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주림 - 개정판
크누트 함순 지음, 우종길 옮김 / 창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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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림』은 배가 고픈 한 젊은이에 대한 소설이다. 그저 그 뿐이다. …… 이 책에는 배고픔 외에는 다른 어떤 비극도, 다른 어떤 행위도 없다.(p9)

​첫째 아이를 낳게 되면 (일반적으로) 부부의 모든 사랑과 관심은 그 첫째 아이를 향하게 됩니다. 첫째가 좀 자라나, 그러다 둘째 아이가 태어나게 되면 (최소한 얼마간은) 둘째를 향한 관심과 사랑이 더 커지게 되겠죠. 하지만 그렇다 하여, 첫째를 향한 부부의 사랑과 관심이 아주 사라졌다라거나, 미미한 수준으로 작아졌다거나 하는 일은 (또한 일반적으로 보아) 생겨나지 않을 겁니다. 단지 그 순간, (한정된 시간 내에) 더 많은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 누구이냐 하는 점에서의 차이가 있는 것 뿐이겠지요. 마찬가지로!!!


'배고픔의 경제학'보다 이젠 '배아픔의 경제학'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라는 주장이 결코 '배고픔의 경제학'을 끝내도 된다/더 이상 필요치 않다라는 말은 아닐 겁니다. 단지, 지금 현재 더 많은 사회적 관심을 필요로 하는 것이 어떤 것이냐에 관한 선택의 결과일 뿐인 것이겠지요. 최소한 '사회적'으로는 말입니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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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이라는 단어는 신문지상에서 심심치 않게 접하게 됩니다만, '굶주림'이란 단어는, 적어도 2016년의 대한민국에는 뭔가 낯설게 다가오기만 합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저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는 빈곤 계층이 분명 존재한다라 인정함에도, '굶주림'에 허덕이는 개인이 있을 것이란 생각은 선뜻 떠오르지 않기도 합니다. '사회'란 것이 '개인의 총합'으로 정의될 진데, 이러한 인식의 간극은 대체 무엇에 기인되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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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현상에 관해서건 대체적으로 사회적으로만 보려는 우리의 관습화된 시선으로부터 기인한다라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좀 건방을 떨어보자면) 이건 단적으로 말해 --- 비가 안와도, 혹은 비가 너무 많이 와도 그것이 군주의 덕(德)이 부족해서라는 식의, 그러니까 그냥 모든 걸 ('나'라는) '개인'의 차원이 아닌 ('나'를 제외한) '누군가'로 인해 발생되는 (그리하여 개인인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견 책임의 전가에 우리가 너무도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것이죠. 이러한 사고방식이 나름 체계적인 논리를 갖추게 되면!

'개인의 빈곤' 역시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탈바꿈되어버리는 것이고, 이 단계에선 이제 '개인의 잘잘못'은 부지불식간이 이 개인적 상황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 일종의 외부적 요인식으로 간주되어버리고 맙니다.2 이러한 인식은 예의 이 책의 <역자 후기>에서도 보여지고 있지요.


주인공은 …… 비정상적이라고 할 만큼 순수한 선량함을 간직한 사람이다. 정상적인 사회에서는 버림을 받은 고독한 이방인이다. 반사회적이며 도시 문명을 혐오하는 극단적인 자기 중심자이다. (p296)

"선량함 → 버림받은 고독한 이방인 → 반사회적 → 자기 중심자"라는 논리의 전개를 못박아, 주인공이 처절하게 겪어내는 '굶주림'이 결국은 '사회의 탓'이라는 식으로 결말을 맺고 있습니다. 이는 감상문의 맨 처음에 인용해 놓은 옥타브 미르보가 쓴 <소개의 글>과는 완전히 다른 인식이죠. 저 개인적으로는 옥타브 미르보의 소개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여기에 덧붙여 본다면 이 책은 --- '굶주림'으로 대변되는 육체적/현실적 고통에, 한 개인이 어떻게 자신을 ('극복'이 아닌) 정신적으로 지켜나가고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라 생각합니다. 한 마디로 (일 개인이 경제적 곤란함으로부터 기인되는 육체적 고통 속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유지해갈 수 있는 정신적 힘의 원천'이 과연 무엇인가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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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 헐벗어서 결국은 빗 한 개도 남아 있지 않았고, 사는 것이 너무 슬퍼졌을 때 읽을 만한 책 한 권도 남아 있지 않았다.(p18)

