 거라 생각합니다. (혹은 1%의 '고전'이 되었거나) '공감'이라는 감정의 작용은 아주 작은 한 끝 차이로 절절하게 또는 시시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니까요. 무엇보다!!!

주인공 아유무가 소설의 마지막에 가서야 찾게 되는 무언가는 애초부터! 그가 소유하고 있지 않았었던, 즉 '상실'이라는 단어를 적용시킬 수 없는 것이었기에, '상실'이라는 단어가 이 작품의 주제가 될 수는 없다라 생각될 수 밖에 겁니다.



【 인간실격 / 도련님

    

"삼각형의 세 내각의 합은 얼마인가?"

 

이런 질문을 받으면 상당수의 사람들은 "180도"라고 대답할 것이다. 19세기 초반까지 대다수 수학자들도 그렇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지금 어떤 수학자도 위의 질문에 "180도"라고 답하지 않는다.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 장우석 著, 「수학, 철학에 미치다」

"나는 이 세상에 왼발부터 등장했다"(p7)라는 소설의 첫 문장. 그리고 그것을 "아주 나다운 등장방법이라고 생각한다"(p7)라 말하는 도입부는 말 그대로 주인공의 성격을 더함도 덜함도 없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7 1권과 2권을 통해 일어나는 여러가지 사건들의 전개와 결말은 어김없이 주인공의 성격으로 인해 그러하도록 흘러만 갑니다.


전혀 모르는 세계에 희희낙락 뛰어드는 쾌활함은 내게 없다. 먼저 공포가 있다. 그 세계에 친숙해질 수 있을까, 살아갈 수 있을까. 공포는 잠시 내 몸을 정지시킨다. 그리고 그 정지를 간신히 풀고, 등을 밀어주는 것은 체념이다. 내게는 이 세계밖에 없다, 여기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하는 체념은 태어난 순간의 '이미 태어나버렸다'는 사실과 느슨하게, 하지만 확실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8(1권,p8)

이유는 없습니다. 그냥! 이런 성격으로 주인공은 태어나졌던 거지요9. 그렇게 태어나진 주인공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10은, 그렇게 태어나진 주인공에게 더더욱 혼란과 갈등을 자라나게 해줍니다. 마치!!! --- "삼각형의 세 내각의 합은 얼마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질문이 잘못되었다'라 말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배운 삼각형의 세 내각의 합은 당연히! 180도이지만, 그건 오로지 유클리드 공간에서만 성립되는 것이라고, 비유클리드 공간에선 삼각형의 세 내각의 합이 특정지어 말해질 수 없다라 말해져야 하는 것처럼, (간단하게 표현해보자면) '주인공이 옳다라 믿고 있는 것들의 공간'과 '주인공을 둘러싸고 있었던/주인공이 속해 있었던 공간이 옳다라 믿고 있는 것들'의 상이함이 지닌 간극이, 태어나서부터 서른 네살이 될 때까지 내내 주인공을 괴롭혔던 겁니다. 그러다 끝내! 자신이 속해 있던 공간(예를 들어 '비유클리드 공간')이, 그리고 그 공간 속에서 자신이 옳다라 믿어왔던 것들이 사실은 잘못된 공간이었고 잘못된 믿음이었었다라는 걸 깨닫게 되는 것이 바로!!! --- 이 소설의 결론11이 되지요. 


『인간실격』의 주인공은 그의 일생 내내 '인간의 난해함'에 괴로워 했었었지요. 물론 그 역시 그런 '인간의 난해함'을 이해하고 극복해보려 했었으나, 끝내 "지옥은 믿어져도 천국의 존재는 믿어지지 않았다"라는 말을 내뱉었고 결국 정신병원으로 보내어졌으나 --- 이 소설의 주인공 역시 "나는 가능한 한 활발한 아이를 연기했다. …… 온 힘을 기울여 '험악함'에서 계속 눈을 돌렸다. 물론 '험악함'은 나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1권,p253)에서 볼 수 있듯, 소설의 결론에 이르기 전까지는 자신이 속해 있는 공간을 극복/공간에 적응하지는 못했었지만, 결국엔 그 공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즉, 『인간실격』과 전개는 비슷하나 결말은 완전히 다른거지요. 바로 이 점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이 소설은... 체념과 도피의 이야기가 아닌, '삼각형 세 내각의 합은 180도이어야한다!' 라는 믿음을 버리고, (자신이) 속해있는 공간에 따라서는 '삼각형 세 내각의 합은 180도 아닐 수도 있다!'라는 사실을 스스로 진심으로 깨달아야 한다라는 메세지의 여운을 품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 남겨진 여운 속에는 어쩌면... 훗날 주인공이 '삼각형의 세 내각의 합은 얼마인가?'라는, 젊었던 시절의 자신에게 그토록 고민을 안겨주었던 그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다라는 걸 깨닫게 된다,라는 (사뭇 허망하다라 느껴질 수도 있는)히든카드가 남아 있을지도 모르고 말이죠.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을 읽고 썼던 감상문 속 위의 제 글이, 이 작품 『사라바』에도 정확하게 들어맞는다라는, 여기에 더해!