이야기 내내, 주인공의 굶주림은 해결되질 않습니다. 종종 신문사에 기사를 써넘겨 받은, 혹은 이래저래 약간의 돈이 생겨나기도 했지만 그 돈들이 주인공의 굶주림을 완전하게 해결해주지는 못했지요. 여기서!!! --- 이러한 굶주림의 상황 하에서 주인공의 심리가 어떻게 변화되는가를 살펴보는 것이야 말로 독자가 사뭇 지리하기만 한 이 작품을 읽어가는 (다른 것을 찾아낼 수 없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유일한 이유라 생각됩니다. 잠깐, 이 작품이 지리하다고요?


네! 이 소설엔 특별한 사건도 없으며, 뭐라 써낼 만한 줄거리조차 없습니다. 그저 주인공의 심리 변화와 그로 인해 보여지는 기이한 행동들의 서술 밖에는 없지요. 흡사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 혹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읽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랄까요? --- '읽어가는 것' 역시 일종의 노동이기에, 이 작품은 일견 그 노동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있지 않다라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하기에, 이 작품에 대한 호불호는 극명하게 갈릴 수 밖에 없을 것 같으며, 대체적으로 '불호(不好)'가 압도적이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럼 저는 어땠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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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벽한 굶주림

훈련소 시절, PT 체조를 열라 시킨 후 목말라 죽겠는 훈병들에게 드럼통에 있는 물을 손으러 떠먹으라는 지시가 떨어지더군요. 물론! 깨끗한 물은 절대 아니었지요. (뭐 그렇다고 똥물까지는 아니었지만, 암튼 나뭇잎도 둥둥 떠있고 했던 기억은 납니다.) 하지만 --- 목이 마르지, 그걸 두 손을 고이 떠 먹게 되더군요. 제 인생에 앞으로 다시금 그처럼 목이 마른데 마실 수 있는 물이 그런 물 밖에 없다라는 상황이 다시 생겨날 것 같지는 않지만, 암튼! 그땐 그걸 마시면서 스스로 비참하다거나 군대의 무식한 불합리성 등에 대해 생각할 겨를은 전혀 없었더랬습니다. 오히려, 물을 마실 수 있게 해주었다라는 게 감사했었었지요. 마찬가지로!!!


배고픔이 내 신경계를 물어뜯기 시작했다.(p90)

● 잔인하도록 배가 고팠다. 죽어서 없어져 버렸으면 싶었다. …… 내 가난은 언제까지나 끝나지 않을 것인가!(p96)

● 굶주림이 용서 없이 나를 물어뜯으며 내게 쉴 틈을 주지 않았다. 포만감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희망에서 자꾸자꾸 침을 삼켜댔다. 그렇게 해보니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pp96-97)

지독하게도 배가 고팠다. 땅바닥에서 대팻밥을 주워 씹어 보았다. 괜찮았다. 왜 진작 이 생각을 못했을까?(p112)

스스로 '완벽한 굶주림'이라 표현하고 있는 이러한 상황들에 묘사는, 문득 훈련병 시절 떠먹었던 그 물을 생각나게 해주었고, 그러하기에 --- "나는 굶주림으로 인하여 완전히 광기에 이르렀다"(p105)라는 주인공의 고백은 그의 여러 가지 기이한 행동들을 충분히 변명해주고 있다라 생각됩니다. 지금의 저 역시, 그때의 그 드럼통 속 물을 떠먹으라는 지시하는 사람에게, 그리고 그 물을 떠먹는 사람들을 '미쳤다'라 표현할 수 밖에 없으니까요.

 


 

 

 

 

【 심리적 변화

이러한 '굶주림'은 단지 주인공의 육체에만 고통을 주고 신체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광기'라 표현되고 있는 주인공의 심리 이외에도, 정신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지요. 그것은 바로!


주인공의 유일한 수입원은 기사를 써 신문사에 넘기고 받는 원고료 뿐이었더랬습니다만, 그가 쓰는 기사는 대중적인 신문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 날, 예의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던 주인공에게 '사령관'이라 불리우는 편집장이 선뜻 10크로네를 건네 주지요. 그저 '그를 굶어 죽게 내버려 둔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라는 이유로 말입니다. '사령관'이 건네 준 10크로네를 받아든 주인공은 그에게 "문득 살려줘서 고맙다고 '사령관'에게 인사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났다."(p210)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큰 의미 없는 도움이 주인공에게는 '살려줘서 고마운' 행동이었던 거지요. 이처럼!!!


경제적인 어려움은 주인공의 심리마저 쪼그라들게 만들었었으며, 이는 사랑하는 한 여성을 대하는 장면에서 가장 가슴 아프게 보여지고 있지요.


사람이 이렇게 삶에 부서지고 나면 어떻게 용기를 잃지 않겠는가? 나는 더럽고 굶주림에 찢기고 얼굴도 일그러지고 씻지도 않고 옷도 절반쯤 입은 둥 만 둥 이런 모습으로, 젊은 아가씨 앞에 있었다.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어야 할 몰골이었다. 나는 몸을 움츠리고 나도 모르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또 만날 수 없겠지요?"(pp182-183)

​차마!!! '또 만날 수 있을까요?'라 물어보지 못하고, 그저 '또 만날 수 없겠지요?'라고 밖에는 물을 수 없었던 겁니다. 훗날, 그녀의 집에서 그녀와 단 둘이 있었을 때에도 주인공은 안타까워 합니다. : "내가 아직 잘살며 정상적인 남자의 모습을 띠고 있었을 때, 생활 수단을 좀 갖출 수 있었을 때 그녀를 만났더라면, 사정이 달랐을 것이다."(p220)


이처럼 쪼그라든 주인공의 자존감(自尊感)은, 그녀의 블라우스 단추를 하나씩 풀어가는 장면에서 극적으로 보여지게 됩니다. 아주 짧은 단 하나의 문장으로 말이죠.


"봐도 될까요?3"(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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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그저 신(神)을 원망할 뿐입니다4. 딱 그 뿐이죠. 자신을 이렇게 만든 것이 사회라 탓하지도 않으며, 자신에게 베풀기를 거절하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도 절대 원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라도 그랬을 꺼야'식의 변명을 해주기도 하지요. 주인공에게 주어진 유일한 위안은 오로지! --- "그때는 산다는 것이 멋있었는데"(p182)라는 것 뿐입니다. 태어나서 계속 지금과 같은 굶주림의 상황에서만 살아왔던 것이 아닌, '나도 왕년엔!'이라 스스로를 위안해줄 수 있는 (지나간) 과거가 있었다라는 것이 그가 자신의 삶을 (예를 들어,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의무같은 것조차 없는 상황에서도) 스스로 끝내지는 않고 버텨나가는 단 하나의 이유였다라 저는 이해했습니다. 그게 말이 될까?라 묻는 분도 있을 수 있겠으나, 저 개인적으로는 100% 공감되는 이유였습니다. 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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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독자는 자신의 일상적인 경험과 상상력에 기초해 문학작품을 읽는다. …… (또한) 모든 독자는 문학작품에서 자기가 일상에서 느껴온 것들을 찾고 싶어 한다.  …… 만약 이 작품이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였다면, 분명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어떤 생각과 감정을 일깨웠기 때문일 것이다."