주변의 수많은 좋은 충고들보다, 실제 내 인생을 바꾸는 것은 자신 스스로가 느끼게 되는 깨달음이라는 걸 이 소설이 말해주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것이 과연 별개의 작품을 읽고 쓴 구절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사뭇 약간의 닭살이 돋기도 했었을 만큼, 이 소설 속에서도 보았던 문장12이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 그렇다면 그 '스스로 자신이 믿을 것'이란 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작가가 안겨주고 있는 다음의 해답은, 작가 니시 가나코의 가벼운 (그러나 저와 코드가 딱 맞았떨어졌던) 유머와, 결코 가볍지 않은 그녀의 작가로서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생각됩니다. 뭔가 주저리주저리 저의 생각을 써내었긴 합니다만 무엇보다 이 소설! 어쨌든 상당히 재미있게 읽혔었네요.



 

   
 

"자신이 믿은 것, 진심으로 믿고 바싹 다가간 것은 대단함 힘이 아니었다. 위대한 뭔가가 아니었다. … 지금까지 실컷 봐온, 어디에나 있는 하잘것없는 것이었던 거이다."

(2권,p146)

 

 

 

 

 

 


▶ 짧은 한두 마디 : 『상실의 시대』, 『인간실격』, 그리고 무엇보다 『도련님』에의 유쾌한 오마쥬?:  


※ 당연히! 함께 읽어보면 좋은 작품들 :  

- 무라카미 하루키 作, 『상실의 시대

- 다자이 오사무 作, 『인간실격

- 나쓰메 소세키 作, 『도련님



 

  1. 예를 들어 --- "내게도 누나의 태도는 수수께끼였다. 밥을 먹고 싶지 않으면 처음부터 식탁에 앉지 않으면 된다. 그래도 누나는 매번 우직하게 자리에 앉았고, 우직하게 먹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 누나는 아마 진짜 먹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먹고 싶지 않은 자신'을 어머니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왜 안 먹는 거야?'라 말해주기를 바랐을 것이고, 대답 없이 침묵을 지키기로 작정하고 있는 자신을 언제까지라도 추궁해주기를 바랐던 것이다."(1권,p100) --- 이는, 일본어 원작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아마도 이 작품을 한국어로 옮긴이의 능력 덕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2. 예를 들어 --- ① 매일 아버지의 귀가는 늦었다. 당시의 샐러리맨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아버지의 일은 '일을 하는 것'이었다.(1권,p103) ②'고용되어 왔다'기보다는 '고용되어 와주었다'는 느낌이었다.(1권,p188) ③ 아버지에게서 모든 걸 포기한 남자의 기색이 떠돌았다.('모든 걸 포기한 남자'를 만나본 적이 없었지만 처음으로 만난 그런 남자가 아버지였다)(1권,p407) 등. 암튼! 누군가에게는 안그럴 수 있겠지만, 작가 니시 가나코의 (유머)코드는 저에게 딱! 들어맞더군요.
  3. "제가 여기서 그려 내고 싶었던 것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그것이 이 소설의 간명한 테마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와 동시에 한 시대를 감싸고 있는 분위기라는 것도 그려 보고 싶었습니다. 사람을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은 자아(自我)의 무게에 맞서는 것인 동시에, 외부 사회의 무게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참 가슴 아픈 일이지만, 누구나 그 싸움에서 살아 남게 되는 건 아닙니다.(pp8-9)" --- 하루키는 이처럼 『상실의 시대』를 통해 '시대의 분위기'를 표현하고 싶었다라 스스로 대놓고 말했었지요. 이 작품 『사라바』 역시 일본 뿐만 아니라 이집트 등의 사회 분위기를 담아내고는 있지만, 그 역할이 이 작품의 정서나 주제에까지 간여하는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단순히 스토리의 전개를 위한 도구로 쓰이는 정도였다랄까요? 즉, 이 소설은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 국한된 범위를 가지고 있을 뿐이라 저는 읽어냈다라는 거지요.
  4. 『상실의 시대』가 저에게, 그리고 아마 거의 모든 이 책의 독자들에게 『위대한 개츠비』를 반드시 읽어보고싶다란 욕구를 가지게 해주었다라면, 이 소설에선 『호텔 뉴햄프셔』라는 작품이 그러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지요.
  5. 무라카미 하루키 作, 『상실의 시대』, 문학사상사 刊, 2000.(3판 1쇄)
  6. 이문열 作, 『젊은날의 초상』, 민음사 刊, 2005.11.25.(3판 1쇄)
  7. 이것이 '나다운 등장방법'인 이유는 뭘까?라 가져보았던 의문에 대한 해답을, 주인공의 성장과정을 통해 알아가는 것이 결국 이 소설의 핵심적 스토리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8. 개인적으로 이 문장을 읽고는 깜짝! 놀랐었어요. 반복해서 읽어볼 수록, 소리내어 읽어보면 더더욱 이 평범하게 보이는 문장은 정말로 평범하지 않은, 그야말로 대단한 문장이 아닐까 싶습니다.
  9. 이를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많고 많은 문장들 중) 또 하나의 문장으로는 --- "내 특기? 그렇다, 단념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껏 초연함에 달라붙음으로써 살아올 수 있었다.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1권,p291)
  10. 주인공의 어머니, 그리고 그 누구보다 주인공의 누나!
  11. 작가는, 이 작품의 제목으로도 쓰인 '사라바'라는 단어를 통해 이 결론에 이르는 과정에서 뭔가 감동적인 코드를 이끌어내고자 했던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저에겐 차라리 없었더라면!하는 부분일 뿐이었더랬습니다. 딱! 그 부분만이 유난히 작위적인 느낌이 물씬 들었기 때문이지요.
  12. "스스로 자신이 믿을 것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돼."(2권,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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