 

 

 

 - 『허삼관 매혈기』한국어판 개정판 서문 중 작가 위화의 글

 

 


모든 문학작품을 읽을 때면 항상 머리 속에 떠올려 놓고 있는 작가 위화의 위 문장이 예의 이번에도!!! 저의 마음을 흔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했기에 ---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 듯한, 그리고 '불호'의 비율이 월등히 높을 것만 같은 이 작품 『굶주림』에 터져나오는 한숨을 경험할 수 있었었던, 비록 그 많은 한숨들 모두가 다 '좋아도 터지는 한숨'만이 아니었었음에도 이 작품에 흠뻑 젖어들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죠. 그 뿐 아니라!!!

외국으로 나가는 배를 타는 것으로 끝맺음 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예의 이것은 주인공이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선택한 것이 아닌, 물론 '그때는 산다는 것이 멋있었는데'의 시절로 돌아가려는 꿈을 가져서도 아닌, 그저 --- '살아있으려 한다는 것에, 더 살고 싶어한다라는 것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가?'라는, 적잖은 '빈곤'이 현실인 이 사회에서, 그리하여 겉으로 보여지고 싶어하지 않는 수많은 '굶주림'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이 사회에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자들보다) 훨씬 더 많을 수 밖에 없는 것에의 가장 현실적이고 정확한 이유를 알려주고 있다라고도 생각합니다. 그러하기에 당연히!

이 작품은 슬프게 읽혀질 수 밖에 없는 소설이며, 누군가의 실제 이야기였다라는 점5이 이 작품을 읽는 또 다른 누군가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있던 어떤 생각과 감정을 일깨'우기라도 한다라면, 그리고 그 또 다른 누군가가 바로 당신이라면 --- 남게 되는 여운을 쉽게 감당해내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란 생각을 해보게도 됩니다. 지금의 저에게 그러한 것처럼 말이죠. 


▶ 짧은 한두 마디 :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코걸이일 뿐인 무언가가 뜻하지 않게도!!! --- 나에게만큼은 귀걸이가 되어준 느낌?

 

※ 읽어본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의 작품 (수상연도 순)

​- 펄 벅(1938) : 「대지

- 헤밍 웨이(1954) : 노인과 바다

- 알베르 카뮈 (1957) : 이방인」 · 「페스트

- 존 스타인벡 (1962) : 분노의 포도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1970) :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윌리엄 골딩 (1983) : 파리대왕

- 주제 사라마구 (1998) : 눈 먼 자들의 도시· 죽음의 중지」 · 도플갱어」 · 예수복음

-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2010) :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 모옌 (2012) :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

 


 

  1. 2판부터는 수정되어 발간되긴 했지만, "Sult"란 원제를 "Slut"로 표기해 발간한 건 그저 실수로 넘겨서는 안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심지어 책의 안쪽 첫 페이지에도 "Slut"으로 표기되어 있더군요. (게다가 '알라딘'에는 여전히 <SLUT>라 쓰여있는 표지 사진이 떡! --;;) 이런 건 정말 --- 담당자가 가루가 되도록 까여야 할 일!!!
  2. 쉽게 말해, 걍 모든 것이 '신자유주의' 때문이야!라고 말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해진다라는 거지요.
  3. 아사다 지로의 『고로지 할아버지의 뒷마무리』를 번역한 홍은주C는 <옮긴이의 말>에서 "이 작품들을 번역하면서 한숨이 터졌고, 좋아도 한숨이 터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p254)라 적고 있었었지요. 저 개인적으론 "봐도 될까요?"란 이 한 문장에서 그 '좋아도 터지는 한숨'이 저도 모르게 터지더군요.
  4. 이때 주인공이 원망하는 신(神)은 단지 --- 인간이 만들어 놓은, 즉 존재하지는 않는, 하지만 절대적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가정되는 '가상의 존재'로서의 '신(神)'이라고 저는 이해했습니다.
  5. "이제는 더 이상 시도해볼 일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다 해보았다. 하루 온종일 다녀 보았지만 한 가지도 되는 일이 없었다! 누구한테 이 이야기를 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글로 쓰면 내가 지어낸 이야기라고 사람들은 말하겠지."(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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